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49
기수는 녹림72채가 포위망을 펼친다는 사실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산적들에게 그런 머리가 있을 리 없었다.
제갈세가에서 이번 전쟁에 대비하여 가르쳐준 게 분명했다.
제갈빈이 수로맹에 찾아와서 공격 전략과 세부 전술을 브리핑 했듯이 녹림72채에도 다양한 코치를 했을 것이고, 이 포위망도 그 중 일부일 가능성이 컸다.
그나마 지형지물을 이용한 본격적인 기문 진법이 아니라는 점에선 다행이지만 꺼림칙함이 사라지진 않았다.
“두 분. 기문진법에 대해 좀 아십니까?”
소검평과 무정선자는 서로를 쳐다봤다.
“설마 산적들이 진법을 운용할 거라고 보는 건 아니겠지요?”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늘 최악에 대비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무정선자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양소협 말씀이 맞아요. 일단 주변 병력의 배치부터 살핀 후 움직이기로 하죠.”
그녀는 근처의 높은 나무로 가볍게 뛰어 올라가더니 좌우를 유심히 살핀 후 내려와서 말했다.
“양소협의 말씀 듣기를 잘했네요. 저들은 기본적이지만 구궁팔괘진의 원리에 따라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어요.”
기수는 기본적이란 단어에 집중했다.
“선자님이 파해할 수 있는 수준이겠지요?”
“물론이에요.”
기수는 기뻤다. 탁지연에게 칭찬(?) 받아가며 열심히 공부하긴 했지만 기문진법은 역시 어려웠다.
무정선자가 진에 대해 안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었다.
“여기서 정남향으로 똑바로 저쪽 협곡까지 가야 해요.”
“좋습니다! 갑시다!”
청성과 아미 제자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리자 숲에서 산적들이 튀어나와 길을 막았다.
“이놈들! 어딜 가려고!”
“여기가 너희들 무덤이다!”
누군가는 여기 와서도 직업정신을 발휘했다.
“가진 거 다 내놔라!”
적의 수가 워낙 많고 겹겹이 에워싸 왔기 때문에 그냥 별 생각 없이 길을 뚫는 시도였다면 옆으로 피해 갔을 것이었다.
그러나 무정선자가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모두들 물러서지 않고 열심히 싸웠다.
특히 기수는 자기 나름대로 양오의 무공수준이라고 설정한 한도 내에서 정말 열심히 전투에 임했다.
아이덴티티 확보를 위해 유성추를 놓고 왔는데, 그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역시 칼이 제일 편했다.
도룡문의 탈백도 48초식을 혹시라도 마교 도법이라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일부러 초식을 좀 변형시켜서 썼는데, 몇몇 무리한 동작이 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적들은 기수의 칼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
나중엔 탈백도 본래 초식보다 기수가 변형시킨 초식의 수가 더 많아져서 전혀 새로운 도법처럼 되어버렸다.
기수가 그렇게 분전하고 청성과 아미의 제자들도 기세를 올리자 결국은 산적들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무정선자는 우선 문도들 중 부상자가 없는지부터 살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가 적 진영을 확인했다.
그녀가 내려오자 기수가 물었다.
“이제 우린 안전한 겁니까?”
“아직 포위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다.
“어, 어째서…..”
“적이 그 사이 진형을 바뀌었습니다.”
“산적들에게 그런 정도의 능력이 있을 수 있나요?”
“저도 의문입니다만, 분명이 포위망이 이동하여 아직도 조여오고 있습니다.”
기수와 무정선자는 당황했지만, 사실 산적들에겐 능력이 있었다.
수적들이 배를 타고 진형 연습을 하듯이, 산적들이 군사훈련을 했다 하면 그 종목은 오로지 하나. 바로 사냥이었다.
호랑이건, 곰이건, 멧돼지건, 사슴이건, 토끼건, 산적들은 그것들을 어떻게 몰고, 어떻게 조여들어가서,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거의 생활화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국 기수와 청성, 아미의 제자들은 사냥감이고, 산적들은 몰이꾼이 된 상태에 제갈세가로부터 배운 포위전술이 더해져서 포위망이 쉽게 뚫리지 않은 것이다.
기수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압박감이 기분 나빴다.
‘확! 들이쳐서 다 죽여 버릴까?’
그러나 양오에게 그 정도의 능력은 없었다.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놓고, 일단은 청성, 아미와 행동을 함께 하는 게 좋다고 판단되었다.
“멈춰 있으면 포위망이 단단해집니다. 이동합시다!”
그로부터 달리기 시합이 시작되었다.
포위하려는 산적들과 벗어나려는 청성, 아미.
산적들은 다년간의 몰이 경험에 신기술을 접목하여 간격을 좁혀왔고, 청성과 아미 제자들은 경공술로 그곳에서 벗어났다.
기수는 경공술 쪽이 훨씬 빠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제자의 무공이 떨어진다고 해서 버리고 갈 수는 없기 때문에 무리 전체의 이동속도가 20명 중 무공이 가장 떨어지는 제자의 경공 속도에 맞춰졌기 때문이다.
거리를 좀 벌렸다 하면 금세 따라붙다 보니 제대로 쉴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백리세가와 가까워지면 결국 산적들이 포기할 거라는 게 기수의 기대하는 바였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기수는 좌우를 둘러보다가 이상해서 무정선자에게 물었다.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북서쪽이요.”
“그쪽이 유일한 탈출로입니까?”
“아뇨. 지금 상태에선 어느 방향으로 가도 마찬가지에요.”
기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남동쪽 백리세가의 장원 쪽으로 가야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무정선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로 갈 수는 없어요.”
“왜요?”
“우리가 그리로 가면 강호엔 청성과 아미가 녹림도들에게 쫓겨 도망쳤다는 소문이 퍼질 것 아니겠어요?”
“하핫! 설마요….”
그러나 얘기를 듣고 보니 걱정이 될 만도 했다.
‘명문정파라는 것도 꽤 피곤하군.’
아무리 그래도 자기와는 상의도 없이 백리세가와 반대방향으로 달려온 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의 불만을 읽었는지 소검평이 말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숫자가 적은 우리 쪽에 유리합니다. 잠시 숨어서 기력을 회복한 후 내일 아침부터 놈들을 조금씩 부숴 나가면 결국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럴듯한 작전이긴 했다.
충분한 휴식을 가진 이후라면 산적 20명과 맞짱 떠서 청성과 아미가 질 리는 없었다. 여기서 10명 죽이고, 저기서 15명 죽이고, 하는 식으로 게릴라전을 편다면 청성과 아미는 녹림도에 쫓겨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녹림도들을 무찌른 영웅이 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기수의 계획과는 좀 달랐다.
송란과 굿바이 섹스를 즐겼으니 이젠 슬그머니 빠져나갈 생각이었는데 그들과 운명 공동체가 되어 산속에 갇히게 된 것이다.
밤이 되자 확실히 산적들도 더 이상 무리한 포위진 운용은 하지 않았다.
도망치는 청성과 아미 못지않게 그들도 지친 것이다.
어둠 속 휴식은 꿀맛 같았다.
물론 밥맛은 별로였다. 불을 피울 수 없기 때문에 저마다 휴대한 건량을 꺼내서 호리병의 물이나 술과 함께 꼭꼭 씹어 허기를 달래야 했다.
기수는 시간 여유가 좀 생기니까 은근히 송란과 굿바이 섹스를 한 번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기대했다.
그러나 숨어 지내는 상황이라 불침번을 멀리 보내지 않고 아주 가까이에 배치했기 때문에 그건 포기해야 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너희들도 섭섭할 텐데?’
그러면서 슬쩍 소검평과 무정선자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긴장을 해서인지 섹스 생각은 전혀 없는 듯 했다.
‘에라. 잠이나 자자.’
기수는 바닥에 마른 나뭇잎을 깔고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그러나 잠은 잘 오지 않았다. 그 역시 약간은 긴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럼 운기조식이나 해볼까?’
그러면 내공도 연마되고 피로도 풀리니 일거양득이었다.
본격적으로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뭐 좀 물어봐도 되요?”
기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놔…. 여자들은 왜 내 운기조식 하는 꼴을 못 보는 거지?’
호흡을 정리하고 돌아보니 놀랍게도 말을 건 사람은 아미파의 소녀였다.
“무, 무슨 일로….”
“놀라셨나 봐요? 죄송해요. 전 미림이라고 해요.”
“오! 그, 그래…. 미림.”
가까이에서 보니까 아주 깜찍하고 예쁜 얼굴이었다.
“우리.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사실. 저 강호엔 처음 나오는 거거든요.”
“아! 그랬어?”
얘기하면서 보니까 애가 참 티 없이 맑고 순진한 느낌이었다.
“아미산에서 검술을 열심히 익히긴 했는데, 막상 실전에서 써보니까 너무 무서운 거 있죠. 피가 막 튀고….”
미림은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꼭 감고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기수는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정신 차려 임마! 쟤 미성년자야.’
그러자 또 하나의 자기가 대답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뭐? 내가 옷을 벗긴다는 것도 아니잖아. 귀엽다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뭐.’
그렇게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기수가 물었다.
“낮의 전투에서 혹시 살인도 해봤어?”
“한 아저씨의 천돌혈을 찌르기는 했는데, 그 사람이 죽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왔어요.”
“흐음…. 천돌혈이라면 거의 죽었을 거라고 봐야지. 첫 살인이라 좀 힘들었겠네.”
“예. 그래서 다음엔 명치를 찔렀어요.”
“아! 두 명이나…”
“견정혈 찔린 남자는 그 상태로 칼을 휘둘러서 저를 깜짝 놀라게 했고요. 단전은 찔러봤자 즉각적으로 제압이 되지 않더라고요.”
기수는 입을 다물었다.
‘너 오늘 도대체 몇 명이나 죽인 거냐? 첫 전투라며?’
귀여운 소녀 얼굴을 해가지고는 사람을 부위별로 찔러 보는 끔찍한 짓을 참 잘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무림 문파에서 검술을 배워서 강호에 나왔으면 살인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기만 해도 이곳에서 지내며 살인에 엄청 둔감해진 상태라서 이해가 되었다.
“산적들의 수가 좀 많긴 하지만 결국 무공의 고하는 넘어설 수 없어.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도 있잖아?”
“클래스가 뭐예요?”
“결국은 고수가 이긴다는 얘기야. 탈진하지 않도록 기력을 잘 관리하기만 하면 돼.”
“예. 좋은 말씀 감사해요.”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런데 송란 사저하고 뭐 한 거예요?”
“허걱!”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참 단도직입적으로 잘도 물어보면서 낯빛 하나 변치 않는 미림이 신기했다.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눈을 말똥말똥 뜨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게 그러니까…. 무슨 일을 얘기하는지 잘 모르겠네.”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미림은 집요했다.
“그게 뭐였어요? 왜 그걸 보면서 제가 얼굴이 화끈거리고 몸이 막 뜨거워진 거죠?”
기수가 결혼을 한 상태였다면 그건 엄마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쫓아 보냈을 것이었다. 마누라는 없지만 미룰 대상이 있기는 했다.
“가서 사저한테 물어보지 그래? 아! 다른 사저는 절대로 안 되고. 송란사저. 오로지 그녀한테만 물어 봐. 그럼 자세히 대답해줄 거야.”
겨우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미림은 다시 귀엽게 찡그린 얼굴로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안 돼요. 송란사저는 무섭단 말예요.”
“난 안 무섭고?”
“아저씨도 좀 무섭게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송란사저가 더 무서워요.”
“아, 아저씨….!”
기수는 쓰러질 뻔 했다.
지금 얼굴이 본래 나이보다 10살쯤 많아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저씨 소리 듣는 충격이 덜하지는 않았다.
“우선! 나를 양소협이라고 불러. 그리고 지금 이 얘기는 우리 사이에 하기엔 부적절한 것 같으니까 그만두자.”
“알고 싶어요. 가르쳐주세요. 양소협.”
“안 돼.”
“아이… 제발요….”
애교가 작살이었다. 특히 나이가 어린 소녀이다 보니 아주 제대로 나왔다.
“야! 너희 아미파는 제자가 강호에 나올 때 성교육도 안 시키냐?”
“아! 그거… 남자하고 자면 임신하는 거에 대한 얘기죠?”
“어흠! 이제 보니 배웠구만…. 그러면서 뭘 물어?”
미림은 눈을 똥그랗게 떴다.
“어머! 그게 그거였어요?”
“그럼 뭐겠어?”
“그런데 사저들은 왜 입으로 해야 한다는 얘기는 안 가르쳐준 거죠?”
“아! 그러니까…. 그건 말이지…”
기수는 왜 송란이 와서 미림의 귀를 잡아 당겨 끌고가지 않나 궁금했다.
슬쩍 살펴보니 그녀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다른 제자들처럼 종일 계속된 싸움에 지친 데다가 밤중에 추가로 에너지를 소모해서 더 피곤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나중에 말야. 용기를 내서 송란사저한테 물어 봐. 그리고 지금은 내가 몹시 피곤하니까 잠 좀 자게 해줘.”
“죄, 죄송해요. 하지만 전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아! 졸린다.”
기수는 아예 눈을 꼭 감고 나무에 머리를 기댄 후 시체놀이를 시작했다.
1분쯤 지나 한 쪽 눈을 살짝 뜨고 보니 미림은 가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입이 댓자나 나온 귀여운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결국 기수는 항복했다.
“알았어! 내일 얘기해줄게. 내일. 오늘은 좀 자자.”
“좋아요! 내일은 꼭이에요.”
물론 기수는 송란에게 모두 미룰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