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30
제갈청 입장에선 아들의 원수를 만났으니 당장 기수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기수는 방금 티무르를 쓰러트렸다. 그것도 압도적인 우위로…
제갈청이 애당초 삼황맹과 손을 잡기로 한 것은 희망을 봤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제갈세가가 충분한 계산 없이 비난이 집중될 새외 무림과의 연합을 택할 리가 없었다.
제갈세가가 본 희망이 바로 티무르였다.
체구는 작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무공!
그런 그가 버티고 있는 한 삼황맹은 얼마든지 중원을 정복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중원에 첫발을 디딘 지금 그 꿈이 한 사람, 그것도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에 의해 처참하게 박살나고 만 것이다.
제갈청의 처음 판단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티무르는 분명 엄청난 고수였고, 무림맹주인 항마대사를 어렵지 않게 꺾어 자신의 실력을 입증했다.
제갈청이 간과한 것은 기수의 존재였다.
무림맹주를 뛰어넘는 청년 고수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으으…. 네놈이….”
제갈청은 이를 갈았다. 그러면서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티무르 없는 삼황맹이 과연 무림정복에 성공하고 자기에게 만인지상의 자리를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제갈세가가 살아남을 것인가?
‘당장은 도망쳐야 한다!’
그게 그의 결론이었다. 이제 와서 무림맹 편에 되겠다고 해봤자 받아주지도 않을 거고, 그렇다고 마교 편이 될 수도 없었다.
지금 싸워봤자 상대편에 절대고수가 있는 이상 승리를 쟁취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피해를 줄이는 게 최선이었다.
“제갈세가는 전부 퇴각하여 4번 집결지로 모여라!”
그가 큰소리로 외치자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횃불의 절반 가까이가 갑자기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동방향은 산 아래쪽이었다.
그리고 제갈청 역시 곧바로 등을 돌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수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래도 바보는 아니구나.”
제갈세가가 돌발적인 행동을 하자 남은 삼황맹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안 그래도 티무르의 죽음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인데, 그동안 참모 역할을 하던 제갈세가가 한 마디 의논도 없이 급작스럽게 배신을 때렸으니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항마대사와 옥면공자는 상황을 적절히 파악했다.
기수의 무공에 놀란 건 나중 문제고, 일단은 기회가 왔을 때 포위한 적진을 돌파해야 했다. 괜히 시간을 줬다가는 자기네들끼리 정신을 차리고 전열을 정비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적이 혼란스러울 때 치는 건 병법의 기본이었다.
“공격하시오!”
“적은 사기가 꺾였다. 모두 죽여라!”
두 수장이 명령을 내리자 무림맹 군웅들과 마교도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공격을 시작했다.
오랜 시간 동굴에 갇혀 있다가 겨우 빠져나온 곳에 적이 진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운이 빠졌던 지금까지와 달리, 그들 모두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운차게 달려 나가고 있었다.
기수는 고개를 돌려 탁지연을 보았다.
탁지연은 자기 애인의 어마어마한 무공을 보고 두 눈이 전부 핑크빛 하트 모양으로 바뀌어 있었다. 적어도 기수에겐 그렇게 보였다.
기수는 그녀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난 쫓아야 할 놈이 하나 있거든.”
탁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그녀 역시 팽무진을 혼내줘야 한다는 데 동감하고 있었다.
기수는 어둠 속에서 안력을 돋우어 팽무진을 찾았다.
“거기 있었구나! 후후…”
팽무진과 맹심선자는 제갈청이 도망치자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도주를 시작했다. 티무르가 쓰러진 순간 삼황맹의 힘은 절반 이상이 꺾였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었다. 괜히 난파선에 남아 있어 봤자 도움 될 일이 없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홍안산 줄기를 따라 산을 절반쯤 내려갔다.
사방에 횃불이 우왕좌왕하고 비명과 함성이 들려왔지만 두 사람은 빠른 경공 덕분에 안전한 곳까지 피할 수 있었다.
“괜찮아?”
“응. 자기는 어때?”
“나도 괜찮아.”
“그건 너희들 생각이지.”
갑자기 머리 위에서 기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팽무진은 고개를 들기도 전에 암기부터 위로 던졌다. 그러나 기수는 간단히 그것들을 피하고 나무에서 뛰어내려 두 사람을 향해 잔백지를 날렸다.
파파파팟!
팽무진과 냉심선자는 십여 초식까지 버텨봤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결국 두 사람 모두 혈을 찔려 뻣뻣하게 몸이 굳고 말았다.
팽무진이 기수에게 말했다.
“기소협. 우리는 당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보내주십시오.”
냉심선자도 애원했다.
“왜 저희들을 쫓아오셨는지 모르겠군요. 삼황맹의 수뇌부는 따로 있습니다.”
기수는 팽무진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너는 나를 속였어. 그리고 내 은퇴계획을 비웃으면서 망쳐버렸지.”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난 절대로 기소협을 속인 적이 없습니다.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속이겠습니까?”
“그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순간 기수의 얼굴과 목소리가 함께 바뀌었다. 바로 양일이었다.
“헉! 너, 너는….. 네가 기소협이었다니…. 이, 이럴 수가….”
냉심선자는 궁금했지만 뒤쪽에 있어서 기수의 바뀐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기수는 팽무진의 사혈에 손가락을 얹고 말했다.
“나를 속인 죄. 사형이다!”
“자, 잠깐만…. 크억!”
급소를 찔린 팽무진은 숨이 턱 막히면서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기수는 그의 죽는 모습을 보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무래도 같은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사이여서 그런 듯 했다.
기수는 입맛을 쩝 다셨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를 살려줄 수는 없었다.”
그러자 등 뒤에서 냉심선자가 말했다.
“저, 저는 살려주십시오! 전 정말 당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습니다.”
기수가 돌아보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원하신다면 제 몸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하라는 걸 다 해드릴 테니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기수는 피식 웃었다.
“이봐. 난 너한테 적선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냐.”
냉심선자는 그걸 왜 적선이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기수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하는 것을 봐서 살려주겠다.”
“말씀만 하십시오. 무슨 일이건 다 하겠습니다.”
“삼황맹과 티무르에 대해 아는 대로 얘기해 봐. 정보의 수준이 마음에 들면 풀어주고, 별 거 없으면 네 애인을 따라가게 해줄 테니까.”
냉심선자는 자기가 아는 것들을 있는대로 전부 다 털어놓기 시작했다.
기수가 듣기에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러다가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방금 그 얘기 다시 해 봐.”
“예. 우리 삼황맹은 원래 녹림 칠십이채, 장강수로맹과 연합하여 중원을 일시에 장악하기로 했었습니다.”
기수는 생각에 잠겼다.
세 조직이 뭉치기로 한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들 중 녹림72채와 삼황맹의 공통점은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목소리’가 원하는 처단 대상자를 한 명씩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장강수로맹에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었다.
새외의 무림인이나, 녹림의 산적들이나, 장강의 수적들은 원래 무림맹이나 마교처럼 하나의 목표로 뭉치는 게 쉽지 않은 무리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하나로 뭉쳤다는 것은 뭔가 공통분모가 있다는 의미.
수로맹에도 목표가 있는 게 분명했다.
‘좋아. 다음 목적지는 장강이다!’
그렇게 결심한 기수는 냉심선자의 혈을 풀어주었다.
“가 봐.”
“저, 정말 가도 되나요?”
“난 내가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야. 원하는 수준의 정보를 얻었으니까 가도 돼.”
기수는 그녀의 눈빛에서 뭔가 아쉬워하는 듯한 감정을 읽었다.
‘함 해줄까?’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탁지연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내가 가는 편이 나을 것 같군. 다음에 또 보지 말자고.”
그리고는 선풍비를 시전하여 산 위로 올라갔다.
홍안산의 싸움은 벌써 파장 분위기였다. 삼황맹이 티무르의 죽음 이후 정신적으로 붕괴되었기 때문에 애당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기수는 탁지연이 있던 자리로 갔다. 그런데 그녀가 없었다.
“지연! 어디 있어?”
숨바꼭질이라도 하려나 싶어 이쪽저쪽 뒤지던 기수는 점점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가 숨을 리가 없는 것이다.
있을만 한 곳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아래 내려갔다 온지 30분도 안 됐는데…’
30분이라면 많은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시간이기는 했지만 무림맹과 마교 측이 삼황맹에 일방적으로 이기는 상황에 탁지연의 신변에 위협을 가할 만한 적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기수는 산 주변을 미친듯이 돌아다니며 탁지연을 불렀다.
30분 정도 헤매다가 원래의 자리인 동굴 출구 쪽으로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의외의 인물과 마주치게 되었다.
“뭘 그리 열심히 찾으시나요?”
기수는 가슴이 철렁했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사람은 바로 당운영이었다.
“너! 설마…. 네가 지연을….”
“호호! 무슨 얘긴지 모르겠네. 내가 뭘 어쨌다고….”
기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곧바로 당운영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녀를 어떻게 한 거야! 어서 말해!”
“어? 잘 하면 사람 치겠네?”
기수는 그녀의 뻔뻔한 얼굴을 보고 누가 갑인지 깨달았다.
그래서 움켜쥐었던 옷을 놓고, 주먹도 내리고 말했다.
“우리 이러지 말자. 그녀가 어떻게 된 건지 얘기해 봐.”
당운영은 배시시 웃더니 먼산을 보며 대답했다.
“그녀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으으….. 나와 함께 있던 탁지연 말야!”
“아! 그녀라면 이 근처에서 봤었는데….”
“정말? 어, 어떻게 됐지?”
“모르겠어. 암기에 맞았는지, 내상을 입었는지, 중독이 되었는지, 어쨌거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비틀비틀 걸어서 지금은 운기조식을 하고 있을걸?”
기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암기에 맞았다고? 네가 그런 거지?”
당운영은 코웃음을 쳤다.
“흥! 난 단지 목격자로서 얘기해주려고 하는 것뿐인데 막 큰소리를 치네? 이럴 거면 내가 뭐 하러 여기 있는 거지?”
그러더니 홱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기수는 다급해졌다. 한 주먹에 때려죽일 수도 있지만 그러면 탁지연에게 무슨 일이 생길 지 몰랐다. 일단은 참아야 했다.
“이봐! 미, 미안해. 다시는 소리 지르지 않을 게. 그러니까 제발 그녀가 있는 곳을 가르쳐 줘. 부탁이야.”
“이제 보니까 그녀를 정말 좋아하나봐?”
“그, 그건…. 그러니까…..”
아무리 봐도 당운영 이 앙큼한 계집이 뭔가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한데, 칼자루를 쥔 건 그쪽이다 보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말해 봐. 나보다 그녀가 좋아?”
참 대답하기 까다로운 질문이었다. 당운영의 성격 상 사실대로 얘기했다간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그러나 거짓말하기는 싫었다.
“사실은 그래. 지금은 그녀가 좋아.”
“뭐라고!”
당운영은 분노와 질투가 폭발한 표정으로 기수를 노려봤다.
“이, 이봐. 진정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 난 그저 너에게 거짓말 하고 싶지 않아.”
당운영은 씩씩거리며 기수를 쏘아보다가 물었다.
“그럼 나는? 너 나를 좋아한 적이 있기는 했어?”
“물론이지. 한 때는 네가 정말 좋았어.”
이렇게 빨리 거짓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효과가 있어서 당운영의 표정이 많이 누그러졌다.
“그럼 나중에라도 내가 다시 좋아질 수 있을까?”
“사람의 감정이란 건 워낙 자주 변하는 거니까 미래는 열려 있다고 봐야지.”
거짓말도 자꾸 하니까 늘었다.
당운영의 얼굴에서 분노가 거의 다 사라졌다.
“좋아! 나한테 한 가지만 해주면 그녀 있는 곳을 가르쳐줄게.”
“뭘 해달라는 거야? 혹시…. 설마….”
“네가 지난번에 나를 굉장히 아프게 했잖아.”
“그거야 네가 억지로라도 해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어쨌거나 지금은 상처가 아물었으니까 정상적으로 그게 가능한지 확인해봐야 되겠어. 그것만 확인시켜 주면 네 여자가 있는 곳을 가르쳐줄게.”
“하핫! 이, 이봐…그걸 꼭 내가 확인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당운영이 빽! 소리를 질렀다.
“네가 한 짓인데 그럼 누구한테 확인을 받아!”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일종의 AS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당운영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게 중요했다. 그녀와는 이미 경험이 많이 있으니까 한 번 더 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알았어. 빨리 끝낼 테니까 너 약속 꼭 지켜야 돼.”
“흥! 누구 마음대로 빨리 끝내. 어쨌거나 확인만 하고 나면 그녀 있는 곳은 가르쳐줄 거니까 그건 걱정 마.”
“좋아. 그런데 어디서 하지?”
기수가 좌우를 둘러보자 당운영이 동굴을 가리켰다.
“저 안으로 들어가자.”
그 속으로 되돌아가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격벽이 있으니까 사람들 눈 피하기에 그보다 좋은 장소는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