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16
장원으로 돌아온 기수는 탁지연에게 지도를 보여주었다.
“어때?”
“이거 정말 낙양까지 가서 가져오신 거예요?”
“후후… 못 믿겠으면 말고. 지도나 살펴봐.”
탁지연은 한참 들여다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가문이 가지고 있던 지도와 연결되네요. 이거라면 확실히 도움이 되겠어요.”
“좋아. 잘 보관해.”
“제가요?”
“응. 당연히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지.”
“하지만 이렇게 귀한 장보도를, 저를 어떻게 믿고….”
“후후후…. 그깟 보물이 뭐라고? 내겐 사람에 대한 믿음이 더 중요해.”
“아!…..”
탁지연은 기수를 다시 봤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남자는 만난 적이 없었다.
단지 무공만 고강한 게 아니라, 생각하는 게 뭔가 달랐다.
두 사람은 원정 준비에 집중했다.
그와 탁지연이 할 준비란 따로 없었다.
갈아입을 옷을 봇짐에 싸는 걸로 끝이었고, 나머지는 운기조식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탁지연은 복수의 시점이 다가왔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열심이었다.
기수도 그녀의 월영검법 완성을 위해 많은 신경을 써주었다.
그런데 귀찮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고원지였다. 그녀는 금련을 보내서 계속 기수를 불렀다.
그러나 기수는 거절했다.
고원달이 출정준비에 바빠 낮시간 놀이를 중단했기 때문에 자신의 자유시간도 사라져버렸다는 게 그 이유였다.
물론 실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기수 역시 고원지의 고운 속살을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약선문은 이제 곧 멸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최후의 순간에 탁지연이 고원지를 죽이려고 할 때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해보니까, 그녀와 정이 더 들면 안 되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금욕 전용 운기조식까지 하면서 참았다.
출정일이 다가오자 고원지는 더 집착했다.
금련이 기수에게 말했다.
“주인님. 오늘 만나주면 입으로 받아주겠대요.”
“잉? 뭘?”
“호호호…. 뭐긴 뭐겠어요?”
“하핫! 그, 그거?”
“우리 새침한 아가씨를 언제 그렇게 길들이셨나 몰라.”
“뭐, 어쨌거나 안 된다고 전해줘.”
마음 같아서는 딱 한 번만 더 만나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러자 금련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가씨는 그렇다 치고, 제가 지금 한 번 해드릴까요?”
그러면서 손을 뻗어 존슨을 잡으려고 했다.
“어허! 왜 이래?”
“이제 가면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잖아요. 지금 잠깐만 시간 좀 내주세요. 네?”
기수는 금련의 유혹도 거절했다.
지금은 1분 1초라도 아껴서 탁지연의 무공을 증진시켜주는 게 중요했다.
‘미안하지만…. 너하고 할 시간 있으면 고원지를 만나겠다.’
그 말은 속으로만 생각하고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약선문 일행은 60명 규모로 꾸려졌다.
지난번처럼 고원의가 남아서 장원을 지키기로 하고 문주 고무학과 아들 고원정, 고원달, 고원회가 모두 참여했다.
그리고 정식제자가 아닌 고용 무사들은 한 명도 넣지 않았다.
지난번 구화산에서처럼 형세가 불리하면 언제든 배신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약속장소를 따로 정한 후 네 무리로 나누어서 각기 다른 시각, 다른 방향으로 출발했다.
마교가 숨어서 지켜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고무학이 적을 혼란시키기 위해 그렇게 정한 것이었다.
기수와 탁지연은 고원달이 이끄는 15명 팀에 소속되었다.
고원달은 약속장소가 어디인지 기수에게도 얘기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기수는 아쉬울 게 없었다.
이끄는 대로 따라만 가면 결국 목적지까지 안내할 것이고, 현장에 도착한 이후엔 마지막 한 조각의 지도를 가진 자신이 절대적으로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허름한 상단 복장으로 하루 종일 걷고, 객잔에서 자고, 또 걷고 하는 일정이 계속 반복되자 탁지연은 조바심을 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걸까요?”
기수가 그녀에게 말했다.
“아주 멀 수도 있으니까 마음 느긋하게 먹어. 하루가 늦어질수록 내공을 더 키울 기회로 생각하라고.”
“예. 형님 말씀대로 할게요.”
탁지연은 기수를 깊이 신뢰했다.
매일 낯선 객잔에서 자게 되었지만, 내공을 키울 유일한 기회라 생각하고 굳은 마음으로 운기조식을 하니까 못할 것도 없었다.
환경이 아니라 집중력의 문제였다.
그렇게 무려 20일이라는 기나긴 일정 끝에 일행은 호북성의 홍안산(紅安山)이라는 험산 앞에 다다르게 되었다.
고원달은 산 아래 객잔에 머물면서 건량을 잔뜩 사서 사람들마다 한 짐씩 배정했다.
그리고 세인의 시선을 피해 밤에 산을 올랐다.
홍안산은 보기보다 더 험준했다.
흙이 아닌 암석이 대부분인데, 풍화작용으로 가늘어진 자갈을 밟으면 미끄러져서 몹시 위험했다. 그런 길을 밤중에 오르니 실족 가능성이 더 컸다.
거기다가 고원달은 등불도 못 켜게 했다.
기수는 내공이 깊어 큰 문제가 없었지만 혹시라도 탁지연이 미끄러질까봐 밧줄로 그녀와 자신의 허리를 묶기로 했다.
기수의 손이 허리로 가자 탁지연은 놀라서 몸을 뒤로 뺐다.
“아! 맞다.”
남장을 해서 가끔 잊지만 그녀는 과년한 처녀였다.
“네가 묶어.”
“예. 형님.”
약간은 어색한, 그리고 볼도 붉어지는 상황이었지만, 어쨌거나 5미터 정도의 밧줄로 서로를 연결하니까 안심이 되었다.
밤새 산을 올라가 고원에 도착한 것은 새벽.
그제야 고원달은 일행을 휴식하게 했다.
그로부터 다시 낮엔 숲속에 숨어 휴식을 취하고 밤에만 더듬어서 주변을 탐색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기수는 그런 약선문을 속으로 비웃었다.
‘너희들만 차지하고 싶은 욕심은 이해해. 그래서 이렇게까지 조심하는 거겠지. 하지만 말야. 내가 이미 너희들 속에 섞여 있거든? 열심히 찾아 봐. 고맙게 받을게.’
며칠 뒤엔 문주 고무학이 이끄는 무리와 합류하게 되었고, 사나흘 사이에 나머지 일행들과도 합류하여 마침내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고무학은 각각의 일행들이 지나온 경로를 커다란 지도 위에 표시하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찾았다.
탁지연이 멀찌감치에서 그걸 보고 씩 웃었다.
기수가 그녀에게 물었다.
“뭔가 짚이는 게 있어?”
“문주는 계산 방법이 서투네요.”
“여기서 보고도 그걸 알 수 있어?”
“점찍는 순서를 보니까 아직 나만큼 익숙하지 못하네요. 뭐. 그래도 결국 찾아내긴 하겠지만 시간이 많이 걸릴 거예요.”
그녀의 예상대로 숲속에서 밤이슬 맞아가며 5일이나 더 헤맨 뒤에야 고무학은 숨겨진 동굴 입구를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너희들은 망을 보고 있어라!”
고무학은 제자들마저 믿지 못하고 세 아들과 자신만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기수와 탁지연도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기수가 탁지연에게 물었다.
“지금 따라 들어가서 끝장낼까?”
“아뇨. 서두르실 필요 없어요. 저들은 곧 나와서 도움을 청할 거니까요.”
“무슨 도움?”
“동굴을 찾았다고 좋아서 들어갔지만, 내 계산이 맞는다면 저 동굴은 목적지가 아니라 단지 목적지로 가는 입구에 불과할 거예요. 문주가 지도 전체의 규모를 과소평가한 거죠.”
그녀의 말이 옳았다.
서너 시간 정도가 지난 후 고무학과 세 아들은 당혹감 가득한 표정으로 나와서 제자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은 좁은 바위틈이 이어져서 어떤 곳은 기어서 통과해야 했고, 어떤 곳은 뚱뚱한 사람은 지나가지 못할 것 같은 경로도 있었다.
그렇게 500미터쯤 지나자 통로가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관솔불을 밝히자 동굴의 규모가 드러났다.
천장에 종유석이 잔뜩 매달리고, 바닥엔 바위와 석순, 지하수 연못이 뒤섞여 있었는데, 높이와 폭이 광대한 것은 물론,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고무학 부자가 기대감 잔뜩 안고 들어왔다가 실망할 만 했다.
탁지연의 예측대로 보물찾기는 이제야 시작인 것이었다.
고무학이 중얼거렸다.
“동굴이 얼마나 깊은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군.”
기수는 아! 하고 소리를 질러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를 만들며 점점 작아졌는데, 소리가 작아지기는 해도 없어지지는 않고 계속해서 멀리 이어졌다.
일행 모두 표정이 변했다.
관솔 불빛이 비치는 곳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넓은데 귀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지금 서있는 곳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고원달이 투덜거렸다.
“이건 뭐야? 산 전체가 속이 텅 빈 건가?”
사람들은 저마다 휴식시간에 보았던 홍안산의 거대하고 광활한 능선을 떠올렸다.
정말 고원달의 말처럼 바위산 내부에 공간이 생긴 거라면 산동에서 여기까지 온 여정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무학은 한 쪽 구석으로 가서 지도를 펼쳐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하루 온종일이 걸려서 지도 세 장을 새로 그려서 3명의 아들에게 나눠주었다.
“너희들은 각자 이 경로를 따라서 동굴을 수색해라. 뭔가 발견하게 되면 그 자리를 보전하고 큰소리로 불러라. 알았지?”
“예. 아버님.”
일단 네 갈래로 나누어 각각 수색할 구역을 구분해준 것이다.
자기들 일행에게 돌아온 고원달은 지도를 보며 머리를 쥐어짰다.
“아! 복잡해.”
기수가 힐끔 보니까 선과 숫자들이 빽빽히 적혀 있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암호지도에 근거해서 찾아가려니까 자연히 나눠 그린 지도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원달은 기수에게 안 보여주려고 지도를 슬쩍 숨겼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뭐 좀 알겠어? 이게 우리가 수색해야 할 구간이야.”
기수는 그가 내민 지도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지도 맞습니까?”
“아버지가 대충 설명은 해주셨는데 지금도 잘 이해가 안 돼.”
기수는 탁지연을 손짓으로 불렀다.
“와서 이거 좀 봐.”
탁지연은 한눈에 지도의 내용을 파악했다.
고무학이 암호는 숨기면서 결국 암호 지도의 내용을 옮길 수밖에 없는, 그래서 고민한 흔적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대략 저쪽 길 같아 보이긴 합니다.”
고원달은 그녀가 가리킨 쪽을 지도와 번갈아 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음. 맞아. 나도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자! 나를 따르라!”
고원달은 기세 좋게 앞장서서 나갔다.
동굴은 수십 갈래로 나뉘고 어떤 곳은 좁고, 어떤 곳은 물이 고이는 등 전진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이제까지 밖에서 한밤중에 헤매던 것과 달리 불을 밝힐 수 있어서 진행속도는 빠른 편이었다.
두세 시간 이동하다가 쉬면서 보니까 이미 다른 팀들과는 완전히 멀어져서 그들의 불빛도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수는 생각했다.
‘와! 이 동굴 진짜 넓다. 나중에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나올 것 같아.’
그러자 장난기가 발동해서 내공을 끌어올려 잔백지로 바위에 글을 새겼다.
[양기수 왔다 간다. ㅋㅋㅋ]
오랜만에 한글을 쓰니 기분이 새로웠다.
그리고 고향 생각도 났다.
‘언제 나머지 11명을 다 이긴담.’
물론 천외존자의 무공을 고려하면 자기가 질 수도 있으니까 당장 만나지 않는 게 다행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쉬는 동안 고원달이 탁지연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봐. 양삼. 다음은 어느 쪽으로 가야 할 것 같아?”
“글쎄요…. 선이 그어진 각도와 적힌 숫자를 보면… 저쪽 지하수 연못에서 꺾어야 하지 않을까요?”
“흐음… 내 생각과 같군.”
고원달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양일과 달리 구화산에서 산적들과 싸울 때 별다른 활약을 못해서 실망했는데, 다른 쪽에 재능이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고원달의 등을 바라보는 탁지연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원수의 자식.
네 갈래로 나뉘어서 따로 있으니까 고원달은 그녀의 첫 번째 목표였다.
비명에 돌아가신 부모님과 오빠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찔러 죽이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보다 완벽한 기회, 효과적인 상황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고원달은 자기 보표가 자기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까마득하게 모른 채 오로지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보물을 찾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자! 그만 쉬고 일어나. 출발한다!”
기수는 고원달의 옆으로 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뭔가 이상한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고원달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양일.”
“뭔가 냄새 안 납니까?”
“냄새?”
고원달을 비롯한 약선문 제자들이 코를 킁킁거리며 좌우를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