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02
길 떠날 준비엔 꽤 시간이 걸렸다.
딸 하나 달랑 보내는 게 아니라 예물이며 혼수로 따라갈 마차가 열 대가 넘었고, 그걸 호위할 인원도 200명이 넘었다.
모용세가가 있는 조양현까지 가는 이 행렬의 총 책임자는 고원달.
그는 모처럼 가문의 중대사를 맡게 된 것에 상당히 긴장을 해서 늘 즐기던 4시간의 취미도 생략할 정도였다.
기수는 그게 반가웠다.
고원달과 함께 일에 매어 있으면 고원지의 손아귀에 놀아날 일도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녀의 몸만 놓고 보자면 또 만나고 싶었지만, 정체를 밝힌 이후의 언행을 보자면 그녀를 다시 만나는 것은 결코 좋은 결과가 나올 리 없었다.
꼬박 닷새가 걸려 준비가 모두 끝났다.
상대가 5대세가의 하나이고, 이쪽도 독종이다 보니 예물 수레들이 바퀴 축이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짐을 가득 싣게 되었다.
혼례 당일에는 약선문 문주를 비롯한 식구들이 모두 참석하겠지만 짐들은 시간이 한참 오래 걸릴 테니 먼저 출발하는 게 일정에 맞았다.
고원달은 양일과 양삼을 보표로 거느리고, 추가로 약선문 제자 30명, 그리고 고용한 무사 200명을 지휘하게 되었다.
고원경의 시중을 들 시녀만도 10명이나 될 정도로 대규모이다 보니 행렬은 인사를 마치고 전부 출발하는 데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기수는 그동안 앞뒤로 오가며 행렬을 챙기는 척하면서 고원경이 탄 마차를 기웃거렸다. 다른 10여대의 마차들과 달리 4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였고, 마부석에 약선문 제자 3명이 나란히 앉아 눈을 번뜩이고 있어서 접근에 한계가 있었지만 정말 궁금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다른 뜻은 전혀 없고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문주가 딸들을 정략결혼의 도구로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매니까 닮았겠지?’
외모는 닮았다면 정말 예쁠 것이고, 성격은 닮았다면 별로일 것 같았다.
마차의 창문 안쪽에 쳐진 막은 결국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기수로선 아쉬운 일이었다.
행렬이 나아가는 동안 기수는 탁지연의 안색이 안 좋은 걸 발견했다.
말을 타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무가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여자가 말 타는 연습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수는 그녀를 위해 마차에 자리를 마련해줬다.
예물이 아닌 행렬 호위 인원들을 위한 천막과 식량을 실은 마차였다.
기수는 고원달의 허락도 받았고, 마차에 빈자리도 남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약선문 제자들은 그게 아니었다.
양삼이 말을 못 타는 것에 대해 대놓고 비웃기 시작했다.
기수는 그들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새끼들이 왜 저러지? 죽고 싶나?’
탁지연은 약선문 제자들이 말을 걸어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약선문 제자들은 그런 그녀를 더 못살게 굴었다.
객잔에 도착하여 식사를 하고 쉬는 동안 기수가 탁지연에게 말했다.
“왜 가만히 있어? 맞받아쳐.”
“일단 입을 열면 격한 감정이 드러날 수도 있어서 참는 거예요.”
원수들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만만해 보이면 계속 괴롭힐 거라고.”
“제가 당해주는 편이 좋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저들은 형님을 시기하고 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고원달의 심복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야 실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불만이 없을 수는 없죠. 그걸 제가 대신 받는 거예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텐데.”
“무슨 소리를 들어도 대꾸를 못하면 저를 만만하게 보겠죠.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르고.”
기수는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꾸 잊어버리지만, 탁지연은 약선문의 제자들까지 원수로 보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몸을 낮추는 것도 다 복수를 위한 포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행렬의 진행은 순조로웠다.
경험 많은 제자 세 명이 먼저 말을 타고 앞서 가면서 행렬이 밥을 먹고, 묵을 객잔을 찾아서 미리 식사까지 차려놓도록 해놓았기 때문에 일행은 도착하면 바로 밥을 먹고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해관을 나선 이후로는 규모가 큰 객잔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마차에 싣고 온 천막들이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즈음엔 탁지연도 말타기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놀림감이 되지 않았다.
기수는 그녀를 보며 무엇이건 참 빨리 배운다는 생각을 했다.
‘잘 하면 나 정도는 될 거 같아.’
기수는 이번 여행을 시작하면서 첫날과 둘째 날 금단증상을 겪어야 했다.
매일 팀을 바꿔 가면서 미녀들과 뒹굴던 생활이 갑자기 끊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흘째가 되니까 더 이상 여자 생각은 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진기가 회음혈로 흐르지 못하도록 하는 운기법이 이용되었는데, 막상 그렇게 여자 생각을 차단하고 나니까 정신이 맑고 기분도 좋아졌다.
‘어쩌면 난 금욕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10년 정도 여자를 끊으라고 해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진기의 운행 경로를 바꾸는 것만으로 욕망의 조절도 가능하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물론, 정말로 금욕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행렬이 순조롭게 착착 진행되자 고원달은 몹시 기뻐했다.
“하하하…! 이대로 가면 예정보다 이틀이나 빨리 도착하겠는 걸.”
기수가 옆에서 한 마디 했다.
“이 모든 게 공자님의 영명하신 지휘 덕분입니다.”
“그런가? 하하하!….”
기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표를 좀 하다 보니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일이 순조롭게 돌아갈지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
10여대의 마차를 호위해 가는 느리고 지루한 행렬은 조양현을 사흘거리에 둔 시점에 이르러 첫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것은 구화산이었다.
아홉 가지 화려한 경치를 자랑한다는 명산.
봉우리가 높고 험해도 마차가 지나갈 길은 뚫려 있었다.
문제는 최근에 큰비가 몇 차례 와서 관도가 일부 유실되었다는 점이었다.
선발대가 산길을 둘러보고 와서 고원달에게 보고했다.
“축대가 무너진 곳이 두 군데 정도 있고, 빗물에 쓸려 내려간 길도 몇 군데 있습니다. 지나가려면 삽, 괭이, 나무판 같은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길을 직접 만들면서 가야 한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고원달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도를 꺼내 살펴보았다.
“이쪽으로 돌아서 가면 며칠이나 걸리지?”
나이 든 제자가 대답했다.
“서두르면 6일, 천천히 가면 7~8일 걸릴 겁니다.”
“그렇게나 많이?”
“구화산을 빙 둘러서 가는 거니까 그 정도는 걸리죠.”
고원달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기수에게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기수는 이곳에 초행이지만 기본 상식으로 대답했다.
“비온 뒤의 산길에 저렇게 무거운 마차로 진입하는 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좀 지체되더라도 돌아서 가시지요.”
고원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원한 것은 그 대답이 아니었다.
“길이 없어진 것도 아닌데 뭐 하러 시간을 두 배나 들인단 말인가? 그리 하면 원래 예정보다 늦어질 텐데, 아버님이나 형들이 나를 무능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기수는 갑자기 비가 많이 온 것을 자신의 능력과 연과 지을 필요는 없다고 조언해주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니 꼴린 대로 하렴.’
이미 마음의 결정을 해놓고 뭐 하러 물어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행은 도끼, 삽, 괭이 등을 사온 후 산길로 접어들었다.
경사가 심하지 않은 곳은 별 문제가 없었고, 문제가 있는 곳도 사람이 200명이 넘다 보니 복구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원달은 의기양양했다.
“하하하! 내가 뭐랬어? 다 잘 될 거라고 했지?”
기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고원달이 기수를 걸고 넘어졌다.
“마차가 무거워서 위험할 수도 있다고 한 게 누구였더라?”
기수는 어이가 없었다.
상식적인 조언을 했을 뿐인데 꼭 자기 잘 난 걸 확인하고 싶어 하는 고원달의 인격수준에 그저 동정심이 일 뿐이었다.
그래서 무슨 말로 그의 비위를 한 번 맞춰줄까 고민하는 중인데, 갑자기 좌우 숲에서 동시에 여러 개의 징소리가 들려왔다.
고원달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전원 전투준비!”
무사들은 삽과 도끼와 괭이를 내던지고 저마다 무기를 뽑았다.
그리고 각자에게 배정된 마차들을 지켰다.
잠시 후 징소리 난 숲에서 깃발들이 솟아오르고 산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원달은 적의 규모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신음을 토했다.
“으음….. 이렇게 많다니….”
대충 세어도 1000명이 넘을 것 같은 대규모였다.
현재 약선문의 무거운 마차들은 언덕길을 빠른 속도로 넘어서 빠져나가기도 어렵고, 후진으로 온 길을 되돌아 나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만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
한 마디로 딱 걸린 것이다.
기수는 ‘거 봐. 돌아서 가자니까.’라고 한 마디 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고원달이 앞으로 나서서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약선문의 고원달이다! 너희들의 두령을 만나고 싶다!”
그러자 산적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내가 구화산 산채의 채주 맹유산이다!”
9척 장신. 나이는 30대 중후반, 구레나룻과 수염이 시커멓게 자란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 두 팔이 고릴라 같이 발달한, 진짜 산적 포스 지대로 나는 외모였다.
고원달이 그에게 포권을 하고 말했다.
“이 산에 녹림 형제들이 있는 줄 미처 몰랐소. 먼저 인사를 차리지 못하고 들어온 것을 사죄하겠소.”
맹유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과연 명문가의 자제답게 예의가 바르군. 좋소! 사과는 받아들이겠소.”
고원달은 맹유산이 험상궂은 외모와 달리 말이 통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우리 약선문은 이번에 모용세가와 혼인을 하기로 했소. 그래서 이곳 구화산을 넘는 중이니 부디 길을 열어주기 바라오.”
지금 문제를 만들면 약선문 뿐만 아니라 모용세가까지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니 까불지 말라는 뜻이었다.
녹립칠십이채가 세력 모으기에 집중해서 최근에 이르러서는 72채가 아니라 144채, 288채로 불러야 할 정도가 되었다는 얘기가 있지만, 그래도 녹림은 녹림이었다.
정식으로 무공을 익힌 문파들과는 레벨 차이가 있었다.
현재 5:1이라는 압도적으로 불리한 포위를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원달의 얼굴에 두려움이 그다지 크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문파 대 문파의 대결이라면 혼자 5명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지만, 상대가 산적이라면 한 사람이 다섯 명을 쓰러트리는 게 불가능한 일만은 아닌 것이다.
맹유산이 말했다.
“양가의 혼인을 축하하는 바이오.”
“고맙소!”
고원달은 일이 잘 풀릴 거라는 예감을 느꼈다.
그러나 맹유산의 다음 말은 그의 기대를 벗어났다.
“혼례란 인륜지대사란 말도 있으니까 사람과 사람의 일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니 물건은 여기 놔두고 가시오. 사람은 모두 보내주겠소.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고.”
고원달은 기가 막혔다.
“물건은 놔두고 가라고?”
“그렇소. 마차들 전부. 그리고 대청단.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오.”
고원달은 코웃음을 쳤다.
“잘도 끌어 모았다 했더니 결국 노리는 게 있었군.”
“평원에선 작전이 좀 어려웠을 텐데 이렇게 나의 영역으로 애써서 올라와준 것에 대해 감사하오. 하하하…..!”
고원달은 검을 뽑아 들고 호통을 쳤다.
“닥쳐라! 네놈들 따위가 감히 우리 약선문의 적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으냐?”
“오호! 지금 싸워보겠단 말이오?”
“당연하지!”
“그럼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고 하는 것이니,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흥! 무슨 일이 일어날 거란 말이냐?”
맹유산의 얼굴에 살기가 번졌다.
“살려 보내주겠다고 해도 거절했으니 네놈들을 모조리 죽여주마. 그리고 신부도 내가 접수해주지. 흐흐흐…..”
고원달은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네놈 따위가 감히…..!”
그가 맹유산을 향해 달려가자 산적들이 일제히 활을 쏘았다.
고원달뿐만 아니라 마차를 향해서도 화살이 날아갔고, 이어서 산적들까지 돌진해서 순식간에 일대 혼전이 펼쳐졌다.
기수는 고원달을 따라갔다.
그가 이런 곳에서 산적 따위에게 죽게 내버려두어선 안 되는 것이다.
굳이 기수가 따라가지 않더라도 고원달은 뛰어난 무공을 선보이고 있었다.
수십 발의 화살이 집중적으로 날아왔지만 그는 검으로 그걸 다 쳐내며 맹유산과의 거리를 계속 좁혔고, 마침내 검으로 그를 찔렀다.
“죽어랏!”
“흥! 그건 내가 할 소리다!”
맹유산이 낭아봉을 휘둘렀다.
강력한 파열음과 함께 고원달의 검과 맹유산의 낭아봉이 맞부딪혔는데, 놀랍게도 고원달이 밀렸다.
고원달은 깜짝 놀랐다.
가벼운 검과 무거운 낭아봉의 차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웠다.
고원달은 확인을 위해 다시 공격을 가했다.
“산적 주제에 제법이구나.”
“네놈은 장법이 장기라면서 왜 검을 쓰고 있느냐? 암습할 기회를 노리는 거냐?”
고원달은 뜨끔했다.
단지 혼례 일정과 예물 행렬의 진행경로에 대해서만 조사를 한 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낱낱이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번 매복은 준비가 대단히 철저하다고 할 수 있었다.
자칫하면 호되게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