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50
적의 포위망 속에서 불안한 밤을 보낸 다음날.
기수는 송란을 불러 어젯밤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송란은 깜짝 놀랐고. 동시에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부끄러움이 분노로 변했다.
“그 못된 것이 감히 몰래 숨어서 보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이, 이봐, 어쩌려고 그래?”
“어쩌긴요. 입을 틀어막아야죠.”
“어떻게?”
송란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자신과 미림 사이엔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입문한 시기에서부터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미림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목격한 일이 문제였다.
성적 자극은 워낙 강렬하기 때문에 협박한다 해서 그녀의 호기심을 억누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이 약점을 잡힌 꼴이라 협박이 통할 가능성도 낮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죠?”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해?”
“아! 미치겠네.”
위협이 안 통한다고 때릴 수도 없었다. 역효과만 날 것이었다.
그때 무정선자가 집합명령을 내렸다.
지금은 녹림도들의 포위망을 깨고, 더 나아가 적을 섬멸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송란도 미림의 일에 매달려 있을 수 없었다.
“일단 여길 빠져나간 뒤에 처리하기로 해요. 당장은 더 급한 일이 있으니까요.”
“처리란 단어가 좀 걸리네.”
“엉뚱한 상상은 하지 말고요. 나도 방법을 생각해볼 테니까 양소협도 좋은 생각을 떠올려보세요. 알았죠?”
그러겠다고 했지만, 좋은 생각이나마나 아예 미림과 송란에 대한 생각 자체가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전투가 치열하고 급박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어제 하루 종일 쫓겨 다닌 게 나름 성과가 있었다.
적의 움직임에 익숙해지게 된 것이다. 그러고 나니까 청성과 아미 쪽의 무공이 더 고강하다는 사실이 결국 차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도망을 치더라도 그냥 무작정 뛰는 게 아니라 적의 병력 배치를 확인해서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하여 서너 명에서 많으면 십여 명을 쓰러트린 후 도망쳤다.
그리고 간격이 벌어지면 다시 돌아서서 습격하는 식이었다.
상황이 그렇게 바뀌자 녹림72채 병력은 당황했다.
분명히 자기네가 포위하고 몰아가는 형국이지만 사상자는 자기편에서만 나왔다.
청성과 아미는 어제보다 바쁘게 움직이는 대신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적이 주춤하자 여유도 생기게 되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무정선자가 말했다.
“이 싸움은 이제 우리가 주도권을 잡았어요.”
기수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위험은 없을까요?”
“다수의 적에 완전히 포위당하면 최악의 상황을 각오해야 하겠죠. 하지만 적이 진법의 원리에 따라 포위망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차렸으니까 거기에 걸려들 일은 없어요.”
소검평이 말했다.
“이게 모두 그대의 공이요.”
“아이. 그런 말씀 마세요. 호호호!”
기수는 속으로 웃었다.
‘그래. 칭찬하기에 정확한 타이밍이었어.’
소검평이 상당히 노련하게 잘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능력은 있었는데 컴플렉스가 문제였던 것이다.
기수는 송란 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나무 뒤로 가서 만나자 그녀가 말했다.
“아무래도 그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아요.”
“무슨 방법?”
“양소협이 미림하고 한 번 하세요.”
“너 미쳤냐?”
“안 그러면 걔가 입을 다물 것 같아요?”
“오우! 노! 그건 안 돼.”
“왜요? 제가 허락할게요.”
기수는 어이가 없어서 송란을 봤다.
그녀의 허락은 필요 없었다. 하고 싶으면 자신의 의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송란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기수의 마음에 걸리는 건 미림이 너무 어리다는 점이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
“그것 밖에 없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 하고.”
“뭐가 말이 안 돼요? 호기심을 채워주면 더 이상 떠들지 않을 텐데…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양소협 한테도 좋은 일 아닌가요? 그래요? 안 그래요? 대답해보세요.”
그런 걸 어떻게 대답하냐? 크크크….
송란이 생긋 웃은 후 말했다.
“걔를 설득하는 건 내가 맡을게요.”
그때 휴식을 중지하고 다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녹림도의 수가 많기 때문에 에워싸이지 않도록 계속 이동하는 게 필수였다.
송란이 가고 혼자 행동하게 된 기수는 미림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아이에게 어른의 세계를 가르치는 것 역시 나의 사명 중 하나 아닐까?’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생각해보면 성인의 기준은 시대가 만드는 거잖아?’
현대에선 19세를 기준으로 잡지만 조선시대엔 훨씬 낮았다.
이곳 중원무림도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10대 중반만 되면 어른이라고 봐도 되잖아?’
우리나라야 고3때까지 어른들이 학교에 꽉 잡아놓고 있으니까 다들 자기가 미성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리 오래전도 아니다. 1960년도엔 대통령을 끌어내려 외국으로 망명가게 만들고, 부통령 일가를 자살하게 만든 419 의거가 바로 마산상고에 다니던 그 또래 학생에 의해 촉발된 바 있었다.
권력자들이 고등학생들에게 투표권을 안 주고 계속 학교에 가둬놓는 건 아마도 그때의 트라우마가 아닐까 싶다.
자율학습이란 명목으로 밤 10시까지 잡아놓고, 너희는 미성년이야!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해야 돼! 라고 주입해서 길들이는 수작.
‘아! 씨발. 외국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더니, 나도 별 걱정을 다하네.’
뭐. 중원무림에 있으면서 고향 일 걱정하는 건 너무 먼 얘기고, 당장은 미림을 이곳의 시대 기준에 따라 성인으로 봐야 하나, 아니면 미성년으로 봐야 하나가 문제였다.
신중하게, 그리고 심각하게 고민한 결과.
‘그래!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시대와 장소가 다른데 옛 생각에 잡혀있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따지면 살인을 벌써 몇 건이나 저질렀나.
사람 목숨 해치는 일은 거리낌 없이 하면서 사람에게 기쁨 주는 일은 터부시한다는 건 이율배반이란 쪽으로 결론이 나왔다.
‘아! 난 참 철학적인 놈이야. 이런 문제 가지고 깊이 고민도 하고…’
정말 생각할수록 대단하지 않은가.
개념 없이 사는 놈도 많은데…
‘이로써 오는 여자 막지 않는다는 신조도 관철되는 것 아니겠는가!’
마음을 정하고 나니까 적들을 빨리 물리치고 싶어졌다.
그래야 밤에 여유도 생기고, 기회도 생길 것이었다.
기수는 이후 산적놈들을 만나면 청성과 아미 제자들보다 더 열심히 나서서 베었고, 포위 진형을 살필 때도 남들보다 더 멀리까지 가서 보고 왔다.
소녀의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떠나려던 마음이 싹 사라진 것이다.
오후 휴식시간에 소검평이 다가와 말했다.
“양소협. 정말 고맙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희를 위해 이렇게 목숨까지 걸고 싸워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핫! 별말씀을요.”
“아닙니다. 우리 청성파를 대표해서 감사드리고, 꼭 한 번 산으로 모셔 사부님에게도 소개시켜드리고 싶습니다.”
딱히 청성과 아미를 위해 싸운 것은 아니지만 감사 인사를 받고 나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잠시 후 기수가 혼자 있게 되자 송란이 다가와서 말했다.
“오늘밤. 하기로 결정했어요.”
“뭐? 하다니? 뭘?”
“아잉…. 다 알면서… 우리 미림이 잘 부탁해요. 호호호!”
“알긴 뭘 알아…. 요즘은 불침번도 가까이에 서잖아.”
“그건 상관없어요. 우리 둘이 볼일 있다고 자리를 옮길 거니까 따라오세요.”
“무슨 볼일?”
“여자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할 일들이 좀 있답니다.”
“허어! 그것 참…. 오늘밤이라니…. 그렇게 급하게?”
“기회란 게 나중으로 미루었다간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거잖아요. 잊지 말고 꼭 따라오셔야 해요. 아셨죠?”
“뭐….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말이 있긴 하지.”
“호호! 이따 봐요.”
송란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힙을 살랑살랑 흔들며 멀어져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밤이 되자 기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하핫! 이것 참… 두근거리기까지 하다니… 나도 참.’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표정관리 하다가 자리에 누웠는데 잠도 안 왔다.
마침내 자정이 넘은 시각.
송란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잠시 후 미림도 일어섰다.
기수는 약간의 인터발을 두고, 침을 꿀꺽 삼킨 후 그들을 따라갔다.
숲길을 한참 걸어간 뒤에야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쪽이에요! 이리로 오세요.”
기수는 그들에게 갔다.
“뭐 이렇게 멀리까지 왔어?”
“불안하면 잘 안 되잖아요. 양소협이 고수니까 주변에 누가 없는지 확인해보세요.”
기수는 송란의 말대로 기감을 일으켜 주변을 확인해보았다.
“아무도 없어.”
“이번엔 확실한 거죠?”
“난 언제가 확실했어.”
송란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기수를 흘겨본 후 손짓으로 미림을 불렀다.
“이쪽으로 가까이 와.”
그녀는 바짝 긴장해서 얼굴을 들지도 못했다.
기수는 문득 궁금증을 느꼈다.
“너 몇 살이냐?”
미림은 고개를 살짝 들어 기수를 본 후 대답했다.
“14살이에요.”
“줄리엣보다 많은 나이네.”
“줄… 누구요?”
“아! 신경쓰지 마.”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당시 줄리엣의 나이가 14살이 되기 2주 전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13살인 것이다.
그러니까 미림은 줄리엣보다 한 살 더 많은 것이다.
송란이 생글생글 웃으며 미림한테 말했다.
“너 앞으로 나한테 잘 해야 돼.”
“아, 알았어요. 사저.”
참 별 거로 다 생색낸다 싶었다.
기수는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만있어 봐. 만으로 14살이면 중2냐? 중3이냐?’
그 생각을 하는 순간, 갑자기 영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알바하러 골목길을 나올 때 종종 마주치던 동네 중학생 애들이었다.
‘허걱! 씨발…. 나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로마법이 어쩌고, 줄리엣이 어쩌고, 성인은 시대가 정하는 것이 어쩌고 하면서 사상적 무장을 충실히 했지만, 교복 입고 하교하던 동네 중딩 애들을 떠올리는 순간, 그런 생각들이 전부 다 사라져버렸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도 미림한테 손대는 순간 난 소아성애자가 되는 거다!’
소아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기분 상으로는 그랬다.
기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송란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왜 그러세요? 양소협.”
“내가 여기 온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야.”
“그게 뭔데요?”
기수는 송란을 무시하고 미림 앞에 앉아 그녀와 시선을 맞추고 말했다.
“너한테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남녀간에 서로를 사랑하다 보면 남들 눈에 좀 이상하게 보이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어. 둘이 합의만 한다면 그건 나쁜 게 아냐. 나는 단지 네가 그걸 이해해주기 바란다.”
송란이 당황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양소협.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말이 아닌 행동이 필요한 시점에 왜 그러나 싶었던 것이다.
기수는 손짓으로 그녀를 제지한 후 다시 미림에게 말했다.
“남녀간의 사랑은 소중한 거야. 그리고 일생에 그리 자주 찾아오는 것도 아니지. 너에게도 언젠가 영혼을 흔드는 사랑이 나타날 거야. 지금의 혼란과 호기심은 그때를 위해서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다가가다 보면 너도 결국엔 모든 걸 다 알게 될 거야.”
미림이 주저하다가 말했다.
“하지만 전 오늘밤 양소협에게….”
기수는 검지를 그녀 입술에 대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드라마에서보다 더 멋있었다.
“사랑은 마음이 먼저야. 그 순서를 잊으면 안 돼. 알았지?”
“예. 아, 알았어요.”
“좋아. 할 얘기 다 했으니 나는 이만 간다.”
그리고는 곧장 일어서서 쿨하게 돌아왔다.
뒤돌아보지 않는 게 포인트였다.
10미터쯤 멀어졌을 때, 미림은 가라고 하고 송란하고는 한 번 할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오는 게 그림이 더 나았다.
욕정은 풀지 못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유혹을 이겨내고 일어섰다는 점에서 갑자기 한두살 쯤 더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단순히 색욕만 놓고 보자면 단전에 의식을 집중해서 제어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이번엔 이성만으로 감정을 컨트롤했기 때문에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그냥 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영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부심 덕분에 곧바로 지워버릴 수 있었다.
자리로 돌아와 눈을 감고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송란과 미림도 제자리에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후후…. 송란이 내일 잔소리깨나 하겠군.’
그런다고 해서 결정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