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33
기수가 험악한 인상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가진 거 다 내놔라!”
“예?”
수적을 상대로 강도질을 하겠다는 것이니 황당한 일이었다.
“우리는 원래부터 남의 것을 내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살려주려면 당연히 대가를 받아야지. 흐흐흐….”
기수가 영화에서 본 조폭(사실은 양아치) 흉내를 내며 건들거리자 탁지연은 웃음을 참느라 무진 애쓰다가 결국 킥킥거렸다.
시대가 달라도 자기를 과장해서 상대를 겁주는 행동은 다 비슷한 것 같았다.
기수와 탁지연에겐 장난이었지만 수적들은 달랐다.
엄청 잔인한 놈들이라서 죽이기 전에 웃는 거라고 생각했다.
“두 분 혹시… 이런 일로 밥 벌어 먹고 사셨습니까?”
수적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수와 탁지연의 지금 얼굴을 보면 충분히 그런 짐작이 가능했다.
“왜? 관가에 고해바치기라도 하려고?”
“아, 아닙니다! 저희와 동종 업종이라면 그럴 리가 있습니까. 한 형제라고 할 수도 있는데요.”
“형제? 내가 왜 너같은 놈들하고 형제야?”
“헤헤헤…. 이를테면 그럴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본래 사해는 다 형제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요. 헤헤헤….”
기수는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수적의 비굴한 웃음을 보며 슬쩍 인상을 풀었다.
“그런 얘기가 있기는 하지.”
“헤헤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형님처럼 무공이 뛰어난 분이라면 우리 채주님이 엄청나게 중용하실 겁니다.”
기수와 탁지연은 시선을 마주쳤다. 뜻대로 되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도 얘기해 봐. 너희 채주가 누군데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쓴단 말이냐?”
“저희 채주님으로 말씀드리자면 장강 수로맹의 27채를 맡은 두령님으로 무공이 천하제일이고 배포와 심계 또한 뛰어나십니다. 무엇보다도, 인재를 아끼셔서 실력만 있다면 돈을 아끼지 않고 수하로 거두고 계십니다.”
기수는 흥미가 동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탁지연에게 말을 걸었다.
“허구한 날 도망만 다니는 것도 슬슬 질리지 않나?”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수적이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관에 수배를 받는 중이십니까?”
“왜? 우리를 잡아가지고 가서 현상금이라도 벌어보려고?”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한 형제나 마찬가지입니다. 헤헤헤…. 그리고 관에 쫓기는 처지라면 우리 수채보다 좋은 선택은 없을 것입니다. 배타고 강물따라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때문에 관군과 마주칠 일 없고, 실력만 있으면 두령님이 극진하게 대접해주실 겁니다.”
“모르는 사이라도 다 고용한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두 분에게만 특별히 드리는 말씀이지만, 사실 우리 수채는 백리세가와 골치 아픈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놈들을 전부 때려죽이려고 준비를 하는 중이라 널리 고수를 모시는 중입니다. 두 분 정도 실력이면 고용은 보장합니다.”
“좋다! 그럼 우리를 너희 두령에게 안내해라.”
기수가 혈도를 풀어주자 수적들은 잽싸게 일어나 배를 지었다.
그렇게 안내되어 도착한 곳은 강을 따라 30분 정도 간 곳에 정박되어 있는 커다란 배였다. 겉보기엔 일반 상선 같았는데 짐 대신 큰 선실이 만들어져 있었다.
“채주님! 저희들이 영웅들을 모셔왔습니다.”
잠시 후 두 배 사이에 널판지가 가로놓이고 기수와 탁지연은 그쪽으로 건너가 27채의 채주라는 자를 만나게 되었다.
강대원은 30대 후반의 덩치 좋은 사내로, 눈썹이 짙고 수염도 무성하게 자라서 딱 보기에도 범죄자 인상이었다.
그는 기수와 탁지연을 훑어보더니 생긴 것과는 달리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두 분은 어디 출신이고 무슨 일을 하셨소?”
기수와 탁지연은 방에서 본 정보를 토대로 대충 꾸며서 대답했다.
“혹시 두 분의 실력을 좀 시험해봐도 되겠소?”
“얼마든지 좋습니다.”
그러자 강대원이 직접 나섰다.
“열 초식 정도만 겨뤄봅시다.”
기수는 어느 정도나 힘을 써야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산적이나 수적이나 비슷할 거라고 본다면 두령이라고 해봤자 별 것 없을 것이었다.
이름난 문파에서 제대로 배운 사람이 도적이 될 가능성은 낮았다.
그런 생각으로 대충 주먹을 뻗었던 기수는 하마터면 완맥을 잡힐 뻔 했다.
‘무슨 수적이 이런 날카로운 수법을 다 쓸 줄 알지? 장난 아닌데?’
깜짝 놀라 피하면서 반격을 하다 보니 순식간에 10초식을 모두 쓰고 말았다.
“하하하!…. 범장이라고 했소? 이런 고수를 만나다니…. 정말 반갑소!”
강대원은 기수의 솜씨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기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상대의 실력에 놀라서 자신의 진짜 실력을 드러낼 뻔 했는데 다행히 상대보다 약간 약한 정도까지만 잘 위장한 것 같았다.
문제는 탁지연이었다. 기수가 보기에 탁지연이 강대원과 싸워서 질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본래 실력을 숨기면서 싸울 정도의 차이는 아니었다.
“내 동생 강달의 실력은 내가 보장하겠소.”
그러자 강대원은 뜻밖에 바로 물러섰다.
“좋습니다!”
무공 고하를 꼭 따져보려는 게 아니라 귀빈으로 대접할 정도의 실력이 있는지 확인만 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기수의 만만치 않은 대응만으로 충분히 합격이 된 것이다.
“두 분은 우리 수채의 일원이 되어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써주신다면 최선을 다해서 채주님을 보필하겠습니다.”
기수와 탁지연이 포권을 하자 강대원은 곧바로 술자리를 준비시켰다.
그리고 세 사람이 술잔을 돌리는 동안 부하 한 명이 방으로 나붙은 종이 두 장을 가지고 왔다. 쫓기는 신세라고 했던 기수와 탁지연의 말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강대원이 웃으며 말했다.
“두 아우는 이것 때문에 오래 못 가 잡히고 말았을 거야. 어떤 화공이 그렸는지 솜씨가 대단히 좋은 걸?”
기수와 탁지연은 속으로 웃었다. 화공의 솜씨가 좋은 게 아니라 두 사람의 역용술이 뛰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강대원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형님 덕분에 피곤한 도망자 신세를 면했습니다. 고맙습니다!”
“하하하! 내가 고맙지. 우리 수채의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으니….”
강대원은 호탕한 면이 있는 기분파였다.
술이 들어가자 기녀를 3명 불러오게 해서 자기 옆자리와 기수, 탁지연 옆에 각각 한 명씩 앉혀주었다. 그리고 술자리 분위기는 곧바로 끈적끈적하게 변했다.
강대원의 손이 기녀의 가슴으로, 치마 속으로 마구 드나들자 기수는 당황했다.
자기는 아무 문제 없지만 탁지연의 정체가 탄로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탁지연은 지금 험악한 범죄자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 속은 아직 순진함이 남아 있는 소녀였다.
기녀의 살을 만지며 달아오른 강대원은 당황스런 요구를 했다.
“오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지금 이 자리에서 질탕하게 한 번 놀아보는 게 어떤가? 남자도 셋, 여자도 셋이니까.”
기수는 살짝 불안감을 느끼며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놀자는 말씀이신지…”
“각자 벗겨서 하다가 좌로 한 칸 씩 돌아서 또 하는 식으로…”
기수와 탁지연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탁지연은 여자니까 당연히 그런 걸 할 수 없었다. 존슨이 없는데….
기수도 남과 한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 하는 난교엔 경험도 관심도 없었다.
여자가 여럿인 경우는 경험해봤지만, 남자가 여럿인 경우는 좀 그랬다.
그러나 강대원은 집요했다.
“왜? 방향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러면 우로 한 칸씩 돌자고.”
그러더니 자기 품의 기녀 옷을 막 풀어헤쳤다.
“아이… 왜 나만….”
기녀는 저항하는 척 하면서도 강대원의 손길을 전혀 거부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식의 접대(?) 자리에 자주 불려온 모양이었다.
기수는 강대원의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적이 된 걸 보면 사춘기에 비슷한 성향의 패거리들과 어울려 다녔을 것이고, 남자는 많은데 여자는 적거나 한 명인 경우에 독일빵인지 돌림빵인지를 먹었을 것이었다.
자기야 거기에 재미를 붙여서 그 이후에도 그런 식으로 노는 걸 즐겼을 수 있지만, 이쪽까지 당연히 그런 취향일 거라고 넘겨짚는 건 사양이었다.
나름대로 여자를 셋이나 불렀으니까 예의를 지킨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어쨌거나 기수는 다른 남성과 함께 섹스하기는 싫었다.
그때 탁지연이 갑자기 다급한 신음을 토하며 자기 옆의 기녀를 확! 밀었다.
“무, 무슨 짓이냐!”
탁지연이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기녀 쪽에서 먼저 남자를 더듬은 것이다.
문제는 기녀의 손이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들었지만 그곳엔 있어야 할 게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탁지연이 그녀를 밀어낸 것이다.
강대원의 표정이 굳었다. 자신의 성의를 무시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뭔가 좀 수상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기수는 상황을 더 이상 악화시키고 싶지 않아서 대충 둘러댔다.
“아우와 저는 본래 여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여자가 싫다는 남자는 처음 보는군….”
그러다가 강대원은 갑자기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기수와 탁지연을 번갈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수는 기분이 나빴다.
‘이봐! 이상한 오해 같은 거 하지 말라고…. 우리 그거 아냐.’
그러나 사실대로 밝히면 또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오해하거나 말거나 그냥 놔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거 외엔 합당한 설명도 할 수 없었다.
“저희는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채주님 혼자 기녀 셋을 상대하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헤헤…”
어울리지 않게 야비한 웃음까지 곁들여가며 하기 싫다는 티를 내자 강대원도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좋을 대로 하게. 거처를 마련해주지.”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걱정 말게. 비밀은 지켜줄 테니.”
기수는 해명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꽉 눌렀다.
기수와 탁지연은 겨우 그 술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탁지연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 입장에선 정말 고역이었던 것이다.
작은 배로 옮겨 탄 두 사람은 한참을 저어 들어가 중간 사이즈의 다른 배에 도착했다.
그 배엔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 십여 명이 타고 있었다.
작은 배를 저어 온 수적이 그들에게 말했다.
“여기 너희들의 새 선장님이 오셨다.”
그러자 수적들이 일제히 군례를 올렸다. 기수와 탁지연은 그 배로 옮겨 탔다.
거처를 마련해준다고 해서 집을 생각했는데 수적답게 배가 바로 거처였다.
수적들 중 덩치 좋고 인상은 더러운 놈이 나서서 말했다.
“저는 육대기라고 합니다. 저희 배에 선장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표정을 보니 반가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마 차기 선장은 자기가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기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범장, 그리고 이쪽은 내 아우 강달이라고 한다. 우리는 본래 살인강도가 본업이고, 배를 타 본 경험은 없다.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한다.”
배를 타본 적 없다는 말에 육대기를 비롯한 수적들 얼굴에 약간 무시하는 듯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기수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수적 짠밥수가 없다 보니까 뭐라 말하기도 애매했다. 그는 그냥 참기로 했다.
‘수로맹 내부 사정을 자세히 알고 난 다음엔 너희들 볼 일도 없을 거다.’
그때까지 하는 거 봐서 그냥 곱게 떠날지, 아니면 혼을 내줄지 결정될 것이다.
육대기는 두 사람을 배 안으로 안내했다.
“이곳이 두 분의 선실입니다.”
채주 강대원의 배에 비하면 아주 좁은 선장실이었다.
그래도 두 사람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문이 닫히자 탁지연이 말했다.
“남자들은 원래 술을 마시면 다 그렇게들 노나요?”
“무슨 소리! 사람마다 다르지. 강대원은 수적이잖아. 수준이 딱 그 정도인 거지.”
“기소협. 아니, 형님은 기루에 가본 적 없어요?”
“난 없어. 그리고 간다 해도 강채주 식으로 놀진 않을 거야.”
“그러시겠죠. 형님이 어떤 식으로 놀지는 저도 알아요.”
아무래도 당운영과의 일을 아직까지도 마음에서 털어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봐. 그러지 말고 우리 예전에 나갔던 진도를 다시…..”
기수가 슬그머니 다가가서 허리를 안으려 하자 탁지연은 그를 밀어냈다.
“여긴 좀 불안해요.”
“방음 잘 됐는데 왜? 밖의 물결 소리도 거의 안 들리잖아. 이곳의 소리도 거의 새어나가지 않을 거야. 그리고 조용히 하면 되지 뭐.”
그러나 탁지연은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얼굴의 남자에겐 안기고 싶지 않아요…”
기수도 사실 탁지연의 지금 모습을 안는 건 좀 그랬다.
다음날 저녁.
기수와 탁지연은 강대원의 배로 갔다.
그곳엔 어제와 달리 수십 명의 선장들이 모여 있었다.
새로 식구가 된 기수와 탁지연을 소개하기 위한 자리였다.
인사가 끝난 후엔 곧바로 술자리가 이어졌는데,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친목 도모를 위해 독일빵을 먹자!’는 제안은 없었다.
기수가 강대원에게 물었다.
“저는 이곳에 와서 채주님의 무공이 고강한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수로맹에 다른 고수도 있습니까?”
빨리 조사를 끝내고 그 고수를 잡으러 떠나고 싶었다.
그래야 본래의 얼굴로 돌아가서 탁지연과 화해의 밤을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
강대원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수로맹의 맹주님이야말로 천하제일의 고수시지.”
“아! 그렇군요. 한 번 만나 뵙고 싶은데, 주로 어디 계시나요?”
강대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강을 수시로 오르내리니까 거처가 정해지신 건 아냐.”
”아쉽군요.“
“거처를 알아도 자네가 마음대로 찾아가서 만날 수는 없어. 맹주님이 원하셔야 만날 수 있는 거야. 뵙고 싶으면 열심히 싸워서 공을 세우라고.”
“알겠습니다!”
기수는 잠시 시간이 지난 뒤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런데 채주님은 어디서 그런 수준 높은 무공을 익히셨습니까? 정말 감탄했습니다.”
칭찬과 아부가 적당히 섞인 얘기를 듣고 강대원은 껄껄 웃었다.
“하하하! 맹주님이 주신 비급을 익힌 거야.”
“와! 그럼 맹주님의 제자가 되신 겁니까?”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36채 채주들이 전부 비급을 받았으니까 나만 특별한 건 아냐. 그들 중에서 최고가 되어야 진정한 수제자라 할 수 있지.”
기수는 수로맹주가 자신의 목표임을 확신했다.
부하들에게 비급을 나눠줘서 단기간에 고수로 만들 정도면 본인의 무공은 천외존자나 티무르 수준일 게 분명했다.
‘녹림 72채와 삼황맹에 이어 이곳 수로맹도 내 손으로 무너뜨려주마.’
최고의 고수를 제거하면 힘이 절반 이상 꺾일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면 진짜 암중 활약하는 히어로가 되어서 중원 무림에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연회가 끝나고 모두 자기 배로 돌아가자 강대원은 자기 심복을 불러 지시했다.
“범장과 강달의 고향에 사람을 보내서 그들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해 와.”
“왜 그러십니까?”
“맹주님에 대해 자꾸 묻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관의 끄나풀일지도 모르겠어.”
“알겠습니다.”
수하는 즉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