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03
고원달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천하의 약선문이 산적 따위에게 당할소냐!”
그리고 진기를 바짝 끌어올려 더욱 위력적인 검술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두령만 잡으면 이 상황은 타개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고원달의 검이 본격적으로 요혈을 노리자 맹유산은 결국 밑천을 드러냈다.
명가에서 제대로 배운 정묘한 검법 앞에 초식 운용이 불안해진 것이다.
그러나 초식에서 밀린다고 승부까지 가려진 것은 아니었다.
맹유산의 낭아봉은 고원달의 화려한 초식을 단순하지만 묵직하게 막아냈다.
보통의 두세 배는 됨직한 무거운 낭아봉을 타고난 신력으로 휘둘러대니까 고원달은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기수는 뒤에서 그 광경을 보며 망설였다.
고원달이 아닌 자신이 나서서 싸워야 할 것 같은데, 자칫하면 유리한 싸움에서 멋지게 승리할 기회를 빼앗겼다고 삐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구경만 하면 보표가 밥 먹고 하는 일이 뭐냐고 할 수도 있었다.
누군가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은 정말 귀찮은 일이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기수의 망설임을 종식시켜줄 상황이 펼쳐졌다.
산적들 중 중간 보스쯤 되어 보이는 놈들이 싸움에 가세한 것이다.
기수는 칼을 뽑아 들고 뛰어들며 외쳤다.
“너희 따위가 감히 공자님의 적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으냐!”
중간보스 한 놈을 멋지게 베어 넘긴 후 슬쩍 고원달을 보니 몹시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든 것 같았다.
일단 기수가 싸움에 나서자 고원달은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무지막지한 산적 두령에게 계속 매어 있기보다는 행렬 전체의 안위를 살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우선 4두마차를 살펴보았다.
자기 동생뿐만 아니라 가장 귀중한 예물이 그곳에 실려 있었다.
다행히 마차는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었다.
문제는 전체적으로 밀리는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고원달은 좌우로 바쁘게 뛰며 방어진의 허점을 보완했다.
그의 지휘 덕에 균형을 찾게 된 약선문 병력은 이전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전투에 임했고 산적들은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기수는 산적 두령들과 싸우는 짬짬이 뒤를 돌아보며 고원달이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지휘관의 존재 유무에 따라 참 많은 차이가 있구나.’
기수가 뒤를 돌아볼 정도로 여유를 부려도 산적들은 쉽게 기수를 제압하지 못했다.
기수 역시 처음에 한 놈을 벤 이후 더 이상은 적을 쓰러트리지 않았다.
산적들이 이기지 못하는 것은 실력이 부족한 것이고, 기수가 더 이상 세게 나가지 않는 것은 필요 이상의 실력을 드러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도룡문에서 지내는 동안 배웠던 탈백도 48초식을 자유롭게 섞어서 펼쳐내며 적 4명을 여유롭게 상대했다.
맹유산이 노갈을 터뜨렸다.
“네놈은 누구냐!”
“나? 양일.”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독종의 개 노릇을 하는 거냐?”
“워우! 워우! 너 말조심해. 까불다가 죽는 수가 있다.”
기수는 웃으며 얘기했지만 맹유산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직접 상대해본 결과 기수가 고원달보다 훨씬 더 고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옷차림을 보니 약선문의 문도인 것 같은데 고원달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중요한 사실은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맹유산은 부하들과 시선을 맞춘 후 갑자기 소리쳤다.
“퇴각하라! 전원 후퇴!”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산적들은 썰물 빠지듯 달아났다.
명령을 내린 맹유산 본인도 기수를 상대로 낭아봉을 험악하게 휘둘러 간격을 벌린 후 곧장 줄행랑을 놓았다.
기수는 그들의 돌연한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뭐 이렇게 포기가 빨라?’
그는 고원달 쪽을 봤다.
도망치는 놈들을 추격해서 잡아 올까? 하고 묻는 표정이었다.
고원달이 기수뿐 아니라 모두를 향해서 말했다.
“쫒지 마라! 함정을 파놓았을지도 모른다.”
산적들의 준비가 철저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공연히 추격한다고 전력을 분산시켜봤자 좋을 일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고원달은 대신 길을 재촉했다.
“선두! 전방의 상황을 확인하고 출발하라!”
행렬이 다시 움직였다.
그때 하늘에서 뭔가 둔중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하늘을 쳐다본 기수는 깜짝 놀랐다.
불과 돌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약선문 무사들도 크게 놀랐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원달은 좌우를 둘러보며 외쳤다.
“이게 어디서 날아오는 거냐? 적의 위치를 찾아라!”
그러나 숲 속 여기저기서 번갈아 날아왔기 때문에 어느 한 곳을 지명하기 어려웠다.
기수는 불붙은 통나무 더미, 돌멩이들의 크기와 비행 궤적을 통해 산적들이 투석기 혹은 캐터펄트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얘들 뭐야?’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장비였다.
공성전을 하는 군대가 아니라면 갖추기 어려운 장비였다.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인가?’
녹림의 무리가 반란군으로 변신하는 것이 종종 있는 일이기는 했다.
어쨌거나 중요한 사실은 투석기의 위력이 엄청나서 행렬이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산적들은 투석기의 조준을 미리 길 위에다 맞춰 둔 듯 했다.
좁은 산길을 돌 맞아 고장 난 마차가 가로막자 앞뒤가 분리 되었다.
선두의 마차는 돌과 불의 비를 피해 앞으로 도망치고, 뒤의 마차들은 길이 막혀 적의 공격을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
고원달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발만 굴렀다.
기수는 이럴 때 조언해 줄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었다.
똑똑한 탁지연이라면 타결책을 제시해줄 것 같았다.
그런데 좌우를 둘러보아도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뭐야! 혹시…..’
기수는 쓰러진 사상자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현재 무공 실력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 상황에서 죽거나 다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사라졌으니 걱정이 되었다.
기수는 그녀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는데 고원달이 물었다.
“이봐! 양일.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지?”
방어진 지휘할 때는 곧잘 하더니,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닥치니까 많이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기수는 산길을 둘러보았다.
행렬은 더 이상 예전처럼 이어질 수 없었다.
“고장 난 마차를 중심으로 그 뒤는 모두 포기하고 전방에만 집중하여 여기를 빠져나가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저 마차들을 다 포기하자고? 그럼 그 안에 든 예물은?”
기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다 챙겨 가면야 좋겠지. 하지만 현재 상황에 그건 욕심이야.’
기수 입장에선 어차피 자기 물건이 아니니까 마음 편한 면도 있었다.
“지금 날아오는 돌들이 안 보입니까? 시간을 지체하면 피해만 더 누적될 겁니다.”
“하지만 저 예물들은…..”
“사람이 마차를 등에 지고 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길이 막혔으니 포기하십시오. 가장 중요한 4두마차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원달은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무사들을 시켜서 각자 한 짐씩 지도록 해야겠다.”
“그러면 움직임이 느려져서….”
고원달은 기수의 조언을 들으려하지 않았다.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약선문 무사들은 날아오는 돌과 불붙은 나뭇조각들을 피하면서 등에 짐까지 져야 했다.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것과 비교하여 피해는 급격히 늘어났다.
적이 조준해 놓은 공격지점에 얼쩡거리면서 짐을 져서 동작까지 굼뜨니까 날아오는 돌멩이들을 피하기가 더 어려워진 것이다.
기수는 답답했지만 자기한테 짐 지라고 하지 않는 데서 그냥 신경 끄기로 했다.
대신 칼을 허리에 차고 깃대로 쓰던 긴 봉을 들었는데, 그것은 날아오는 돌멩이들로부터 자신과 고원달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고원달이 말했다.
“이제 됐으니 전방으로 가자!”
그나마 예물의 절반 가까이를 건진 데서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러는 사이.
선두로 치고 나간 4두마차에 은밀하게 다가가는 인영들이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숨기며 접근한 그들은 일제히 암기를 뿌렸고, 말과 마부가 한꺼번에 쓰러지며 마차를 멈추게 하고 말았다.
약선문 제자와 무사들이 외쳤다.
“전방에 적이 나타났다!”
“또 다른 매복이다! 앞으로!”
새로 나타난 자들은 산적 중에서도 무공, 특히 경공술이 뛰어난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독보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화화낭군(華花&xx37070;君)이라는 구화산 부두령이었다.
그는 20대 초반의 아주 잘 생긴 외모를 지녔는데, 부녀자 납치, 겁탈이 장기였다.
겉보기엔 20대지만, 사실 그의 나이는 50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공으로 젊어 보이게 만드는 주안술, 그리고 채음보양술을 통해 그런 외모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약선문의 대청단을 자기가 찾아내겠다고 자원했다.
물론 약뿐만 아니라 다른 목표도 있었다.
신부의 가마를 습격하여 내용물을 꿀꺽하는 것은 그의 취향에 딱 맞는 일이었다.
마부 잃은 마차 지붕에 착지한 화화낭군은 일 장으로 마차 천장을 박살냈다.
단단한 자단목 지붕이 산산이 박살나는 순간, 검 한 자루가 그 안에서 솟아올랐다.
화화낭군은 깜짝 놀라 몸을 회전시켰고, 겨우 피할 수 있었다.
검을 쥔 사람은 약선문의 다섯째. 고원경이었다.
마차 지붕 위로 올라선 그녀는 붉은색 신부복을 입고 얼굴도 붉은 면사로 가리고 있었는데, 검술이 몹시 날카롭고 위협적이었다.
“흐흐흐!…. 장미에 가시가 달렸군.”
화화낭군은 그녀의 모습을 보자 음심이 크게 일어나서 자신의 무기인 철선을 펼쳤다.
그의 부채는 훌륭한 방어도구이기도 하고, 안에 다양한 암기와 독, 춘약들이 숨겨져 있기도 했다.
화화낭군은 약선문 무사들이 몰려오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부터 곧장 비겁한 수단을 총동원했다.
확! 퍼지는 흰 가루에 고원경은 급히 숨을 멈추었다.
순간,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반짝이는 암기 십여 개가 동시에 날아왔다.
고원경은 여자치고는 녹녹치 않은 무공을 익혔지만 외출 없이 규방에서만 살아야 하는 약선문 문주의 정책 때문에 실전 경험이 전무했다.
그러다 보니 가루약과 암기가 동시에 날아오는 콤비 공격에 자기 실력만큼 적절히 대응을 하지 못했다.
“으음…..!”
암기들을 모두 튕겨내려 했지만 면사와 연기가 시야를 가린 상태에서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2개를 맞았는데, 따끔한가 싶더니 곧 맞은 부위 일대가 얼얼해져 왔다.
화화낭군은 큰소리로 웃었다.
“크하하…! 넌 이제 내 거다!”
그러나 그가 접근했을 때 고원경은 여전히 검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화화낭군은 당황했다.
“어, 어째서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거지?”
그의 암기에 묻힌 독은 신경을 마비시키는 것으로 약효가 대단히 빨리 퍼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화화낭군은 암기가 2개나 명중된 고원경이 계속 저항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차! 상대가 독종이지….’
그는 불현듯 자기 실수를 깨달았다.
독을 만드는 자들이 해독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리 없었다.
고원경은 독종 안에서도 귀한 신분, 문주의 딸이니 피독주 같은 것을 소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에잉! 이걸 다 막아내진 못하겠지!”
화화낭군은 철선에 내장된 암기, 액체, 가루들을 동시에 다 발사했다.
웬만한 독으로는 그녀를 제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고원경은 독에 내성이 있다고 해도 암기의 마비 독 때문에 움직임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결국 암기들은 상당 수 막아냈지만 가루와 액체로 된 공격엔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화화낭군은 텅 비어 가벼워진 부채로 그녀의 공격에 대비하며 급격히 간격을 좁혔다.
이제 혈을 짚어 제압한 후 들쳐 업고 튀면 되는 것이다.
‘일단 요것은 동굴에 숨겨 놓고 약 찾으러 다시 와야지. 흐흐흐….’
4갑자의 내공을 증진시켜 주는 대청단보다 신부가 먼저인 화화낭군이었다.
그러나 약선문 제자들이 마차 위의 상황을 발견함으로써 문제가 발생했다.
“아가씨를 구해라!”
“마차 위에 적이 있다!”
제자들이 마차 위로 몸을 날리자 화화낭군은 본신 무공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그들을 쓰러트렸다.
신부에게 약을 다 써놨는데 이제 와서 빼앗길 수는 없다는 절박함. 어떻게든 신부를 업어가겠다는 의지가 고강한 무공으로 표출되었다.
약선문 제자들은 이번 행렬을 위해 특별히 선발된 실력자들이지만 쉽게 화화낭군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러나 고원달과 기수가 위급함을 발견하고 달려오자 화화낭군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
결국 건져 올려서 양념까지 다 발라놓은 고기를 놔두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영약보다 여자를 밝히는 그이지만 목숨만은 아까웠던 것이다.
“경아! 괜찮냐?”
고원달은 고원경을 부축하여 내려와 그늘에 앉히고 우선 눈에 띄는 암기들을 전부 뽑아주었다.
“오라버니…..”
고원경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기수는 비로소 면사 사이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고원지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더 갸름해서 귀엽기보다는 성숙미가 느껴졌다.
‘딸들은 다 예쁘게 낳아서 잘 키워놨네.’
사랑해서가 아니라 팔기 위한 상품으로 키웠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예쁜 건 예쁜 거였다.
고원달이 응급조치를 취하는 동안 기수는 다른 생각을 했다.
‘이 아가씨도 동생처럼 거기에 풀이 하나도 없고 핑크색일까?’
같은 연공과정을 거쳤다면 그럴 가능성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