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977
제 977화
053. 가물에 돌 치듯
삶이라는 건 그런 건가 보다.
‘주먹구구구구구9999구구……구9999999구……99구999999…….’
되는 대로 살면서 임기응변으로 누덕누덕 기워나가다 보면 대충 그게 ‘인생’이 된다.
그러니까 삶이란 곧 할머니 양말 같은 거지.
‘마교의 음모는 그렇게 분쇄당했습니다. 와아아!’
주변 사람들 반응이 약간 좀 많이 이상하긴 했으나, 진천희 입장에서는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던가.
꼭 우리가 이렇게 화창한 날에 오순도순 칼 찌르면서 살아갈 필요는 없는 거예요.
혈사 한번 휘말리면 의원들 정신이 나가게 되지 않던가.
거기다가 이번 사건은…….
‘휘말리는 민간인이 너무 많지.’
마공들 중에 특히 혈마공은 양민의 피, 그러니까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짜 혈액이 필요한 만큼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나니 다시 평화가 오기 시작했다.
참 다행인 일 아닐까?
가끔씩 마공서가 발견되어서 우리의 포졸들이 죽어라 추포하고 있긴 한데, 그래도 솔직히 이게 어디냐 싶다.
일단 대낮에 대로변 다니면서 그런 나아쁜 불온서적을 볼 일도 없고, 밤에도 이상한 암호를 읊지만 않는다면야 볼 일도 없다.
그러니까 음지와 양지를 철저하게 분리하고.
음지는 보이는 족족 쥐어패고 있는 셈이지.
‘돈도 잘 뽑아가고.’
겸사겸사 재산도 죄다 몰수하고 있으니 백린군 주머니가 두둑하다.
딱 하나 걸리는 점이라면.
여하륜이 본산으로 돌아가고 소식이 없다.
‘그래도 잘 살겠거니…….’
지난번 여하륜과 함께 싸운 이후로 왜인지 이놈은 ‘사람’ 상대로는 절대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 같은 게 생겼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것은 통상적인 사람인 거고, 몸에 촉수나 아가미 달고 있는 놈들은 제외한다.
물론 아가미도 그 지난번에 봤던 괴어인 수장 타하파 같은 놈이면 여하륜이 이길 것 같고 말이지.
그리고 그 혈선교주도 인간 같지 않은 놈이니 원래라면 제외지만… 글쎄, 지금의 여하륜은 어떨까?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심상을 자각하기 시작한 여하륜이라면…….
-웃어. 얄미울 정도가 딱 좋아.
문득, 혈선교주와 ‘선배’의 목소리가 겹친다.
‘아, 망할…….’
기분이 확 다운이 되자 진천희는 머리를 흔들어 털어버렸다.
생각해봐야 의미 없는 일.
그동안 잘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용케도 머릿속에서 기어나왔구나 싶다.
‘그래. 내가 한가해서 그런가 보다.’
진천희는 곧바로 다른 일을 하러 나갔다.
때는 여름.
진천희는 의각에서 평화-라고 쓰고 다른 이들이 하면 과로사할 수 있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새가 지저귀고, 꽃향기는 그윽하고.
날씨는 좀 덥고… 좀 많이 덥고…….
그렇게 지내고 있는 사이.
황궁에서 사신이 도착했다.
길고 지루한 예를 바치고, 사신도 비슷한 길이의 예로 응답하니 마무리는 결국 이거다.
“만세, 만세, 만만세!”
이 시대에 황제란 하늘이 낳은 천자(天子) 아닌가.
영혼 없는 만수무강 인사와 함께 드디어 본론으로 넘어간다.
사신, 그러니까 환관은 배에 힘을 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의국백 제갈린의 제자이며, 백린군의 태수인 진천희에게 황명을 내리니, 남동사성(南東四省)으로 출발하여 가뭄을 해결하라!”
‘에엥? 뭐?’
가뭄?
가무우우우우움?
이건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황명에 ‘No’란 없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말해야 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신 진천희, 황명을 받자와 가뭄을 해결하겠사옵니다!”
그렇게 예를 취하자 환관은 칙서를 접고는 다시 공손한 자세로 돌아왔다.
‘이야, 제독태감이 진짜 빡세게 교육시키시는구나.’
장심에 맺힌 굳은살을 보니 이 환관은 장법의 고수인 듯하다.
저 장심에 사람 머리통이 몇이나 으깨졌을까.
허나, 겉으로 봐서는 그냥 흔히 보는 내시와 다를 바 없다.
부디 저 내시가 흑의를 입지 않기를 빌어야겠지.
그거 입는 순간, 삐비가 달의 돌 먹고 삑시가 되듯.
환관은 동창으로 진화하게 된다.
‘예전에 괴어인 잡을 때 부렸던 동창 중의 한 명일 수도 있겠군.’
이게 동창의 무서운 점이다.
관복 입을 때는 황상의 종놈인데, 흑의를 입는 순간 황상의 아싸시노다.
이놈들을 부리면서 누가 누군지도 나는 모른다.
거기다 제국 동창들은 수준급이라 개개인이 살인 기계이자, 인간 도청기라는 것을 모르는 관리들이 없다.
장심에 굳은살 박인 환관은 온화하게 웃었다.
푸근한 미소가 무슨 동네 찐빵집 사장님처럼 생겼다.
생각해보면 거대 그리즐리 베어도 발바닥은 몽실하겠지.
비록 그 앞발로 사람 머리통을 터뜨리지만 말이지.
그가 말했다.
“남동사성 지역에 심한 가뭄이 왔습니다. 본격적으로 가뭄이 시작된 지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고, 백성들은 갈수록 도탄에 빠진바. 이를 진 태수께서 해결하시라는 황상의 명이십니다.”
남동사성.
강서, 광동, 복건, 절강의 4개 지역을 말한다.
제국에서도 남동쪽에 몰린 지역이기도 했다.
“그곳의 성주분들은 무엇을 하시고…….”
“물론 성주들도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고루한 사람들이라…….”
돌려 말하였으나 뜻은 명백했다.
애새끼들이 무능해서 가뭄 하나 못 잡고 있다!
네가 가서 해결해라!
“……그렇군요. 그 땅은 그분들이 더 잘 아시리라 짐작합니다만…….”
진천희 역시 온화하게 물었지만 ‘그쪽 영역은 걔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면 안 돼?’라는 질문에.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황상께서는 다른 생각이신 모양이십니다. 그러니 이리 칙서까지 내리셨으니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환관 그리즐리 베어께서는 ‘황상이 까라면 까야지, 우리가 뭐 어쩌겠냐.’라고 답변했다.
망할.
지난번 마공서 잡으려고 금의위까지 동원했던 값을 치르라는 거군.
‘아주 그냥 칼같이 빚을 회수하시는데, 이번에 나 부려 먹은 값은 어떻게 치르시려고?’
지존천마에서 언급했던 가뭄이 이제 본격적으로 제국 전역을 덮치기 시작했다.
진천희의 백린군이야 백린현일 때부터 이 가뭄을 준비해왔으니 너끈하다고 하지만 다른 지역은 또 다른 상황이겠지.
“……그렇군요. 감사히 해야지요.”
망할 황상 놈들.
이번 청구서도 비싸게 처받을 생각이니 각오해라.
환관이 말했다.
“자료는 여기 있습니다. 이번 일에 한해서 남동사성에서만큼은 도어사(都御史)의 권위를 가지게 되실 겁니다.”
“도어사!?”
도어사(都御史)란?
바로 제국의 최고 감찰기구인 도찰원의 장관직.
즉. 도찰원의 우두머리다!
‘황상 제정신인가? 그걸 왜 날 줘?’
자그마치 정2품의 최고위 관직들 중 하나.
아니.
‘도찰원장인 도어사급 권력을 일시적이라고는 해도… 그걸 나한테 준다굽쇼? 격이 두 단계는 떨어지는 첨도어사(僉都御史) 정도만 해도 성주가 벌벌 떨 텐데……?’
도찰원은 감찰기관.
소속은 이부다.
쉽게 말해 도찰원장인 도어사의 위에는 이부상서와 황제만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소속이 그렇다는 거지 이 도찰원을 운영하는 것은 바로 금의위.
동창은 비밀 첩보기관이며 감찰 기관이니 성격이 약간 다르다 볼 수 있겠지.
도찰원이 도찰 펀치☆ 한 번 날리면 산이 갈라지고 바다가 갈라지진 않겠지만, 관청은 성 단위로 박살 나고, 애들은 곤장 & 귀양 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이 피라미드 계급 시대에 그것은 산 가르고 바다 가르는 것보다 더한 기적이다.
그런 도찰원의 정4품인 첨도어사 정도만 되어도 성주는 벌벌 떨기 시작한다.
참고로 성주의 직위는 옛날로 치면 주목(州牧)이라 불렸으며, 품계로 치면 정3품에 속한다.
그렇다면.
정4품인 첨도어사가 정3품인 성주를 어떻게 못할 것 같지만…….
애초에 감찰기관은 그 품계보다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성주라고 해도 첨도어사 앞에서는 긴장할 수밖에.
실제로 진천희가 받은 감찰패가 바로 그런 첨도어사 이상의 감찰패인 것!
‘물론 뒷배가 좀 단단한 성주라면 버팅기기도 가능하긴 하다만…….’
그러려면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높으신 분에게 어마어마어마어마어마한 뇌물을 바쳐야 한다.
환관이 말했다.
“성주 중에는 뻣뻣한 이도 있을 터이니……. 황상께서는 시간을 아끼고자 하십니다.”
번역.
[뻗대는 놈 달래 가며 할 시간 없으니까 빨리 쥐어 팬 다음에 가뭄 처리해라.]진천희는 한숨을 쉬었다.
‘황상…. 너무하시는구먼.’
진천희 자동 급식기를 이제 자동 급수기로 업그레이드시킬 모양이다.
‘남동사성이면 대한민국의 4배 크기. 그 거대한 지역의 가뭄을 나보고 무슨 수로 해결하라고!’
가뭄이 쉽냐?
황상, 너는 가뭄이 쉬워?
대체 이놈들은 자신을 뭘로 보고 있는 것일까.
휘두르기만 하면 황금과 물과 곡식이 쏟아지는 도깨비방망이로 보는 걸까?
하지만 이성은 착실하게 핸들을 꺾어 다음 대사를 출력했다.
“후. 알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환관은 그리 말하고 돌아갔다.
웃긴 건 무슨 전쟁터 나가는 무관한테 하는 듯한 인사를 하고 갔다는 것.
자기가 봐도 말도 안 되니까 이러는 것이겠지.
* * *
환관을 내보내고 진천희는 스승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스승님은 그런 제자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다가 찻물을 삼킨다.
후룩-
따뜻한 차향을 음미하며 말을 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 가능은 할 게다.”
“수단과 방법……?”
“과거 네가 수파채가 있던 섬에서 진법으로 강물을 출렁이게 하지 않았느냐. 그것을 응용한다면 가능이야 하겠지.”
“……저도 잠깐 그 생각을 했으나 필요한 범위가 말도 안 되게 넓은 터라 이 제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입니다.”
그때 진천희가 한 건 작은 섬 하나, 그 근방의 수류를 출렁이게 만든 것뿐.
허나 이번에는 대한민국 4배 크기의 가뭄을 해결하라고 하니, 아예 격이 다르다.
“하긴…. 만약 그게 쉬웠다면 황상도 진작 했겠지.”
“네…….”
진천희가 풀이 죽어서 시무룩해진다.
그런 제자의 얼굴을 즐거이 음미하다가 스승님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래, 이 스승이 도와줄까?”
“어…. 스승님이요?”
주술도 아시나? 아니……. 생각해 보니 스승님은 강호 제일의 진법의 대가가 아닌가.
스승님께서 진법으로 보조해준다면 그 범위는 훨씬 확장될 수 있기야 하다.
“원래라면 할 수 있어도 하면 안 되는 일이긴 하나. 천기가 찢어진 지금이라면 가능하겠지.”
스승님은 다른 이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소리를 작게 중얼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사제가 같이 어디 먼 곳까지 제대로 나들이를 나간 지도 오래되었지 않느냐? 첫 번째 나들이 때는 북방 이민족과 노느라고 정신이 없었지.”
숙신족 전투.
“그걸 ‘나들이’라고 표현하시는 것은 세상천지에 스승님뿐일 겁니다. 그런데 일정은 괜찮을까요?”
제자, 스승님 뒤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를 보며 묻는다.
“하하. 의각 일이야……. 유호!”
짝!
스승님이 손뼉을 치자, 그림자 속에서 유호가 나타난다.
“네. 주인님. 무슨 일이십니까.”
공간도 없는 곳인데 대체 어디서 나타나는 걸까. 신기할 따름.
“유호, 내 일을 대신 해주게.”
“네?”
“나는 희와 나들이를 해야 하니 앞으로 내 일 좀 대신 처리해주게나.”
“…….”
그렇게 스승님은 간편하게 일 하나를 해결하셨다.
그러더니 문득, 깜빡 잊었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
“참, 나들이 갈 짐도 미리 싸주고.”
“…….”
“하는 김에 다과도 좀 넣어두게나.”
희가 좋아하는 걸로.
“…….”
진천희를 바라보는 유호에게서 살기가 느껴졌다.
‘아니, 뭐, 왜, 뭐?’
이건 내 잘못 아니다. 이 ‘인간’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