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51
기수는 잠이 오지 않아 운기조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 주변이 밝아오자 호흡을 고르고 조식을 마쳤다.
어젯밤 있었던 일은 생각할수록 대견했다.
‘여기서 지내면서 나도 좀 달라진 걸까?’
몸은 확실히 달라졌다.
성장판이 닫힌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공 덕분인지 키가 최소한 5cm 이상 커진 것 같았고 팔다리나 상체의 형태, 근육들이 정말 보기 좋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조금은 달라진 것 같았다.
예전엔 어떻게든 시간만 때우면 된다는 식이었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그 내일이 왔을 때도 하기 싫으면 간단히 포기하곤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무공을 익히면서 참을성과 끈기가 레벨업의 필수요소임을 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알바 할 때는 일하기 싫어서 놀면 돈을 못 버는 것으로 끝나지만, 이곳에선 수련하기 싫어서 놀면 적과 싸울 때 목숨을 잃게 되니 열심히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긴 끈기와 참을성이 심성의 다른 부분에도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몸과 마음이 계속 성장하면 어쩌지?’
지금도 매력이 흘러넘치는데 더 훌륭해지면 어쩌라는 건지….
기수가 자뻑의 시간을 즐기고 있을 때 무정선자가 다가왔다.
“양소협. 드릴 말씀이 있어요.”
기수는 흠칫 놀랐다.
‘송란의 일을 알아차린 걸까?’
드러나 다행히도 그런 얘기는 아니었다.
“여러모로 우리 아미파를 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별말씀을요. 하핫!”
말수가 없는 무정선자인지라 더 이상의 얘기는 하지 않고 돌아갔지만 기수는 기분이 좋아졌다. 청성에 이어 아미에게도 감사인사를 받은 것이다.
생각해보면 청성파 남자 도사들보다는 아미파의 여도사들을 조금 더 신경 써서 도와준 것 같기는 했다.
객관적으로 아미파 쪽이 아무래도 여자이다 보니 청성보다 약간 전투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상자가 한 명도 없는 것은 기수의 힘이 컸던 것이다.
대열을 정비한 청성과 아미 제자들은 어제와 같은 토벌전을 시작했다.
오늘로써 녹림도들과 싸우는 게 3일째인데, 첫날은 포위망을 피해 도망친 게 전부였지만 어제는 치고 빠지기 전술로 적에게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었다.
그리고 3일째인 오늘은 토벌이란 단어가 딱 어울리는 상황이 펼쳐졌다.
녹림도들은 청성과 아미의 게릴라전에 계속 피해만 누적되자 포위해서 잡겠다는 생각을 포기한 듯 했다. 더 이상 몰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젠 오히려 산적들이 숨고 청성과 아미는 찾아다니며 죽이는 식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소검평과 무정선자는 몹시 기뻐했다.
“결국 녹림72채가 철수를 결정한 모양이군요. 하하하!:
그러나 기수는 승리에 도취할 상황이 아님을 알았다.
제갈세가가 세운 마스터플랜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방심해선 안 됩니다. 저들은 병력의 일부만 보여줬을 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녹림도의 수를 다 합쳐도 그렇게 많은 수가 아닙니다. 저들이 작정하고 한꺼번에 몰아치면 언제든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소검평이 물었다.
“그럼 양소협 생각에 저희들은 어쩌는 게 좋겠습니까?”
“일단 거듭해서 승전을 거두었으니까 이 결과를 가지고 백리세가로 자랑스럽게 개선한 후에 그곳에서 며칠 쉬며 백리가주와 후일을 의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병력이 흩어져 있는 것보다 한곳에 모여야 3대 세력의 총공격에 그나마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게 기수의 생각이었다.
“그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소검평과 무정선자는 기수의 제안에 곧바로 동의했다.
일단 승리를 챙기고 보자는 말에 공감한 것이다.
철수 직전 점심도 먹고 휴식시간도 가지기로 했는데, 송란이 기수에게 다가왔다.
“양소협. 시간 좀 있으세요?”
“이제 하산할 거라 그동안 아껴두었던 육포를 다 먹어치우려는 중이었어. 좀 줄까?”
“전 됐어요. 드시면서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응. 얘기해 봐.”
송란은 배시시 웃으며 맞은편에 앉아 얘기를 꺼냈다.
“어제 일을 차분히 생각해봤어요.”
“그랬어?”
“정말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겠더라고요. 제가 미림이한테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다니… 아! 지금 다시 생각해도 창피하네요.”
기수는 속으로 웃었다.
그는 송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송란의 정신세계가 좀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간 판타지를 가지고 강호에 나온 여자가 그럴 수도 있지 뭐. 흐흐…’
송란의 말이 이어졌다.
“어제 일을 겪고 나니까 양소협이 정말 괜찮은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서야?”
“아, 아뇨. 전에도 알고 있었죠. 호호호!”
당황하기는.
“그런데 어제 일을 겪은 이후엔 양소협한테 완전히 반했어요!”
“어흠!”
너만 그런 게 아냐. 대기표 뽑고 줄 서.
“양소협이라면 이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가고 싶어요.”
기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예전에 제안했을 때 나왔어야 할 대답이었다. 지금은 시효가 지난 것이다.
송란이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부터라도 양소협을 제대로 알아가고 싶어요. 우리 좀 더 진지하게…. 그러니까 대화를 더 자주 하는 게 어떨까요?”
“좋아.”
기수는 간단히 대답했지만 사실 거기엔 조건이 달려 있었다.
연애라는 거, 밀땅이란 거는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심지어는 탁지연의 시도조차 차단해버렸는데 여기까지 와서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았다.
일단 송란이 원한다면 대화는 하되, 뭔가 자기를 쥐고 흔들려는 시도를 하면 그 시점에 끝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청성과 아미는 오후에 몇 차례 더 접전을 벌이면서 산을 내려갔다.
백리세가로 귀환한 소검평과 무정선자는 백리운에게 지난 며칠간의 경과를 보고했다.
백리운이 감탄하며 말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과연 명가의 제자들은 다르십니다.”
“다른 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백리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다른 구역에선 뜻밖의 포위전술에 걸려들어 피해가 심했습니다. 제 아들도 부상을 입었습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소검평과 무정선자는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의 시선이 기수한테로 향했다.
그의 선견지명이 아니었다면 청성과 아미 역시 당할 뻔했기 때문이다.
가주의 방을 나와 숙소로 돌아오는 길.
기수는 장원 안을 둘러보고 공기가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청성과 아미는 승리한 후 개선했지만 다른 쪽에선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백리세가의 정파 연합군 사기는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기수는 그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숫자가 부족한 데다 사기까지 저하되었다면 상당히 위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걸 그냥 두고 봐야 하나?’
기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결심을 굳혔다.
‘좋다! 이들을 도와주자. 내 힘닿는 데까지.’
탁지연에게 등 떠밀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말에 따라 정도 무림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지 송란을 구해줄 생각뿐이었다.
그녀가 원치 않아서 굿바이 섹스만 즐기고 떠날 생각이었는데, 엉뚱하게 미림이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하루 더 머물게 되었다가 청성과 아미의 감사인사를 받았고, 다시 백리세가로 돌아와 전체적인 전황을 알게 된 것이다.
기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모든 게 제갈세가의 계획대로 되어 간다는 점이었다. 세부적인 건 좀 다를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들이 짠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기수는 강호출도에서부터 그들과 안 좋은 인연으로 맺어진 사이.
그들이 잘 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미 한 번 홍안산에서 그들의 계획을 보기 좋게 박살냈지만, 만약 여기서 백리세가가 멸문당하고 삼황맹, 녹림72채, 수로맹이 성공적으로 하나가 된다면 홍안산에서의 실패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가 되는 것이다.
기수는 정도 무림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참전을 결정했다.
‘제대로 해내면 지연이가 특별 서비스도 해주겠지?’
거기에 대한 욕심도 생겼다.
기수는 일단 마을 시장으로 가서 옷과 두건을 샀다.
아무래도 양오의 캐릭터로는 실력 발휘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기수의 모습으로 끼어들 수 있도록 갈아입을 복장부터 준비한 것이다.
그리고 자기 방에서 옷 빨리 갈아입는 연습을 좀 했다.
‘아! 이거 의외로 쉽지 않네.’
슈퍼맨은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궁금했다.
소검평이 찾아와서 술 한 잔 마시며 얘기를 나눌 때는 미리 복선도 깔아두었다.
“제가 며칠 자리를 비우는 동안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처음엔 누구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자기가 기수라고 밝히더군요.”
소검평은 깜짝 놀랐다.
“정말입니까? 기수를 만나셨다고요?”
“예. 아마 지금 이 근처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겁니다.”
“그와 연락 취할 방법을 아십니까?”
“글쎄요. 다음에 인연 닿으면 또 만나자고는 했습니다만….”
소검평은 그 사실을 백리운에게 알렸고, 백리운은 기수의 방으로 달려왔다.
“기수를 만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분을 모셔올 방법이 없겠습니까?”
“글쎄요. 지금 어디 있는지 아는 것도 아니라서…. 그런데 그가 왜 필요합니까?”
“듣기로는 기수가 삼황맹과 원수지간이라고 합니다. 아마 그래서 이 근처에서 자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은데…이왕 공동의 적을 상대로 싸울 거라면 서로 의논도 하면서 힘을 합치면 훨씬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으니까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그 얘기를 전하겠습니다.”
“정말입니까? 고맙습니다!”
백리운은 곧바로 기수의 방을 옮겨주었다.
기수는 졸지에 백리세가 최대 귀빈이 된 것이다.
처음엔 떠돌이 점쟁이라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삼황맹의 가세를 알려주더니 두 번째로 찾아와 더 큰 위협을 경고했고, 이젠 기수와 친분이 있다고 하니 백리세가 입장에서 그보다 더 소중한 손님은 있을 수 없었다.
기수는 나오는 반찬부터 달라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에게 배정된 시녀 두 명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녀들에게 손을 대지는 않았다.
정의의 히어로는 그런 짓을 해선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 시녀의 외모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적의 움직임은 차츰 노골화되었다.
어느 날 아침.
백리세가 장원 주변의 모든 산에 갑자기 깃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군대도 아니면서 그렇게 많은 깃발을 준비한 것은 제갈세가가 심리전을 펼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수천 개의 깃발들이 수풀 위로 솟아 있는 모습은 장원 안의 정도 무림 연합군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백리운은 즉시 회의를 소집했다.
기수는 문파가 아니라 홀로 참여한 것이지만 가주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백리운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적의 수가 예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사람은 많았지만 의견은 없었다.
다들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어서 분위기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기수는 사람 많은 자리에 나서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지만 이렇게 사기가 다운되는 걸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깃발이 많다고 해서 적의 수도 많은 건 아닙니다. 저건 허장성세입니다.”
그러자 누군가 볼멘소리를 했다.
“적어도 하루아침에 저것들을 일시에 걸 정도의 인원은 있는 것 아닙니까?”
거기엔 기수도 할 말이 없었다. 그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적이 1000명, 아니 2000명이라고 해봅시다. 하지만 그 중 절반은 녹림72채의 산적들입니다. 그리고 삼황맹 놈들도 무공을 체계적으로 배운 건 아닙니다. 사막에서 강도질 해먹던 놈들이 대부분이니까 녹림72채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우리 쪽 숫자가 적다고 해서 반드시 불리한 건 아닙니다.”
백리운이 약간 희망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양소협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기수는 자신 있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들이 왜 돈 들이고, 인력 동원해서 깃발 세우는 짓을 하겠습니까? 그냥 싸우면 만만치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우리를 흔들어보려는 수작입니다.”
백리운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그런 식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겠군요!”
“그렇습니다. 개가 짖는 것은 두렵기 때문이거든요.”
말해놓고 보니까 중원무림에 와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경륜과 전략적 마인드, 그리고 말빨도 는 것 같았다.
회의실이 술렁거렸다. 기수의 말을 듣고 희망의 기운이 퍼지게 된 것이다.
백리운이 다시 기수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적이 원하는 걸 해주지 않으면 됩니다.”
“적은 뭘 원할까요?”
“자신들의 최대 강점으로 우리의 최대 약점을 치려 할 겁니다.”
“강점이라면….”
“바로 병력의 수입니다. 심리적으로 우리를 흔든 후 날짜와 시간을 정해서 한꺼번에 밀어붙일 겁니다. 하지만 적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우리가 하나로 똘똘 뭉쳐 있으면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개개인의 무공이 우위에 있고, 또 검진을 연습한 문파도 있지 않습니까. 하수들이 10배 많다고 해도 겁낼 이유가 없습니다.”
기수의 말에 모두의 표정에서 두려움이 사라졌다.
백리운이 약간 들뜬 어조로 말했다.
“맞습니다. 적은 우리가 분열되길 바라고 저런 수작까지 벌였지만 우리는 절대로 흩어지지 않을 겁니다! 하나로 뭉쳐 놈들을 모두 몰아낼 것입니다!”
회의는 돌연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