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09
구화산에서 전투준비를 하는 동안.
기수는 짬만 나면 탁지연이 운기조식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호법을 서주었다.
대청단을 흡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탁지연은 이를 악물고 집중했다.
원수의 집안에서 만든 영약을 먹고, 그 힘으로 복수할 거라는 생각이 그녀에게 강한 동기 유발을 하는 것 같았다.
고원달은 마음이 조급해서 매일 모용각을 찾아가 출정 계획을 물었지만 모용각은 전혀 바쁠 게 없이 느긋했다.
일부러 그런다기보다는 모용세가 입장에서도 중요한 일전이라 신중하게 대처하는 것일 뿐인데 고원달이 보기엔 자기를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족들이 도착할 날이 다가오자 고원달은 점점 더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기수에게 짜증을 내는 경우도 많았다.
기수는 그의 그런 행동에도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그것은 좀 의외였다.
아마 여동생(들)을 따먹고, 영약을 훔쳐먹었기 때문에 그 정도 투정은 받아줘도 된다고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마침내 고원달이 그토록 바라던 공격날짜가 잡혔다.
고원달은 자기에게도 병력을 절반쯤 나눠줄 거라고 기대했지만 모용각은 단 한 명도 배정해주지 않았다.
고원달은 양일과 양삼, 그리고 살아남은 제자 5명까지 총 8명으로 전투에 임해야 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그래도 일단 모용가가 전쟁에 나서준 이상 혼자 산에 오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모용세가의 공격은 새벽 동이 틀 무렵 은밀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구화산 산적들은 곳곳에 정찰병을 배치해놓고 있었다.
병력이 움직인지 30분도 안 되어서 산 전체에 신호 호각 소리가 5.1채널 서라운딩 스피커처럼 울려 퍼졌다.
기습의 효력은 무효화 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모용각은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구화산은 적의 세력권이니 기습이 성공한다면 좋겠지만, 실패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것은 작전 수립 단계에서부터 감안한 일이었다.
각각의 부대는 저마다 맡은 경로를 따라 산을 올랐다.
곳곳에서 산적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주로 화살로 공격을 했다.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먼 거리에서 집중적으로 쏜 후 쫓아가 보면 사라져버리는 식이었다. 모용가와 맞싸우면 피해가 적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피해는 의외로 큰 편이었다.
사람들이 다닐만한 길목에 화살이 집중적으로 쏟아진 것을 보면 미리 조준 연습을 하고 기다린 게 분명했다.
모용각은 각 부대의 보고를 들으며 점점 인상이 구겨졌다.
예상보다 진격속도는 느리고 사상자 수는 많았다.
“산적놈들 치고는 병법을 잘 아는군.”
“글쎄 그렇다니까요.”
고원달이 그거 보라는 투로 말했다.
모용각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원달을 노려봤다.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찔끔한 고원달이 말했다.
“우리 약선문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하고 군막 밖으로 나왔지만, 그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일단 모용세가 병력이 길을 다 닦아 놓으면 그 다음에 천천히 뛰어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새벽부터 올라가기 시작해서 정오 무렵이면 산채를 불태우고, 두령들의 목을 잘라 장대에 높이 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림도 없었다.
정오를 지나 오후가 되어도 진도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답답해진 모용각은 직접 나서서 상황을 파악했다.
문제는 기문진이었다.
산적들은 화살로 진격을 저지할 뿐만 아니라 산채 주변에 기문진법을 설치해서 통행로를 숨기고 있었다.
모용각 입장에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적은 단순무식한 산적 나부랭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선두에 서서 진법을 깨보려고 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리 해도 잘 되지 않았다.
결국 병력을 퇴각시킬 수밖에 없었다.
산적은 단 한 명도 잡지 못하고 제자들만 수십 명 죽고 다친 것은 인정하기 싫은 결과였다.
모용각은 고원달을 불렀다.
꼴보기 싫은 인간이지만 그래도 혹시나 기문진을 뚫을 방법을 아는지 물어봐야 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자신도 아버지 앞에 무능한 자식으로 찍힐 위험이 있었다.
고원달이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아마도 구궁팔괘진의 변형이 아닐까 합니다만….”
원칙적인 얘기만 할 뿐이었다.
“모용각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고원달은 기수 쪽으로 시선을 줬다.
혹시 아느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기수는 기문진법이라면 수학만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슬그머니 양삼, 탁지연 쪽을 봤다.
그녀는 뭔가 아는 눈치였다.
하지만 약선문을 위해서 길을 열어줄 이유가 없어서 그냥 모르는 척 했다.
모용각과 고원달이 번갈아 한숨만 내쉬자 기수가 말했다.
“길안내 해줄 사람을 데려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누가 길 안내를 해줄 수 있단 말인가?”
“저들 무리의 두령 중 한 명을 제가 잡았습니다만…”
“아! 맞다.”
모용각은 기뻐서 벌떡 일어섰다.
“가서 그를 데리고 오시오. 내가 부하 4명을 딸려 보내줄 테니.”
기수는 고원달을 봤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해서 기수는 화화낭군 호송 임무를 맡고 구화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장원에 도착하여 모용가 제자들이 화화낭군을 묶는 동안 기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시 숙소에 들렀는데 시녀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당신이 약선문 고공자의 보표인가요?”
“맞는데.”
“아가씨께서 찾으세요.”
“아가씨?”
“예. 지금 당장 급히 좀 오시래요.”
기수는 씩 웃었다.
‘아 놔…. 이건 또 뭐야. 함 하자는 건가?’
그는 기쁜 마음으로 시녀를 따라갔다.
가는 내내 기분이 들떴다.
안 그래도 약에 취한 그녀의 뜨거움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맨정신으로 하면 아무래도 그때만큼은 아니겠지만, 뭐 그래도 나름대로의 맛은 있을 거라고 기대가 되었다.
별채에 도착해 보니 고원경이 차를 따라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곧 산으로 올라가 봐야 한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없군요.”
그녀는 시녀들을 모두 물러가게 했다.
단 둘만 남게 되자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고원경은 그의 기대와 달리 옷을 벗지 않았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주세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그때 그대가 운공으로 해독시켜주려 했던 것까지는 기억해요. 그런데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아! 그때의 일이요….”
기수는 비로소 그녀가 함 하자고 부른 게 아님을 알았다.
생각해 보니 그녀의 해독제 역할을 할 때는 자기 본래 얼굴을 사용했으니까 고원경이 기억하는 섹스파트너는 지금의 자기가 아닌 것이다.
기수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때 저는 아가씨의 운기조식에만 신경 쓰느라 누가 접근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웬 괴한이 다가와서 수혈을 짚었는데, 나중에 깨어나 보니 공자님 옆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네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 아뇨…..”
고원경은 살짝 볼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그녀 입장에선 얘기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 괴한이란 자의 얼굴은 보셨나요?”
“전혀요.”
“그렇군요. 바쁘실 텐데 이만 가보세요. 차는 드시고요.”
“알겠습니다.”
기수는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이게 무슨 차지?’
향기가 좀 특이했다.
잔을 입술에 댄 기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혹시….?’
기수는 마시는 척만 하면서 슬그머니 염정구심술로 고원경의 속마음을 읽어 보았다.
‘그래. 어서 마셔라. 너만 없어지면 그날의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내 비밀은 영원히 지켜지게 되는 거야.’
기수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 씨발년이 지금 날 독살하려는 거잖아?’
어이가 없어서 찻잔을 던져 그녀의 마빡을 박살내주고 싶었다.
그러나 기수는 꾹 참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날 하룻밤의 인연을 생각해서 봐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어쩐지 급하게 부른다 했더니 이럴 작정이었군.’
기수가 차를 마시지 않자 고원경이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왜 마시지 않죠? 그건 몹시 귀한 건데…”
“그럼 네가 마셔볼래?”
“예? 그 무슨…..”
“사람을 독살하려면 향을 좀 더 잘 감췄어야지.”
고원경은 깜짝 놀랐다.
“예? 독살이라니요!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수는 잔을 들고 일어서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니라면 한 번 마셔보던가.”
“악! 가까이 오지 마! 넌 우리 집안에 고용된 무사잖아.”
“흥! 네 오빠의 보표일 뿐, 너와는 상관없어.”
위기감을 느낀 고원경은 급히 의자 옆에 늘어진 줄을 당겼다.
그러자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시녀들이 들어왔다.
“부르셨어요? 아씨.”
“손님 가신다. 배웅해드려라.”
기민한 대응이었다.
기수는 피식 웃으며 고원경에게 말했다.
“너. 인생 그렇게 살지 마. 남의 목숨을 가볍게 알면 너도 똑같이 당하는 법이야.”
고원경은 겁먹은 표정으로 대꾸도 제대로 못했다.
시녀들이 와주었지만 기수가 마음만 먹으면 상황이 얼마든지 험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기수는 잔을 탁자 위에 놓고 순순히 물러나왔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집안은 망해버리는 게 맞다. 누가 독종 아니랄까봐 생각하는 것도 표독하고, 쓰는 수법도 독살이라니…’
탁지연을 도와야 할 이유가 하나 추가되었다.
인간성에 문제가 있는 건 문주와 아들들뿐만이 아니었다.
하긴, 한 집안 사람인데 딸만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었다.
정나미가 똑 떨어지는 가문이었다.
화화낭군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간 기수는 그를 모용각에게 인계했다.
모용각은 화화낭군에게 제안했다.
“산채까지 가는 길을 알려주면 너를 살려주겠다.”
화화낭군은 군막 안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입을 굳게 다문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모용각이 다그쳤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죽고 싶은 거냐?”
화화낭군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죽을 것 아니겠소?”
“아니다. 길을 알려주면 살려주겠다. 내 이름을 걸고.”
화화낭군은 턱으로 고원달을 가리켰다.
“모용가에서 놔준다 해도 약선문에서 붙잡아 죽이면 그만 아닙니까?”
모용각이 고원달을 쳐다봤다.
고원달은 자기도 약속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산채 가는 길을 가르쳐주어서 대청단과 예물들을 모두 되찾게 된다면 나도 우리가 문과 내 이름의 명예를 걸고 너를 살려주겠다.”
화화낭군은 냉소를 지었다.
“흥! 난 길을 가르쳐줄 수는 있지만, 물건 찾는다는 보장은 해줄 수 없소.”
그러자 고원달이 발을 구르며 으름장을 놓았다.
“네놈의 손가락을 한 마디씩 잘라도 견딜 수 있겠느냐?”
“손가락을 자르건 발가락을 자르건 마음대로 하시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아니겠소? 너무 오래 끌지만 말아주시오. 하하하!”
“이놈이!”
고원달이 주먹을 치켜들며 달려들자 모용각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지금 화화낭군은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이었다.
함부로 죽이거나 상처를 입혀선 안 되는 것이다.
고원달은 자기 마음대로 못 하는 게 못마땅했지만 어쨌거나 화화낭군이 길을 열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수단이라는 데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다. 길을 열어주면 물건을 찾는 것과 상관없이 너를 살려주겠다.”
“당신들 문파와 개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소?”
“그렇다.”
“증인들 앞에서 다시 한 번 맹세해주시오.”
모용각과 고원달은 각각 맹세를 했다.
화화낭군은 그것으로 부족한지 기수에게도 따로 요구했다.
“당신도 맹세해주시오.”
그에게 있어 가장 위협적인 상대는 기수였던 것이다.
기수는 한 대 쥐어박을까 생각했지만 고원달의 지시로 맹세를 했다.
“네가 길을 열어주면 그 대가로 목숨을 살려주겠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화화낭군은 다음날 진격의 선두에 나서서 길안내를 했다.
“저쪽 길로는 가면 안 됩니다. 함정이 있습니다.”
그가 가리킨 곳을 조사해 보니 정말 암기 발사 함정이 있었다.
함정뿐만 아니라 기문진도 간단히 뚫고 지나갈 수 있었다.
배신자 한 명이 산채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