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32
영웅이 좋은 게 무엇인가?
사마외도를 무찌르고 만인의 추앙을 받으면 명예와 돈, 그리고 미녀가 부록으로 따라올 거라는 게 기수가 기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강호행을 해보니까 미녀는 영웅이 되지 않아도 만날 수 있었다.
돈이 아쉬운 적도 없었다.
무공 고수는 어디 가건 대접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명예 하나인데…. 그걸 뭐에 쓰겠는가.
여기서 유명해져봤자 무슨 TV 뉴스에 나올 것도 아니고, 인터넷 포탈에 메인으로 뜰 것도 아니고, 그냥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기수라는 영웅이 있다더라….블라, 블라…
그 소리 들어봤자 자기에게 득 될 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무림의 신분 높은 사람들을 상대하려면 귀찮고 시간만 뺏길 것이었다.
이곳에 눌러 살 거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기수에겐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엄마 혼자 고생하고 있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이곳에서 얻은 엄청난 체력으로 택배 상하차 같은 몸빵 알바를 열심히 해서….
기수의 머리가 잠깐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이런 능력 가지고 고작 상하차 알바 하기는 그렇잖아?’
어쨌거나, 업종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은 돌아가는 게 중요했다.
그렇다면 유명해질 게 아니라 그 반대로 행동해야 했다.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을수록 유리했다.
그리고 영웅이 되려면 적이 필요한데… 기수는 솔직히 마교가 별로 밉지 않았다.
그러니 항마대사나 옥면공자 어느 쪽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기수는 기감을 일으켜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동굴에서 나왔다.
탁지연이 따라 나와서 물었다.
“다들 갔나요?”
“그런 것 같네. 별로 오래 찾지도 않는구만.”
살짝 섭섭했다.
탁지연이 말했다.
“잘 됐네요. 우리 일을 마무리하려면 아무래도 관심을 덜 받는 게 좋죠.”
“일을 마무리하다니?”
“약선문으로 돌아가서 남은 자들도 다 처치해야죠.”
“아! 그 일….”
기수는 탁지연을 이해했다.
동굴 안에서 끔찍한 살육을 저질렀지만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었다. 고원경은 시집 가서 다른 가문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고원의와 고원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기수는 잠시 그녀의 눈치를 본 후 물었다.
“그들은 그냥 살려두는 게 어때?”
“예? 왜요? 그럴 수는 없어요. 절대로….”
탁지연은 의외로 완강하게 반대했다.
둘을 다 죽이기 전에는 복수가 끝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기수는 처음부터 약선문과 원한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집의 두 딸 고원경과 고원지를 자기가 거시기, 머시기 한 처지이다 보니 굳이 죽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가주와 아들들을 죽인 걸로 만족하면 안 될까?”
“그걸로는 부족해요.”
“철산문도 전부 죽은 건 아니잖아. 네가 이렇게 살아 있잖아.”
“하지만 약선문은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증오는 증오만 낳을 뿐이야. 누군가는 고리를 끊어야지.”
“그게 왜 저여야 하죠?”
기수는 그녀의 입장이 확실하다는 걸 알고 접근방식을 바꾸었다.
“사실은, 약선문이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그래.”
“무슨 일인데요?”
“약선문이 이곳에서 몰살당한 이유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너와 나밖에 없어. 고원의는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이 죽은 게 삼황맹과 제갈세가 때문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큰 거지.”
“아! 그럼 독종이 전력을 기울여서 제갈세가를 쫓겠네요. 원수 갚으려고.”
“그래. 그걸 가리켜서 이이제이라고 하는 거지. 후후…”
“차도살인이 더 어울릴 거 같네요. 어쨌거나 기소협의 뜻이 그렇다면….., 좋아요. 살려주도록 하죠.”
“잘 생각했어.”
탁지연이 생긋 웃었다.
사실, 그녀 입장에서도 동굴에서 심정적으로 끝장을 봤기 때문에 약선문까지 찾아가서 나머지를 다 죽이는 게 필수요건은 아니었다.
기수가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주니까 그 김에 다 털어버리기로 한 것이다.
일단 그렇게 정리를 하니까 마음이 날아갈 것처럼 기뻤다.
더불어 기수 품에 안기고 싶은 욕망도 일었다.
그러나 당운영이 한 짓이 떠올라 그 욕망이 한 순간에 식고 말았다.
‘나쁜 년!’
탁지연은 당운영이 얄미워 미칠 것 같았다.
점혈을 당하고 동굴 안으로 끌려가 바위틈에 올려지고 얼굴이 고정될 때까지도 그녀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당운영은 자기 앞에서 자랑이라도 하듯 기수를 가지고 놀았다.
그녀의 의도는 명백했다.
‘이 남자. 내가 침 발랐다! 넌 꿈도 꾸지 마.’
뭐 그런 의미였다. 화가 나는 것은 당운영이 했던 여러가지 동작들을 탁지연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기수가 엄청 좋아한 걸 보면 자기도 배워야 경쟁해볼 수 있을 텐데, 과연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기수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린 어디로 가죠?”
“장강으로! 수로맹 놈들을 때려 부수러 간다.”
탁지연 입장에선 뜬금없는 얘기였다.
그러나 기수와 함께 간다면 그게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홍안산을 내려온 두 사람은 무조건 남쪽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날이 저물어 객잔에 들게 되었는데, 방에 단둘이 있으니까 당연히 생각나는 건 그거 하나였다. 복수 이전엔 서로 운기조식을 하면서 아무 일 없이 밤을 지샌 게 수십 번이지만 지금은 이미 한 번 한 사이. 그냥 자고 싶지 않았다.
기수가 조심스럽게 탁지연의 의사를 물었다.
“목욕통에 온수 좀 받아달라고 할까?”
“뭐하려고요?”
“깨끗이 씻으면 날 다시 받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씻는다고 씻어질 수 있는 일일까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가시가 느껴졌다.
기수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는 탁지연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
무슨 야동을 보거나 야사를 본 적도 없었을 그녀가 당운영과 한 장면을 라이브로 봤으니 충격이 크긴 클 것이었다.
이럴 때는 그냥 놔두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차하게 변명하거나 달래려고 애쓸 필요없이 그냥 사나이답게 무시하는 것이다.
“좋아. 그럼 난 운기조식 할 테니까 먼저 자.”
그리고는 가부좌를 틀고 진짜로 행공에 집중해버렸다.
탁지연은 밖에 나가 새옷을 사왔다. 그리고 혼자 목욕을 하고, 새옷으로 갈아입고, 상쾌한 기분으로 침상에 누웠다. 기수가 다가오면 못 이기는 척 허락해줄 생각이었는데. 기수는 운기조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처음엔 야속했지만 새벽이 되어도 꼼짝 않는 모습을 보니까 은근히 존경심이 일었다. 여자와 한 방에 있으면서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결국 날이 샜다. 기수가 몸을 풀자 탁지연은 황급히 자고 있는 척 했다.
기수는 점소이를 불러 목욕물을 새로 데워달라고 해서 목욕을 한 후 탁지연이 사다 놓은 새옷으로 갈아입고 침상으로 다가가 탁지연의 자는 얼굴을 내려다봤다.
참 예쁜 얼굴이었다.
기수는 그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다.
“잠꾸러기 아가씨. 일어나세요.”
탁지연은 눈을 떴다. 마음 같아서는 기수의 목을 와락 끌어안고 매달리면서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기수는 아쉬울 것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켜 창문도 열고 점소이를 불러 아침식사도 주문했다. 그 역시 구차한 모습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기수는 식사를 가져온 점소이에게 물었다.
“여기서 장강이 먼가?”
“관도를 타고 반나절만 더 가시면 됩니다.”
“금방이군. 거기 가면 수로맹을 만날 수 있나?”
수로맹이란 단어가 나오자 점소이는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수적들은 왜 찾으십니까? 그들을 만나면 홀랑 알몸으로 벗겨져서 물고기밥이 되고 맙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요.”
“알몸이 되다니?”
“수적들의 수법이 그렇습니다. 가진 걸 전부 다 털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알몸으로 만든 후 얼굴에 칼질을 해서 물에 던져 넣으면 나중에 시신이 발견되어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없기 때문에 사건 수사도 흐지부지 끝나버립니다. 그러니 수적들은 관의 압박 없이 계속 강 건너는 사람들을 털어먹을 수 있지요.”
“흐음…. 그런 식이군. 난 장강을 오르내리는 상선을 터는 줄 알았는데.”
점소이가 웃으며 말했다.
“화물 실은 배들은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수로맹에 미리 보호비를 바칩니다. 그러면 목적지까지 무사히 가게 해주지요.”
기수는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돈을 벌자는 것인데 통행세를 선불한다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칼부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혹시 수로맹 사람들 중 최고 고수가 누구인지 아나?”
“글쎄요. 채주 중 하나겠지요.”
“채주는 뭔가? 산적의 산채 두령처럼 수적들도 수채마다 두령이 있는 식인가?”
“예. 작년인가부터 수로맹의 조직이 바뀌었는데, 채주만 36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강을 36등분해서 한 구역씩 맡고 있답니다.”
“장강 36채가 되는 식이군. 그럼 이 근처 강은 어떤가?”
“글쎄요. 그건 포구에 가서 뱃사람들한테 물어보셔야 할 것 같네요. 그들이라면 아주 자세히 알고 있을 겁니다.”
가수는 점소이에게 은전 하나를 주었다.
점소이가 나가자 탁지연이 물었다.
“수로맹엔 무슨 볼일이 있으세요?”
“찾아서 죽여야 할 놈이 있어.”
“혹시, 전에 구화산에서 만났던 녹림 72채의 군사 천외존자, 그리고 이번에 홍안산에서 만났던 삼황맹의 티무르와 같은 적인가요?”
“맞아. 그들 패거리 중 하나야.”
생각해보니 탁지연은 그 두 번의 싸움을 치르는 동안 모두 옆에 있었다.
그녀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들은 누구죠? 정말 엄청난 무공이던데… 기소협은 왜 그들과 싸우는 거죠?”
기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몰라.”
“모른다는 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냥 말한 그대로야. 그들 패거리가 누구인지, 왜 싸워야하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어. 그냥 그들을 모주 제거해야한다는 사실만 알 뿐이야.”
말해놓고 보니까 자기 생각에도 좀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탁지연이 심각한, 그리고 존경심 담긴 어조로 말했다.
“이제 보니 기소협은 정말 중원무림의 숨은 영웅이셨군요. 무림맹주이자 소림방장인 항마대사까지 단숨에 제압하는 고수. 생각만 해도 겁나는 그런 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제거하시다니…. 그러면서도 명예를 탐하지 않고 모든 일을 몰래 하시다니….”
“하핫! 숨은 영웅?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
그렇게 봐주니 고마웠다.
따지고 보면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도 다들 비슷한 처지 아닌가.
“수로맹의 목표는 누구죠?”
“확실치 않아. 누구건 제일 센 놈을 찾으면 돼.”
“수로맹은 그 조직이 어마어마한데, 그들과 차례차례 전부 싸울 생각이세요?”
“계속 이기면 점점 더 센 놈이 나오겠지.”
“그럴 게 아니라 정보를 충분히 수집하고 나서 한 번에 탁! 치고 빠지는 게 깔끔하지 않겠어요?”
“그럴 수 있다면야 좋겠지.”
“그럼 우리가 수적이 되는 게 좋겠어요.”
“어떻게?”
“일단 한 번 시도해보고, 안 되면 기소협의 방법으로 하면 되죠.”
기수는 탁지연이 하자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반나절을 걸어 포구에 도착한 두 사람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방이 붙어 있는 것을 찾아보았다.
포구는 드나드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현상수배범 포스터가 늘 있었다.
기수와 탁지연은 그들 중 가장 흉악한 얼굴 두 개를 골랐다.
그리고 인적 드문 곳으로 가서 각각 그 얼굴로 역용을 했다.
기수는 강도, 강간, 살인, 방화로 전과가 화려한 범장이란 자였고, 탁지연은 수염 없는 얼굴을 고르다 보니 관군 살해 죄목을 쓴 강달이란 자였다.
서로 얼굴을 봐주며 형태를 잡은 후 만드는 연습을 반복적으로 해서 예전의 양일, 양삼의 얼굴과 헷갈리지 않도록 했다.
그렇게 새 얼굴을 만든 두 사람은 해가 져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포구로 나가서 강 건널 배를 구했다.
일부러 선원들 인상이 험악한 배를 골라 탔는데, 과연 배가 강 중심에 도달하자 선원 4명이 본색을 드러냈다.
갑판 바닥에서 칼을 꺼내들고 기수와 탁지연을 위협했다.
“이놈들! 가진 거 다 내놔라!”
기수는 탁지연과 시선을 교환한 후 씩 웃었다.
“그렇게 못하겠다면?”
“네놈들을 토막 쳐서 강에 던져버릴 것이다. 흐흐흐…..”
“우리가 순순히 협조한다면?”
“그럼 몸뚱이에 사지가 다 붙은 채로 강에 던져주마. 흐흐흐….”
“너희들 진짜 나쁜 놈들이구나?”
“우리는 자랑스런 수로맹의 형제들이다! 사람 죽이는 것쯤 일도 아니지.”
4명이 껄껄 웃었다.
기수는 잔백지로 그들 4명을 순식간에 제압해버렸다.
갑판 바닥에 쓰러진 그들은 눈만 멀뚱멀뚱거릴 뿐 자기네들이 무슨 수법에 어떻게 당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 우리에게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너희가 가르쳐준 대로 할 거다. 토막 내서 강에 던지는 거 말이지.”
“으으…. 감히 수로맹의 형제들을 건드리고 무사할 줄 아느냐?”
“너희들이란 걸 모르게 얼굴을 망가뜨리면 괜찮지 않을까?”
겁먹은 4명의 수적들은 몸을 떨었다.
혈도를 제압당한 상태에선 기수가 하는 대로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때 탁지연이 굵은 남자 목소리로 기수에게 말했다.
“형님. 이놈들을 꼭 죽일 필요가 있을까요?”
그러자 수적들은 살아날 길을 발견하고 탁지연에게 매달렸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죽여서 뭐하겠습니까. 풀어주시면 무사히 강을 건너게 해드리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기수는 탁지연과 미소를 교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