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29
기수는 마교 쪽으로부터도, 무림맹 쪽으로부터도 공치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양쪽이 멍청하게 서로를 죽이지 않은 걸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숨어 지내는 동안 탁지연에게 키스 테크닉을 가르쳐 줄 수 있었다.
아주 보람찬 시간이었다.
탁지연은 머리가 좋아서인지 금방 배우고 응용까지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른 데 손대는 건 못 하게 했다.
“여기를 나가기 전엔 안 돼요. 그리고 나 아직도 아파요.”
“나도 거기까지는 갈 생각 없어. 그냥 단지, 입맞춤하는 동안 손이 놀고 있잖아. 그래선 안 되는 거거든. 가슴에 대고만 있을게. 응?”
탁지연의 가슴은 호운혜처럼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손바닥 안에 가득 차는 적절한 사이즈라 만지는 느낌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걸 못 하게 하는 것이다.
“가슴 만지면 내가 흥분한단 말예요. 그래서 안 돼요.”
“하! 고것 참….”
탁지연은 호운혜처럼 갖다 대기만 하면 뜨거워지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시동이 걸리면 오래 타오르는 타입이라 초기에 차단하는 것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 말라는 거부의 손길을 피해 가슴도 한 번, 엉덩이도 한 번 만지는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데 출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마침내 마지막 암벽을 완전히 제거하고 커다란 구멍을 완성한 것이다.
“우리도 가볼까?”
“좋아요.”
탁지연은 열린 상의를 잘 여미고 머리카락도 단정히 한 후 기수를 따라갔다.
무림맹 군웅들과 마교도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동굴을 빠져나갔다.
혹시라도 밖에 적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고수들이 먼저 나가서 주변을 경계했고, 이어서 부상자들이, 그리고 나머지가 밖으로 나갔다.
기수도 당운영의 존재를 살피며 무리에 합류했다.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심호흡을 하며 탄성을 토했다.
밝은 달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그 신선한 공기가 너무나 좋았던 것이다.
기수도 시원한 밤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셔 그동안 밀폐된 공간에서 답답하던 폐를 정화했다.
“아! 살 것 같다.”
뻥 뚫린 하늘과 달과, 별 모두 반가웠다.
무림맹과 마교 사람들 모두 웃는 얼굴로 담소를 나누는 것은 힘을 모아 난관을 극복했다는 동료의식 덕분이었다.
열흘이라는 넉넉한 유예기간도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해방감을 만끽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런, 이런….. 마교와 무림맹이 힘을 합치다니… 보고도 믿을 수 없군.”
어둠 속에서 창노한 음성이 들린다 싶더니 갑자기 주변 숲에서 일제히 횃불이 밝혀졌다. 그 수가 얼핏 봐도 700~800은 되는 것 같았다.
옥면공자가 그들을 향해 물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하하하!…. 너희들 모두를 지옥으로 인도할 저승사자다!”
항마대사가 노한 어조로 말했다.
“아미타불!…. 제갈시주. 그대가 어찌 이럴 수 있소? 새외 오랑캐의 앞잡이가 되다니!”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청과 그의 둘째아들 제갈빈이었다.
그리고 그들 좌우로 특이한 복장과 장신구를 한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신강, 청해, 서장의 고수들이었고 천축과 묘강의 전통 복장을 입은 자들도 눈에 띠었다. 횃불을 든 부하들도 제갈세가와 삼황맹이 섞인 모습이었다.
마교도와 무림맹 군웅들은 비록 함정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아직 안전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해야 좋을 상황이었다.
기수와 탁지연은 그들 사이에 섞여 있는 한 사람을 알아보았다.
바로 고원정의 보표였던 팽무진이었다.
기수는 그의 옆에 푸르르~ 선자도 함께 있는 것을 확인하고 탁지연에게 말했다.
“팽무진은 나를 속였어. 산을 내려가기 전에 내 손에 죽을 거야.”
탁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우리를 전혀 몰라볼 테니까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예요.”
기수는 제갈세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가주 제갈청과 둘째아들 제갈빈, 둘 다 잔머리 깨나 굴리게 생긴 인상이었다.
기수는 그들의 무공은 전혀 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만약 홍안산에 진법을 미리 쳐놓았다면 그건 좀 걱정되었다.
다행히 지금 그의 곁에는 탁지연이 있었다.
제갈청이 잘난 척 하는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서더니 말했다.
“무림맹이 우리 제갈가에 해준 게 뭐가 있소? 그에 반해 삼황맹은 우리에게 천하를 일통하고 영원토록 함께 통치할 것을 약속했소. 어차피 하늘 아래 인간은 다 똑같은 것인데 새외와 중원은 따져서 무엇하겠소? 하하하!…”
무림맹 군웅들은 그의 뻔뻔한 발언에 치를 떨었다.
제갈청이 옥면공자와 항마대사를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양측이 손을 잡은 것이오?”
동굴 안에 움직이는 석벽을 만든 것은 제갈세가의 솜씨 자랑을 하려는 의미에서였다.
단지 석벽이 상하로 이동할 뿐이지만 그 안에서 느끼는 공포와 단절감을 증폭해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담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데까지 신경을 쓴 작품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교와 무림맹이 힘을 합친 것이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여기서 서로 싸워 전멸하고 원한이 더욱 깊어졌어야 하는데 산을 뚫고 멀쩡히 나왔으니 입막음을 위해 전부를 다 죽여야 했다.
귀찮고 번거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옥면공자가 말했다.
“동굴 안에서 죽은 교도들이 적지 않다. 이제 삼황맹과 제갈세가에게 그 책임을 묻겠다. 너희들은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마교도들은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제갈청은 큰소리로 웃었다.
“크하하하…….!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모두 죽어줘야 할 것은 너희 쪽이다. 자! 좌우를 둘러봐라. 횃불 수만 세어도 너희들보다 2배는 많지 않느냐.”
“닥쳐라! 싸움의 결과는 숫자로만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에 더 고수가 많냐 하는 것이다.”
“후후후… 나도 바로 그 얘기를 하려고 했다. 우리는 숫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고수도 보유하고 있다. 한 번 시험해보고 싶다면 네가 앞으로 나서봐라.”
옥면공자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왔다.
무림맹 사람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제갈세가에 대한 반감은 마교 측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는 단번에 제갈청을 때려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제갈청은 잽싸게 몸을 날려 뒤로 피했고, 대신 넝마 같은 가죽옷을 걸친 괴인이 앞으로 나와 옥면공자를 맞았다.
그는 몹시 특이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인데 수염과 머리칼이 모두 듬성듬성 빠져 있었고, 무엇보다 키가 150정도 밖에 안 될 정도로 아주 작았다.
옥면공자는 제갈청을 검지로 가리켰다.
“잘도 떠들어대더니 왜 뒤로 도망쳐 숨느냐? 당장 이리 나와라!”
어린아이만한 체구의 왜소한 노인과 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제갈청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를 우습게 보지 마라. 그는 삼황맹 최고의 고수 티무르다. 너희들이 왜 여기서 전부 죽을 수밖에 없는지 극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최고의 고수라고?”
옥면공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티무르가 헤헤… 하며 웃었는데 이빨도 절반 이상이 빠져서 더 불쌍해 보였다.
그는 몹시 서툰 한어로 말했다.
“너희 여기서 죽는다. 나 티무르. 모두 죽인다.”
옥면공자는 코웃음을 쳤다.
“오냐! 원한다면 너부터 쓰러트려주마.”
저쪽에서 먼저 최고의 고수라고 했으니 작은 놈을 때려줘도 크게 흉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즉시 티무르를 향해 장을 뻗었다.
순간, 티무르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옥면공자는 깜짝 놀라 출수를 거둬들이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티무르는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옥면공자를 공격했다.
파파팟!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옥면공자는 몸 전체가 흔들리며 균형이 무너졌다.
“크윽…. 어, 어떻게 이런….”
덩치는 자기 절반도 안 되는데 엄청나게 강력한 힘이었다.
기수는 그들의 대결을 보면서 온몸이 경직되었다.
옆에서 탁지연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기소협.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저, 저 녀석… 11명 중 하나야!”
“그게 무슨 소리에요?”
탁지연에겐 뜬금없었지만 기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티무르가 내공을 운용하고 무공을 펼치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퍼져나갔고 심장 박동수는 빨라졌다. 일전에 천외존자에게서 느껴졌던 바로 그 반응이었다.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황운학의 실력으로는 이길 수 없어.’
겉보기엔 어른과 아이가 싸우는 것 같지만 고수의 눈으로 보면 스피드와 파워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죽기 전에 나서서 구해야 했다.
그런데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소림의 항마대사였다.
그는 기수보다 먼저 몸을 날려 선장으로 티무르를 공격했다.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의 방장이 한 사람의 적을 협공하는 게 과히 보기 좋은 모양은 아니었지만 항마대사는 체면보다 옥면공자를 구하려는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티무르의 무공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봤다.
현재 이쪽 진영 최고의 고수는 자신과 옥면공자.
그러니까 체면 생각하고 있다가는 두 사람이 따로따로 당할 게 분명했다. 유일한 희망이 2:1로 싸우는 것이라면 잠시라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소림방장과 옥면공자가 힘을 합치자 티무르의 일방적인 우세도 한풀 꺾였다.
“흐흐흐….! 너희 둘. 나 못 이긴다.”
그러나 티무르는 수세에 몰리지도 않았다.
두 사람의 공격, 특히 소림방장의 무시무시한 선장 공격에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항마대사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직접 싸워 보니 티무르의 강함을 더욱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선장이 한 번 걸리기만 하면 티무르의 작은 체구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신법이 너무 빨라서 마치 절굿공이로 파리를 맞추려고 애쓰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알고 보니 그것은 파리가 아니라 벌이었다.
날카로운 침이 순식간에 항마대사의 허벅지를 찔렀다.
“으윽…..!”
소매 안에 숨겨져 있던 검이 갑자기 쑥! 튀어나와 찌르자 항마대사로서도 제대로 반응할 시간이 없었다. 레일을 따라 튀어나오게 만든 검은 양손에 모두 달려 있었다.
옥면공자 역시 돌발적인 상황에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옆구리를 찔리고 말았다.
“크하하하하!.. 너희들. 나 못 이긴다!”
티무르는 광소를 터뜨리며 부상당한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림맹 군웅들과 마교도들 모두 그 모습에 놀라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들에게 항마대사와 옥면공자의 승리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티무르의 몸놀림을 통해 현재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다들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믿었던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패하고 말았으니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데 옥면공자의 목으로 찔러 들어가던 티무르의 검이 갑자기 뚝! 부러졌다.
기수가 온힘을 다해 지풍을 날린 것이다.
티무르가 놀란 표정으로 홱! 돌아봤다.
“네 상대는 나다!”
기수는 처음부터 내공을 80% 한계까지 바짝 끌어올렸다.
티무르의 움직임이 굉장히 빠르기 때문에 일단 거기에 한 번 말려 들어가면 항마대사처럼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기수의 잔백지와 분광권이 정신없이 급소로 파고들자 티무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어떻게든 몸을 피할 생각이었지만 기수가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옥면공자와 항마대사가 먼저 싸워준 덕분에 티무르의 장단점을 미리 확인할 수 있었던 기수는 그의 발을 묶는데 집중했다.
빠른 신법이 막히자 티무르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림맹과 마교 진영에 자기를 이 정도로 몰아붙이는 고수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그 당혹감은 더욱 컸다.
기수는 자신이 내공을 끌어올릴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만 했다.
티무르의 팔목 부착형 검에 찔릴 위험을 각오하고 선풍비로 돌진하면서 분광권을 최대한 펼쳐내어 적의 시선을 가리다가 번개처럼 티무르의 무릎으로 잔백지를 날렸다.
퓨욱!
창에 찔린 것 같은 상처를 입은 티무르는 비명을 질렀다.
“크아악…….!”
기수는 상대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자 단번에 몰아붙여 마침내 잔백지로 그의 목을 꿰뚫는데 성공했다.
무림맹 군웅들과 마교도들이 동시에 엄청난 함성을 질렀다.
반대로 제갈세가와 삼황맹 진영은 놀라고 당황해서 입만 쩍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기수가 나서서 옥면공자를 구하고 티무르를 죽이는데 까지 걸린 시간은 채 1분도 안 되었다. 실로 눈깜빡할 사이에 해치워버린 것이다.
기수 입장에선 나름대로 필요성이 있어서 서두른 것이지만, 제 3자 입장에선 티무르와의 무공 격차가 월등해서 그런 것처럼 보였다.
소림방장과 옥면공자의 협공을 받고도 오히려 둘을 물리친 티무르.
그런데 그런 그를 기수가 해치워버린 것이다.
당사자인 기수는 고개를 하늘로 쳐든 채 희열을 만끽하고 있었다.
“으아아아……….!”
이번에도 자기도 모르게 긴 장소성이 나와 홍안산을 쩌렁쩌렁 울렸다.
마음속 목소리가 말했다.
[훌륭하다! 이제 열 남았다.]
[잠깐! 이들은 누구지? 내가 왜 이들과 싸우고 나면 기분이 이렇게 들뜨는 거야? 그냥 가지 말고 얘기해 줘!]
[네가 여기에 온 목적이다. 하나 더 줄이면 조금 더 얘기해주마.]
[나머지는 어디를 가야 만날 수 있지?]
대답이 없었다. 기수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들을 다 죽이면 집으로 돌아가게 해줄 거냐?]
그러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기수는 욕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오냐. 하나 더 죽이고 나서 물어봐주마.’
과연 돌아갈 수 있는지, 그것부터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았다.
제갈청이 티무르의 시체와 기수를 번갈아 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너는 누구냐?”
“난 기수다!”
“뭐, 뭣이라고? 우리 륜아를 죽인 그 기수란 말이냐?”
기수는 씩 웃었다.
“당장 길을 열어라. 그러지 않으면 저승에 가서 아들을 만나게 해주마.”
제갈청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극도의 공포를 느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