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10
구화산 산적들은 끊임없이 화살을 쏘았다.
그리고 일부 지역에는 투석기의 돌이 날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배신자 화화낭군의 안내 덕에 모용세가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산 정상이 가까워지자 화화낭군은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제 여기까지 왔으니 더 이상 저의 안내는 필요 없습니다. 저를 놔주십시오.”
“무슨 소리! 산채의 담 앞까지는 가야한다. 그곳이 가장 위험한 곳일 테니까.”
모용각은 그를 쉽게 풀어주지 않았다.
마침내 기문진을 모두 지나 나무로 엮어 만든 산채의 목책 앞에 도착하자 화화낭군은 다시 한 번 더 부탁했다.
“이젠 저를 놓아주십시오.”
배신자의 말로가 어떻게 될지 잘 알기에 최대한 빨리 도망치려는 것이었다.
“좋다!”
모용각은 두 팔이 묶인 그를 자기 앞에 세우고 말했다.
“우리 모용세가는 무림맹의 일원이다. 너는 오래전부터 부녀자를 겁탈하고, 또 이번엔 우리 가문으로 오는 신부행렬을 습격했으니 그 죄가 결코 적지 않다.”
화화낭군은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말이 길어지는 게 왠지 좋은 결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하, 하지만 분명히 나를 살려주겠다고 맹세까지 하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살려줄 것이다. 단, 하나만 여기 놓고 가라.”
“무, 무엇을 말입니까?”
“네가 아녀자를 겁탈하는데 쓴 네 연장 말이다.”
“헉! 그, 그것은…..”
화화낭군은 기가 막혔다.
그걸 자르라는 얘기는 자결하라는 얘기보다 더 끔찍했다.
모용각은 부하에게 시켜서 단도 한 자루를 내놓았다.
“우리는 할 일이 많으니까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끝내라.”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걸 자르면 출혈로 죽고 말 겁니다.”
“엄살은…. 좋다. 그러면 그거 대신 팔이라도 하나 잘라놓고 가라.”
상대가 아무리 음적이라고 해도 남자에게 그걸 자르라는 건 좀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모용각이 한 걸음 물러섰다.
화화낭군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봤지만 그동안 살아오면서 저지른 죄가 있다 보니 오늘 이곳을 온전하게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조, 좋습니다.”
모용세가 사람들이 풀어주자 그는 혈도를 눌러 미리 지혈을 한 후 자기 팔을 스스로 잘랐다.
기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로 해내는 걸 보니 참 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됐지요?”
화화낭군은 고통을 참으며 물었다.
모용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약속이니 더 이상은 건드리지 않겠다. 썩 내 눈앞에서 꺼져라!”
화화낭군은 자기 잘린 팔을 힐끔 한 번 본 후 즉시 경공을 발휘하여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그러자 모용각이 고원달에게 다가와 말했다.
“우리 모용가와는 볼일이 끝났지만, 약선문은 아직 빚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고원달이 즉시 기수에게 말했다.
“따라가서 놈의 그걸 잘라 와!”
기수는 어이가 없었다.
‘무슨 명문 정파라는 새끼들이 이 따위냐?’
그러나 고원달은 진심이었다.
“어서 가라! 내 여동생의 마차를 습격했던 놈인데 그냥 보내줄 수는 없다.”
옆에서 모용각이 비열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자기는 약속을 지켜서 살려 보내줬고,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은 모용세가와는 관련 없다는 투였다.
고원달이 한 마디 덧붙였다.
“그걸 잘라 오되, 놈을 죽이지는 마라.”
그나마 자기도 약속은 지키겠다는 것이다.
기수는 짜증이 났다.
‘아! 씨발 그런 일을 왜 나한테 시키냐고.’
그러나 고원달의 보표이니 딱히 그 일을 할 사람이 자기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대충 대답을 하고 화화낭군을 따라 산을 내려가야 했다.
화화낭군을 따라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나름대로 풀스피드로 달아나는 중이었지만 기수의 선풍비를 따돌릴 수는 없었다.
“헉! 무, 무슨 일로…..”
기수가 길을 가로막고 기다리자 화화낭군은 기겁을 했다.
“우리 공자가 네 그걸 잘라오란다.”
“예? 마, 말도 안 됩니다. 이미 제 팔을 잘랐는데요.”
“그건 모용가에서 자른 것이고, 약선문에선 따로 받아야 한다는 거지.”
“아이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발 살려주십시오.”
화화낭군은 팔 하나가 막 없어져서 균형 잡기도 힘든 몸으로 바닥에 꿇어 엎드려 머리를 쾅쾅 찧으며 빌었다.
기수와 싸워봤자 적수가 못 된다는 사실을 아는지라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기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화화낭군에게 말했다.
“난 네가 마음에 안 든다.”
“예?”
“넌 50살이나 처먹은 놈이 20대 얼굴로 살면서 나약한 아녀자들을 강제로 범하고 다니잖아. 그런 놈은 자르는 게 맞아.”
“아이고!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앞으로 절대 겁탈을 하지 않겠습니다.”
“정말로? 못 믿겠는데?”
“아닙니다. 제가 또 하겠다고 하면 해내는 놈입니다. 믿어주십시오. 고향으로 돌아가 얼굴을 본래로 되돌리고 참한 여자 하나 아내로 맞아 농사나 지으면서 살겠습니다.”
“결혼이라…. 금욕하겠다고는 안 하는구나.”
“그, 그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시잖습니까.”
기수는 피식 웃었다.
“좋다. 지금 한 말을 그대로 실천하겠다면 놔주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이야말로 진정 약속을 지키는 분이군요.”
“그 낯짝으로 다시 강호에 나오면 내 손에 죽는 거다.”
“걱정 마십시오. 안 그래도 다시 강호에 발을 디뎠다가는 녹림 72채가 절 가만 두지 않을 겁니다.”
“좋아. 가 봐.”
“감사합니다!”
화화낭군은 기수에게 다시 한 번 절을 하고 잽싸게 달아났다.
기수가 산 위로 올라가자 고원달이 다가와 물었다.
“잘라 왔느냐?”
기수는 속으로 그를 욕했다.
‘야! 설령 잘랐다고 해도, 그걸 내가 들고 와야 하겠냐?’
그러나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놈이 저항하기에 단칼에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죽였다고? 그럼 놈의 물건은?”
“시체에 달려 있을 겁니다.”
“왜 잘라서 가져오지 않았느냐?”
“더러워서요.”
기수가 계속 뻣뻣하게 대답하니까 고원달도 더 이상 추궁하지 못했다.
대신 기수의 속을 긁는 한 마디를 했다.
“결국 맹세한 세 사람 중에서 너만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겼구나.”
자기는 책임 없다는 투였다.
소위 명문가 공자라는 자의 마인드가 이 정도에 불과하니 참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기수는 이제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해버렸다.
모용각은 전열을 정비하고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산적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산채의 목책이 그저 단순하게 나무 몇 조각 이어서 묶은 수준이 아니었다.
아름드리 거목들을 촘촘이 엮고 안쪽에서 흙으로 보강해서 튼튼하기가 석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위에 올라서서 화살을 쏘고 돌을 던지니까 아무리 모용세가 무사들의 무공이 고강하다고 해도 쉽게 넘을 수가 없었다.
모용각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기문진만 통과하면 단숨에 승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아군만 사상자를 낼 뿐 적에겐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공격을 중단했다.
그리고 진영을 굳건히 세우고 세가에 사람을 보내 지원군을 요청했다.
고원달은 가슴이 답답해서 그를 찾아갔다.
“왜 공격을 그만두었습니까?”
“우리 쪽만 피해를 입기 때문입니다.”
“원래 높은 담을 넘으려면 그 정도 피해는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약선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모용세가가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고원달은 할 말이 없었다.
언제는 구화산 산적이 모용가의 명예를 훼손시킨다면서 앞장서더니 상황이 좀 불리하니까 곧바로 발을 빼는 것이 얄밉긴 했지만, 자기네 병력이니까 공격을 하건 말건 약선문에서 간여할 수는 없었다.
모용각은 방어에 만전을 기했다.
적의 코앞에 와 있기 때문에 야습이나 기습을 걱정한 것이다.
그러나 산적들은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길고 지루한 대치상태가 이어지자 고원달은 하루하루 애가 탔지만 기수와 탁지연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대청단의 기운을 녹여낼 수 있었다.
“형님. 이젠 완전히 진원지기에 흡수된 것 같아요.”
“실전을 통해서 써먹어야 진정한 너의 내공이 되는 거야.”
“실전 경험을 하게 해주세요.”
“좋아. 검 대신 손가락으로 하자.”
두 사람은 고원달이 없을 때마다 군막 안에서 연습을 했다.
내공이 받쳐주니까 탁지연의 월영검법도 예전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력해졌다.
기수는 물론이고 탁지연의 기쁨은 대단했다.
“이젠 원수를 갚을 수 있겠어요!”
“적의 수가 많으니까 신중해야 돼.”
“물론이죠. 걱정 마세요.”
엿새째 되는 날.
모용세가의 가주가 지휘하는 대규모 지원병력이 도착했다.
그리고 약선문 문주 일행도 그들과 함께 왔다.
결혼식 참석을 위해 왔다가 전쟁에 끼게 된 것이다.
고원달은 문주 앞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일어서거라.”
고원달은 아버지를 실망시켰다는 사실에 괴로웠다.
하지만 일단 사실이 밝혀지고 나니까 마음이 편해지는 면도 있었다.
그리고 꿋꿋이 버티는 구화산 산적이 고맙기도 했다.
이곳 토박이인 모용세가에서 500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도 어쩌지 못하는 정도니까 신부행렬이 털린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식으로 약간 합리화 되는 기분이었다.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기와 약석문 문주 고무학은 무림 명숙으로 이 전쟁이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일파의 수장인 자기들이 모두 산에 올라왔는데 체면이 있지, 고작 산적 패거리 하나 해치우는데 시간이 걸려선 안 되는 것이다.
거의 800을 헤아리는 모용세가 병력, 결혼식 참석을 위해 온 약선문의 200명, 합이 천에 가까운 병력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구화산 산채는 정말 단단했다.
단지 목책을 잘 만든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병력 운용이 잘 이루어졌다.
축구 경기에서 한 쪽의 전력이 강해도 상대가 박스 안에 10백을 서면 90분 내내 공격을 해도 골이 잘 안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구화산 산적들은 숫자에서 좀 밀리지만 조직력이 뛰어났고, 고지대에서 성벽을 의지해서 내려다보며 싸운다는 강점을 잘 살렸다.
싸우는 과정을 보면서 기수는 좀 답답했다.
이런 식의 장기 소모 공성전을 끝내려면 이쪽에서 고수 몇 명이 앞장서서 담을 넘으면 될 것이었다.
좀 위험할 수도 있고, 어쩌면 다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누군가 먼저 올라가서 진입로를 확보하면 거기서부터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가문의 고수들 중 누구도 메시 역할을 하려 하지 않았다.
체면 때문이었다.
산적 두령 정도가 나온다면 나서서 싸울 수 있지만 집단 전투에 섞여서 박박 기는 역할은 아무래도 때깔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사흘간 별 소득 없이 시간이 흐르자 모용기와 고무학은 전략적으로 다른 선택이 필요함을 느끼고 회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까지 굳게 지키기만 하던 산적들이 산채의 문을 연 것이다.
산적들이 쏟아져 나오자 모용세가와 약선문은 즉시 전투준비를 했다.
양측이 대치하고, 모용기가 나서서 말했다.
“지금이라도 산채를 불태우고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그러자 상대 진영에서 구화산 산채의 두령 맹우산이 나왔다.
“하하하! 가소롭구나. 우리가 그동안 너희들 노는 꼴을 봐준 게 힘이 없어서라고 생각하느냐? 너희들이야말로 목숨을 구하고 싶으면 지금 당장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그의 호통에 모용기와 고무학은 소리 내어 웃었다.
자라새끼처럼 숨어 버티던 놈들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게 너무 어이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수는 맹유산이 허풍을 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의 뒤로는 녹색 장포를 입은 자들이 거의 6, 70명 정도 모여 있었다.
그동안 계속 방어만 한 게 바로 저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린 게 분명했다.
기수는 그들의 진법에 갇혀보았기 때문에 녹의인들의 무공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산적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높은 목책의 이점을 포기하고 이렇게 밖으로 나온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얘기였다.
기수는 특히 녹색 장포들 사이에 서 있는 한 사람에 시선을 빼앗겼다.
나이는 40대 초반. 아주 큰 키에 비쩍 마른 체형으로, 머리카락이나 수염은 물론 눈썹까지 보이지 않았고 피부가 창백하다 못해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기괴한 외모만큼이나 풍기는 기도도 특이했다.
서늘하고 음산했는데, 그것 말고도 이상하게 기수의 마음속 깊은 곳을 자극해서 두근거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저건 누구지? 그리고 이 떨림은 뭐지?’
기수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