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21
기수와 탁지연은 약선문 일행과 어울려 휴식을 가졌다.
약선문의 분위기는 초상집 그 자체였다.
막내 고원회가 늘 말썽만 부리고 가문을 위해 뭐 하나 보탬 되는 일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고무학은 한참 동안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기수는 살짝,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어찌되었건 간에 고용주 집안 아닌가.
그러나 철산문의 멸문 과정을 돌이켜보면 동정심이 싹 사라졌다.
‘너희들이 한 만큼 돌려받는 거야. 기브 앤 테이크라고.’
성경에조차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적혀 있지 않은가.
힘 센 사람이 약자를 죽이는 게 당연한 이곳 무림. 남의 눈에서 피눈물 흘리게 했으면 자기 자식 잃는 고통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복수는 완성되어야 제 맛이지.’
기수는 끝까지 탁지연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한쪽 구석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냉동실 얼음판처럼 구획이 나뉜 지금.
밀폐된 공간 안에 30명 정도의 약선문 사람들과 20명 정도의 정체불명 사람들이 함꼐 있었다.
약선문 제자들이 30명 뿐인 것은 나머지가 다 죽어서라기보다는 석벽이 움직일 때 한 곳에 모여 있지 못해서라고 봐야했다.
지금 눈치 보고 있는 20여명도 저마다 자기 소속에서 이탈된 것으로 보였다.
한곳으로 뭉치자는 고무학의 전략은 확실히 의미가 있었다.
동굴 전체로 보자면 마교 쪽 사람이 많다고 해도 지금 이곳만큼은 확실히 약선문이 최강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들 잃은 슬픔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서 정신을 차린 고무학은 갑자기 살기등등한 눈으로 20여명의 각기 흩어져 있는 무림인들을 살펴봤다.
그리고 일어나서 그들 앞에 나가 말했다.
“이제부터 한 명씩 앞으로 나와서 자기 사문이 어디인지 밝혀라.”
그러자 검정색 승복 차림의 건장한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흥! 자기가 뭐라고 감히 명령을 하는 거야.”
순간, 고무학의 신형이 번개처럼 날아가 그 사내를 단숨에 점혈한 후 뒷덜미를 잡아와서 바닥에 팽개쳤다.
“와우!”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토했다.
고무학의 무공은 처음으로 보는 건데, 장난이 아니었다.
환우구종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독이나 좀 다룰 줄 안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20여명의 무림인들은 잔뜩 겁을 먹고 움츠렸다.
고무학이 검은 승복 사내에게 말했다.
“너. 방금 뭐라고 했지? 다시 한 번 지껄여봐라.”
“죄,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알긴 아는구나.”
고무학은 발을 들어 그의 머리를 콱! 짓밟았다.
기수는 끔찍한 광경에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수박을 땅에 떨어트린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누가 봐도 고무학이 아들 잃은 분풀이를 애먼 사람들한테 하는 상황.
그러나 힘이 최곤데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자. 한 명씩 나와라!”
그러자 구석에 숨어 있던 무림인들이 쭈뼛쭈뼛 일어났다.
그들은 한 덩어리인 약선문에 비해 숫자에서 완전히 밀렸고, 또 방금 보여준 고무학의 무공에 대적할 능력도 없었다.
그들이 차례로 나와 자기 사문을 얘기할 때마다 고무학은 몇 가지 질문을 던져서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지 알아내려 했다. 그렇게 해서 뭔가 대답이 미진하거나 의심스러우면 그 즉시 점혈을 해서 쓰러트려버렸다.
취조 당하는 입장에선 정말 끔찍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석벽이 어서 움직여 열린 공간으로 빠져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기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추 역할을 하는 물통이 꽉 차려면 2시간 정도,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취조를 모두 마친 결과 무림맹 소속, 아니면 정파 사람이라고 확실히 판명된 사람이 모두 6명. 나머지는 마교 쪽 혹은 언행이 의심스러운 자들이었다.
고무학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 중에 내 아들 해친 범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쓰러진 사람들은 아혈이 막혀 말을 할 수 없지만 눈빛으로 자기는 절대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고무학은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했다.
“너희들이 설령 직접 내 아들을 검으로 찌르지 않았다고 해도, 이곳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어지러운 상황을 만들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아들 죽음에 책임이 있다.”
그것은 좀 억지였다. 그러나 고무학에게는 힘이 있었다.
“너희들을 모두 죽여 무림에 해악을 없애고 내 아들의 복수도 하겠다!”
그러더니 그는 발을 번쩍 들어 수박을 하나씩 깨기 시작했다.
“으으….”
기수는 고무학의 악귀 같은 얼굴을 보며 치를 떨었다.
‘저런 끔찍한 인물에게 잠시라도 동정심을 품었다니….’
완전히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 가서 화풀이하는 모습이었다.
마지막 수박까지 으스러뜨린 고무학은 그제서야 조금 기분이 풀린 듯 했다.
“곧 석벽이 올라갈 테니 다들 준비해라! 우리 제자들을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으는 게 중요하다. 다들 알겠지?”
“예!”
제자들은 힘차게 대답했다.
현재 이곳의 상황을 볼 때, 무림맹도 믿을 수 없었다.
같은 약선문끼리 똘똘 뭉쳐야 살아남을 가능성을 그나마 높일 수 있었다.
잠시 후. 어디선가 쇠사슬 철컹거리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석벽이 진동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방에서 함성이 울려 퍼졌다.
갇혀 있던 2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도 이곳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다들 머리를 짜냈고, 같은 편끼리 뭉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공간이 열리자마자 자기네 편을 불렀는데, 동굴 안이다 보니 그 소리들이 전부 뒤섞이고 메아리가 쳐서 거대한 함성으로 들린 것이다.
기수는 탁지연에게 말했다.
“지금 석벽의 조합. 기억할 수 있겠어?”
기수는 던전에 들어갔을 때 별다른 보조 자료가 없다면 지도부터 그려야 한다는 사실을 고전 RPG 게임 경험자로서 알고 있었다.
탁지연이 바쁘게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아까와 비교하는 중인데, 이상해요.”
“뭐가?”
“처음과도, 요전번과도 달라요. 아무래도 매번 조합이 바뀌는 것 같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자세한 메카니즘은 알 수 없지만 제갈세가 놈들이 머리를 많이 썼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 것 같았다.
기수는 출구 쪽을 살펴보았다.
형태가 바뀌긴 했지만 돌무더기 쌓인 곳이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싹 바뀌어 있었다.
승복이나 도복 입은 무림맹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젠장! 저 자리는 마교에게 빼앗겼군.”
옆에서 탁지연이 말했다.
“저곳이 좋다고만도 할 수 없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 정도 기관을 설치한 사람들이 출구 쪽으로 빠져나갈 수 있게 길을 내줄까요?”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무너진 출구를 차지한다고 해도 심리적 위안 말고는 별로 얻을 게 없을 것 같았다.
“좋아! 나가는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 우리는 일에 집중하자.”
“그래요.”
두 사람의 일이라는 건 복수였다. 그러나 막내가 당한 이후로 삼부자는 늘 사방을 주시했고, 고원정과 고원달은 아버지 곁에 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동안 엄청나게 열심히 수련한 덕분에 탁지연의 검술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향상된 것은 분명하지만 고무학을 상대하기는 아직 역부족.
그를 상대하려면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기에 인상이 펴지지 않았다.
새로 정해진 구획 안에는 오로지 약선문 제자들만 모였다.
석벽이 오르내리는 짧은 기간 동안 사람들은 저마다 살 공간을 찾아서 뛰었는데, 바닥에 수박 10여개가 깨져 있는 쪽으로는 아무도 오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은 텅 비고, 흩어졌던 약선문 제자들만 모인 것이다.
총 인원은 41명. 예상보다는 많은 수가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었다.
제자들은 2시간 동안 휴식을 취하고 상처를 치료하면서 구획 안에 있는 시체를 뒤졌다. 돈은 필요 없고, 먹을 것은 빠짐없이 다 꺼냈다.
그리고 다시 석벽이 움직였다.
사람들 모두 이전보다는 안정된 모습으로 서로 눈치를 봤다.
그러나 무림인들이다 보니 어디에선가는 기합과 비명,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기수는 2시간마다 한 번씩 벌어지는 국지전들이 결국에 가서는 이 동굴에 갇힌 모두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
마교와 무림맹이 이곳을 빠져나갈 때까지만이라도 임시 휴전을 하고 출구를 뚫는다면 워낙 인원이 많으니까 얼마든지 살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전무해 보였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을 보면 그렇게 열심히 싸우다가고 세비인상 같은 거 할 때면 쿵짝이 잘 맞곤 하는데, 무림맹과 마교는 완전히 물과 기름이었다.
기수는 안력을 돋우어 기관 가동 상태를 최대한 많이 기억하려고 애썼다.
아무리 제갈세가에서 만들었다고 해도 기계는 고장날 수도 있고, 오작동을 할 수도 있는 거니까, 어쩌면 무너진 출구가 아닌 석벽 쪽에서 희망을 찾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던 기수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추었다.
그는 탁지연에게 말했다.
“나 잠깐 다녀올 테니까 혼자 있어.”
“예? 어디를요?”
“뭔가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혼자서 위험한 시도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알았지?”
“예. 알았어요.”
기수는 그녀가 약선문과 함께 있는 한은 안전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40여명이 모인 집단에 도전할 만한 세력은 흔치 않기 때문이었다.
기수는 고무학에게 가서 말했다.
“저쪽을 좀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무슨 일로?”
고무학은 깜짝 놀랐다. 약선문의 안전을 위해 기수 같은 고수는 꼭 필요한 재원이기 때문이었다.
“팽무진을 본 것 같습니다. 가서 확인해보고, 그가 맞다면 잡아오겠습니다.”
“아! 그렇다면 어서 가보게. 하지만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속히 돌아와야 하네.”
고무학도 팽무진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네. 그리 하겠습니다.”
기수는 곧바로 몸을 날려 구획을 벗어났다.
그가 발견한 사람은 사실 팽무진이 아니라 당운영이었다.
못 본 사이에 깜찍하기만 하던 외모에 성숙미가 더해져서 눈길을 끌던 그녀.
기수는 민첩하게 이동하여 기관 작동이 멈추기 전에 사천당가 사람들과 한 구역 안에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당가에서 온 사람은 고작 3명.
당운영과 2명의 중년남녀가 전부였는데, 두 사람은 부부로 보였다.
사람은 셋뿐이지만 그들 곁으로 접근하는 이는 없었다.
어두운 동굴 속, 밀폐된 공간에 암기와 독의 달인인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 할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다 보니 석벽으로 나뉜 넓은 구획 안에 양일로 역용한 기수와 당가의 세 사람만 달랑 갇히게 되었다.
세 사람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기수를 노려봤다.
기수는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그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후 말했다.
“저는 양오라고 합니다. 목숨을 살리려고 이리 저리 뛰다보니 여러 협객님들 계신 곳으로 오게 되었네요. 부디 불쌍히 여겨 내치지 말아주십시오.”
당운영 혼자만 있으면 본래 얼굴을 짠! 하고 보였겠지만 다른 두 사람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가명도 양일이란 이름이 유명해졌기 때문에 다른 걸 써야 했다.
기수가 굽실거리자 당가 사람들은 경계심을 풀었다.
까불어봤자 3:1로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 면도 있는 것 같았다.
기수는 일단 당운영 가까이는 왔는데 다음 진도를 뽑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당운영이 갑자기 빽!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예? 저. 저 말씀입니까?”
“여기 너 말고 누가 또 있어?”
“왜, 왜 그러십니까요?”
“너 아까부터 자꾸 내 몸 봤지?”
“예? 제가요? 그럴 리가요.”
보긴 봤지. 가슴이 그동안 얼마나 커졌는지.
그건 솔직히 남자라면 본능적인 것 아닌가? 여자들도 알면서 은근히 즐기는 걸로 아는데 당운영 요 깜찍한 계집은 그 까칠한 성격을 여전히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
“너 죽을래?”
그녀는 검을 뽑아들고 기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자 중년 남녀 중 여인이 그녀를 말렸다.
“영아. 무례한 행동을 해선 안 된다!”
“아녜요. 숙모님. 이 자식이 먼저 저를 음탕한 눈길로 봤어요. 두 눈을 다 확! 파내야 정신을 차릴 거예요.”
기수는 옛 추억에 잠겼다.
‘그래. 이 년은 원래 이런 년이었지. 못된 년….’
얼굴만 보고 깜찍한 소녀로 생각했다간 큰 착각이었다. 독침을 들이대며 죽고 죽이려 다투던 옛날 일들이 새록새록 생각났다.
숙모가 다시 말했다.
“영아. 그래선 못 쓴다.”
“알았어요. 그럼 몇 대 때려주기만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 두 눈의 살기로 보건데 피를 봐야 멈출 것 같았다.
기수는 일어서서 엉거주춤 방어 자세를 갖추었다.
“이보시오. 소저. 이, 이러지 마시오. 우리 대화로 풉시다.”
“흥! 일단 버릇없는 네 눈에 벌부터 주고.”
그러더니 기습적으로 검을 뻗어 눈을 찔러왔다.
숙모한테 한 대답은 역시 거짓말이었다.
기수는 민첩하게 피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가까워지자 그녀와의 옛 추억이 어린 단어를 입 밖으로 냈다.
“적당히 해라. 씨발년아.”
“헉! 어, 어떻게 그 말을…….”
당운영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굴만 보면 진짜 귀여우면서 동시에 요염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가정교육만 좀 잘 시켰으면…..
당운영은 기수 외에는 그 단어를 욕으로 쓰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혹시…. 씨발놈?”
“으….. 그런 건 좀 잊어라! 잊어.”
당운영은 놀라움과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기수를 훑어봤다. 분명 둘만 아는 단어를 쓰긴 하는데 얼굴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