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04
기수는 시선 컨트롤 하느라 애를 먹었다.
상상을 하다 보니까 시선이 자꾸 그 쪽으로 갔던 것이다.
치마 아래로 살짝 드러난 종아리가 자석처럼 그의 시선을 잡아당겼다.
그는 고원달의 고함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이런 개자식! 감히 음약을 쓰다니.”
고원경의 상태를 진맥한 후 상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기수는 음약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우오오! 이게 얼마만에 들어보는 말인가.’
무협지를 읽다 보면 수도 없이 나오는 장면.
춘약 혹은 음약에 중독된 미녀를 주인공이 마지못해 구원해주는 그 추억의 장면.
기수는 자기가 이곳에 온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이제서야 겨우 그 장면에 접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내가 구원해줄 차례인가?’
그러나 현실은 아쉽게도 소설과 달랐다.
중독자 주변에 오로지 자기 혼자만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녀의 오빠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남녀간의 정사에 의해서만 해독되는 것도 아니었다.
고원달이 옆에 있는 제자에게 말했다.
“마차에 가면 의자 아래 바닥 판을 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 안에 약상자가 있으니 가져오너라.”
독종답게 그 정도 중독은 평소 가지고 다니는 약상자의 제독 키트오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한 것이었다.
기수는 괜히 좋다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마차에 다녀온 제자가 다급한 어조로 보고했다.
“없습니다!”
“무슨 소리냐?”
“마차 바닥이 열려 있고, 그 안은 텅 비어 있습니다.”
“뭐라고!”
고원달은 동생을 팽개치다시피 하며 벌떡 일어서더니 마차로 달려갔다.
제자의 보고대로 마차는 바닥 쪽을 교묘하개 막아두었던 판자가 열려 있었다.
고원달은 거칠게 그 속을 뒤졌다.
“아, 안 돼! 예물도 여기 함께 두었는데…”
여동생의 해독보다 천화대청단을 도둑맞았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였다.
그는 마차 주변의 제자와 무사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떤 놈이냐! 도대체 어떤 놈이 훔쳐갔느냔 말이다!”
그러나 상황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워낙 어수선한 전투중인데다 고원경을 구출해내는데 다들 정신이 팔려서 그 이후에는 특별히 마차에 신경을 쓴 사람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대청단이 거기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고원달의 보표인 기수조차도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고원달은 제자들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아까 그 놈! 기생오래비처럼 생기고 손에 부채를 들고 있던 그 놈을 잡아라!”
그가 되돌아와서 경황없는 틈을 노려 훔쳐간 게 분명했다.
무공으로 보나, 달아나던 경공으로 보나, 그 말고는 그런 짓을 할 자가 없었다.
일단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온 것을 보면 대범하고 배짱이 두둑한 자였다.
제자들이 멍하니 있자 고원달은 악을 썼다.
“뭘 보고만 있느냐! 당장 잡으러 가지 않고. 이 산을 다 뒤져서라도 놈을 잡아와라! 대청단을 도둑맞고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산적 무리를 피해 달아나던 처지에서 토벌대로 변신해야 할 판이었다.
고원달의 시선이 기수 쪽으로도 향했다.
기수는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말했다.
“제가 가서 잡아올 테니 공자님은 여기서 동생을 돌보고 제자들을 지휘하십시오.”
고원달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하고자 했던 말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기수는 숲으로 들어가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수록 속도를 올렸다.
기수는 이제까지 방관자적 입장이었지만 대청단을 되찾는 일에는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탁지연에게 주려고 노리던 것이기 때문이다.
‘산적의 손에 넘어가도록 놔둘 수는 없지.’
그는 근처의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예리한 안력으로 은밀하게 도주하는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후후후….. 내 이목을 속일 수는 없지. 나는 에이왁스(AWACS)거든.”
기수는 곧장 선풍비를 시전하여 그들의 뒤를 덮쳤다.
잔백지로 부하들을 순식간에 제압하자 화화낭군이 깜짝 놀라 돌아섰다.
“웨, 웬 놈이냐!”
“후후…. 이미 구면이면서 묻기는…”
“아! 너, 너는….”
화화낭군은 다가오는 고원달과 기수의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고 도망쳐 온 상태이기 때문에 기수를 즉시 알아봤다.
그러나 기수의 무공이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몹시 당황했다.
그가 부하들을 둘러보자 기수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죽이지 않고 모두 점혈만 했으니까. 한 시간 뒤엔 저절로 풀려날 거야.”
화화낭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손을 대지 않고 지풍으로, 그것도 20여명을 거의 한 순간에 제압하는 것은 보통 고수는 흉내도 내기 어려운 경지였다.
화화낭군은 기수와 싸워서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잽싸게 인정했다.
“헤헤헤…. 제게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헤헤헤….”
비굴함이 뚝뚝 흘러넘치는 미소였다.
기수는 피식 웃은 후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만 돌려주면 너와 네 부하들 모두 살려 보내주겠다.”
“예! 말씀만 하십시오. 무엇이건 다 드리겠습니다.”
목숨만 살려준다면 아까울 게 없었다.
“내 놔. 대청단.”
기수 입장에선 그것만 받아내면 화화낭군에겐 더 이상 볼일이 없었다.
화화낭군은 눈을 크게 떴다.
“대청단이라뇨? 그걸 왜 제게?…..”
“죽이고 뒤져서 찾아갈까?”
“아! 아닙니다. 진정하십시오. 전 그걸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장난 치냐? 네가 아니면 누가 그걸 훔쳤겠어?”
“저, 저는 오로지 신부에게만 관심이 있었을 뿐, 영약은 못 봤습니다.”
“웃기네.”
기수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누군 줄 알아? 에이왁스인 동시에 인간 스캐너야. 내 앞에서 거짓말이 통할 것 같아?’
기수는 염정구심술을 시전했다.
혈천제에게 마옥혈린수를 당한 후 다시는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남을 조종하는 것 말고 마음을 읽는 기술은 때대로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내 인생이 오늘 끝날 수도 있겠구나.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화화낭군은 위기 상황에 몰린 때문인지 굉장히 다양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수는 그가 나이 50이 넘었다는 사실, 이제까지 겁탈한 여자의 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그녀들로부터 빼앗은 물건이나 체모들로 자신만의 콜렉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등을 알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 새끼. 곱게 늙을 것이지…”
얼굴만 보면 곱게 늙긴 한 것 같지만 하는 짓은 변태 중늙은이였다.
기수는 그가 마차로부터 곧장 도망쳐 왔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이놈이 아니라면 범인은 도대체 누구야?’
제자들 중 한 명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무림인에게 있어 4갑자의 공력이란 사문을 배신하게 만들 수도 있는 강렬한 유혹이기 때문이다.
기수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자 화화낭군은 허점을 발견했다.
시선조차 자기에게 주지 않는 완전 무방비 상태.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자기도 나름 고수 소리를 듣는 입장.
상대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고 해도 방심한 상태에 이런 순간, 이런 각도에서 불시에 암기를 발사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고민보다 빠른 결단으로 그의 소매 안에 감추어두었던 탄통에서 암기가 발사되었다.
지극히 빠른 속도로 인해 귀를 찢는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크하하하….! 죽어랏!”
“그거 누구한테 하는 소리야?”
“헉!”
화화낭군은 기수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기겁했다.
기수는 염정구심술을 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를 보지 않고도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풍비로 간단히 상대의 등을 잡은 것이다.
“헉….!”
화화낭군은 혈도를 잡혀 전신이 마비되었다.
기수가 그에게 말했다.
“살려주겠다고 한 말은 취소다. 넌 내가 원하는 물건을 주지도 않았고, 또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으으…. 제,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듣기 싫어.”
기수는 그의 마혈을 눌렀다.
본래 그가 화화낭군은 열심히 따라온 것은 그에게서 대청단을 빼앗은 후 고원달에게 돌아가서는 못 찾았다고 보고하려는 생각에서였다.
이 첩첩 산중에서 원래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산적을 못 찾는 게 잘못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헛다리를 짚었으니 작전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화화낭군을 고원달에게 데려다 주고 알아서 심문하라고 한 후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자기는 제자들을 상대로 대청단의 소재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기수가 그런 계획을 짜는 동안.
고원달은 위기에 봉착했다.
투석기 공격은 멈추었지만 대열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행렬을 향해 잠시 물러났던 산적들이 다시 총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고원달은 큰소리로 부하들을 지휘했다.
“방어대형을 갖춰라!”
약선문 무사들은 저마다 무거운 짐을 하나씩 졌지만 그래도 마차를 호위하던 때보다는 움직임이 자유로워진 편이었다.
부상자를 먼저 보내고, 그럭저럭 방어진 형태를 갖출 수 있었다.
산적들은 수가 훨씬 많았지만 역시 레벨에서 차이가 났기 때문에 마음처럼 쉽게 전멸을 시키지 못했다.
고원달은 남에게 맡길 수 없는 여동생을 들쳐 업고 전황을 살폈다.
비록 마차와 부하들을 잃었지만 이대로 싸우면서 물러나면 목숨을 잃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변수가 발생했다.
산적들 사이에 갑자기 녹색 장포 입은 자들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그들이 약선문 방어진의 중간으로 파고 들었다.
“막아라! 대열이 분리되면 안 된다!”
그러나 녹색 장포 입은 자들의 무공은 이제까지의 산적들과 달랐다.
약선문 정식 제자들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오히려 더 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실력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30여명 넘게 난입하자 방어진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저, 저놈들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고원달은 산적들의 준비가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다단계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덜컥 겁을 먹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그는 보표들을 소리 높여 불렀다.
“양일! 양삼!”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대답이 없었다.
고원달은 녹색 장포의 괴인들을 둘러본 후, 그 정도 무공이라면 자신이 포위되었을 때 빠져나오기 어려울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모두 제 자리를 지켜라!”
부하들에게는 그렇게 명령하고 자신은 여동생을 업은 채 달아나기 시작했다.
수장이 달아나는 황당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이자 약선문 제자들은 더 빨리 무너졌고 산적들은 현장을 장악했다.
제자들은 그나마 끝까지 싸우려고 했지만 무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들은 돈을 벌려고 약선문에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 위급한 상황에 처해서까지 충성심을 발휘할 이유가 없었다.
무사히 빠져나가기만 하면 등에 지고 있는 물건은 자기 차지가 된다는 사실도 그들을 자극했다.
기수가 화화낭군을 들쳐 메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상황이 거의 종료되어 가는 중이었다.
수장과 병력 대부분이 도망쳤는데 무슨 수로 버틸 수 있겠는가.
기수는 고원달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는 인기척이 워낙 많아서 어느 것이 고원달인지 알 수 없었다.
“저 놈 잡아라!”
“부채주님이 포로로 잡혀있다!”
기수는 산적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소리쳐대자 더 이상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탁지연은 무사할까?’
위험한 상황이지만 영리한 그녀니까 잘 빠져나갔을 거라 생각되었다.
아까부터 찾아도 보이지 않던 그녀가 지금 찾는다고 나타날 것도 아니었다.
기수는 즉시 몸을 날려 모용세가가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숲으로 파고들어 경공을 시전한지 1분 만에 추격은 모두 떨어져 나갔다.
기수는 높은 나무로 올라가 스파이더맨처럼 나무와 나무 사이를 점프하면서 좌우를 살펴보았다.
안력을 돋우어 어떠한 작은 흔적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 결과 마침내 고원달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붉은 천. 바로 고원경의 옷이었다.
벼랑 틈에 숨겨져 있었는데 워낙 강렬한 색이라 옷자락의 일부가 보였다.
‘일단 숨었다가 어두워진 뒤에 빠져나갈 생각인가? 그렇다면 좀 더 잘 숨었어야지.’
기수는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절벽 중간의 갈라진 바위틈에 제법 넓은 공간이 있었고 막 자른 듯한 나뭇가지가 고원경을 덮고 있었다.
“제가 왔습니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나뭇가지를 들추어 보니 고원경만 창백한 표정으로 누워 있었고 고원달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거지?”
기수는 그가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고원경을 여기 숨겨두고 적을 따돌리거나, 그들과 싸우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기수는 화화낭군의 혈도를 확인 차 한 번 더 누른 후에 고원경 옆에 던져놓고 두 사람 위로 나뭇가지를 잘 덮어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고원달을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