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52
회의실 여기저기서 의견이 나왔다.
아까는 적막하기만 하던 회의실이 갑자기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사람들 때문에 장터라도 된 것처럼 시끄러웠다.
백리운은 모두들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반가웠다.
그리고 분위기를 이렇게 바꿔준 기수에겐 더할 나위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가 기수에게 물었다.
“양소협. 다수의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려면 어떤 방책을 쓰는 게 좋겠습니까?”
그러자 회의실이 갑자기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기수는 화들짝 놀랐다.
수십 명의 정도 무림 군웅들이 전부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뭐야. 이젠 나더러 군사 역할까지 하라는 거야?’
그건 자신의 전공이 아니었다.
“저는 병력을 움직이는 일에 대해 잘 모릅니다.”
전문 분야가 아닌 것에 대해 얘기를 꺼내면 금방 뽀록난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슬그머니 빠지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백리운은 기수를 놔주지 않았다.
“그래도 양소협의 의견을 한 번 말씀해주십시오. 분명 참고가 될 것입니다.”
회의실은 여전히 조용했고 다들 기수를 주시하고 있었다.
기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방어전술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포톤 캐논 밭이지. 하지만 그 얘기를 해봤자 조크라는 걸 알아차리는 사람조차 없겠지.’
기수는 그냥 모른다고 잡아떼려다가 대충 적의 대공세를 앞둔 테란 진영이란 관점에서 대충 머리를 굴려보았다.
‘벙커와 시즈탱크가 짱인데, 탱크는 없잖아. 메딕도 없는 마린 만으로 아드레날린 저글링 떼거리를 막아야 한단 말이지…..’
그러자 뭔가 생각나는 게 있었다.
“청성과 아미처럼 검진을 운용할 수 있는 문파가 몇이나 되는지 알고 싶군요.”
그러자 회의실 여기저기서 손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수가 손을 내리게 한 후 말했다.
“우선 우리의 일차적인 저지선은 장원의 담입니다. 거기서 적의 수를 최대한 줄여야 합니다. 하지만 담이 성벽만큼 높은 건 아니니까 결국엔 뚫릴 것입니다. 그러면 당황하지 말고 이차 저지선으로 물러나야 합니다. 교차되는 길목처럼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이동할 수 있는 요충지를 검진으로 막으면 또 적의 수를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검진을 벙커처럼 이용하자는 생각이었다.
백리운이 말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입니다. 나머지 병력은 검진과 검진 사이를 막으면 되겠군요.”
기수는 손을 내저었다.
“그런 식으로 형태를 유지하려고 하면 지키기도 어렵고, 일단 한 쪽이 무너지면 전체가 다 붕괴할 것입니다.”
“그럼 어쩌면 좋겠습니까?”
“나머지는 중앙에 모여 있다가 위험에 빠진 쪽에 병력을 보내고 다시 돌아와서 다른 위험을 살피는 식으로 운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적이 어느 방향으로 집중공격을 가해 오건 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리운은 탄성을 토했다.
“아! 그런 식으로 병력을 운용하면 어느 한 쪽이 무너지는 일은 없겠군요.”
역시 물어보길 잘했다는 표정이었다.
기수가 다시 말했다.
“검진도 자리를 지키려고 애쓸 게 아니라 적이 많으면 물러나서 전열을 정비하는 식으로 운용해야 할 것입니다. 오래 버티기만 하면 우리가 이기는 전쟁이니까 전력을 보존하는 게 중요합니다.”
군웅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기수의 얘기를 듣고 개념을 이해한 것이다.
특히 마지막 얘기에 골자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무너지지 않고 버티기만 하면 마지막에 가서 웃는 것은 숫자가 많은 쪽보다는 무공이 고강한 쪽이 될 거라는 그림이 그려졌다.
거기서부터는 백리운이 회의를 주도했다.
그는 장원의 구조와 형태를 속속들이 알기 때문에 기수가 얘기한 저지선들을 어디에 설정해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한 장소에 집착하지 않고 적의 기세에 따라 물러서기도 하면서 시간을 지연한다는 개념에 맞춰 십여 개의 길목이 정해졌다.
기수는 그 과정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가 또 한 번 끼어들었다.
“방어진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 주변만 알 수 있을 뿐, 전체상황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시야가 트인 곳에서 신호를 보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컨트롤 숫자 키로 부대를 설정하고, 맵 전체를 보면서 어택 땅 눌러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백리운과 군웅들은 이번에도 기수 얘기의 요점을 알아들었다.
“전각 꼭대기에서 모든 방위가 다 보입니다. 내 장남을 거기 보내서 깃발로 신호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조직 구성과 주고받을 신호들이 정해졌다.
다음날부터는 실제 훈련이 시작되었다.
여러 문파가 하나의 통제에 따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포위되어 있는 현재 상황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 다들 알기에 군말 없이 깃발신호를 보고 장원 안을 열심히 뛰어다녔다.
기수는 백리운과 함께 그 훈련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추가할 사항을 얘기했다.
“고수로만 따로 별동대를 구성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고수들은 왜요?”
“적 진영엔 의외의 고수들이 있습니다. 일전엔 삼황맹의 비르잔이란 고수를 만났는데 청성의 소도장과 아미의 무정선자가 협공을 해도 쉽게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런 자가 여럿이라면 이쪽에선 고수들이 언제든 힘을 모아 협공할 수 있도록 미리 약속을 정해놓는 게 좋을 겁니다.”
“아! 정말 중요한 걸 지적해주셨군요.”
백리운은 고수들이 집합하는 신호, 그리고 모일 장소까지 새로 정했다.
그렇게 연습이 거듭될수록 움직임은 점점 노련해져서 사흘째가 되자 백만대군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다.
원래부터 개개인의 무공이 강한 무림인들인데 군대처럼 대형을 갖추고 싸우는 훈련까지 더해져서 생긴 자신감이었다.
기수는 기분이 좋았다.
자기가 뭔가 도움이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탁지연에게 진법의 기본을 배워둔 덕분에 스타크래프트의 개념을 이곳 스타일의 용어로 풀어서 얘기할 수 있었다는 점도 좋았다.
이동하는 벙커와 마린의 조합이 실전에서 과연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였지만 적어도 제갈세가가 계획한 대로 호락호락 무너지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깃발로 겁을 주던 적이 마침내 그 실체를 드러냈다.
기수와 백리운은 야습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적은 이른 아침 시간을 택해 장원 앞에 전체 병력을 집결시켰다.
담 위에 올라가 보니 새까맣게 밀집된 적이 무슨 검은 판자처럼 땅 위를 미끄러져 다가오고 있었다.
기수는 무공에 자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광경에 겁이 났다.
좌우를 둘러보니 다들 표정이 비슷했다.
역시 숫자가 주는 위압감은 엄청난 것이었다.
제갈세가가 총공격 시간을 아침으로 잡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기수가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연습한 대로만 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백리운도 주변을 독려했다.
“숫자가 많아봤자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이길 것입니다!”
상당히 먼 거리였지만 마침내 적의 선두가 장원의 담 앞에 이르렀다.
그들은 들고 온 사다리나 널판지를 걸기도 하고 밧줄도 던졌다. 그리고 무공을 익힌 자들은 도약해서 넘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백리세가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미리 준비한 창, 봉, 장대와 화살, 암기 등으로 담을 지켰다.
삼황맹과 녹림72채 연합군은 계속 피해자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월담을 시도했다.
그들의 지휘관들이 계속 외쳐 댔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적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상황은 그들의 말대로 전개되었다.
정도 무림인들이 백리세가의 담 모든 영역을 빙 둘러서 지키지는 못했다.
빈틈을 찾아 담을 넘는 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전각 위로 붉은 기가 올라갔다.
정도 무림인들은 즉시 연습한 위치로 이동했다.
“적이 도망친다!”
“이 싸움은 우리가 이겼다!”
함성을 지르며 기세 좋게 담을 넘은 삼황맹과 녹림72채 병력은 뜻밖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담은 넘었지만 더 이상 진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길목마다 적이 완강한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뚫기는 담을 넘기보다 훨씬 어려웠다.
담을 넘을 때보다 피해가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휘관들은 길목이 아닌 주변의 건물을 넘어 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그 뒤엔 정도 무림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담 위에 올라 전황을 지켜보던 제갈민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의외의 상황이군.”
옆에서 제갈빈이 말을 받았다.
“그러게 말야. 미리 준비를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해.”
제갈민이 검지로 장원 중심에 자리 잡은 전각을 가리켰다.
“저길 봐! 저기서 전체 움직임을 지휘하고 있어.”
“백리운이 이 정도로 주도면밀한 인물일 줄은 몰랐는걸.”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제갈빈이 말했다.
“우리 쪽 고수들조차도 전혀 진격로를 뚫지 못하고 있어.”
제갈민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대로 가면 설령 이긴다 해도 우리 쪽 피해가 너무 커.”
“형. 그러면….”
“그래. 그걸 쓸 수밖에 없겠어.”
그가 손에 쥔 부채를 펼치자 담 위로 제갈세가 무사 10여명이 올라섰다.
제갈민은 그들에게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부터 뚫는다.”
“예! 알겠습니다.”
제갈세가 무사들은 그가 가리킨 지점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잠시 후.
꽝!…….
꽈르릉!……….
천지를 진동하는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화염이 피어올랐다.
기수는 깜짝 놀라 그쪽으로 달려갔다.
“뭐야! 씨발. LP 가스통이라도 터졌나? 아니면 누가 폭탄이라도 터뜨린 거야?”
후자가 맞았다.
놀랍게도 제갈세가 무사들은 수류탄처럼 생긴 물건을 던졌는데, 그것이 폭음과 화염을 내면서 폭발하고 있었다.
기수는 바짝 쫄아서 걸음을 멈추었다.
자신의 무공이 웬만큼 고수의 경지에 올라서기는 하지만 과연 호신강기가 수류탄의 폭발력을 막아낼 정도인지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제갈세가 이새끼들 장난이 아니네.’
상황은 심각했다.
검진이 무너진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 패닉상태가 정도 무림인들 사이에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기수는 일단 거리를 둔 채 상황을 살펴봤다.
‘중원무림에 수류탄이라니. 이거 완전 반칙 아냐?’
그러나 자세히 보니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정도의 위력은 아닌 것 같았다. 폭죽을 한 군데 몰아넣어서 화염의 크기가 커진 정도의 무기라고 볼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 이런 무기가 등장한 것은 심각했다.
그동안 완강하게 잘 버텨주던 벙커가 박살나고 뻥 뚫린 길로 저글링 패거리가 무한질주 할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폐해는 곧바로 드러났다.
검진이 무력화된 쪽 길이 열리면서 이제껏 잘 운용되던 방어 진형의 다른 부분에까지 악영향이 미쳤다.
그것은 마치 미드필더와 디펜더 라인을 바짝 끌어올려 촘촘하게 잘 운용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기유닛이 나타나서 침투패스 한 방을 찔러 넣은 것과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위기감을 느낀 기수는 자기 숙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백리운이 그를 발견하고 잡았다.
“양소협! 어디 가십니까?”
기수가 보니까 백리운은 겁에 질리고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제갈세가의 수류탄 공격에 넋이 빠져 버린 것이다.
“좀 가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기수가 대답하자 백리운이 양손으로 기수의 손을 움켜쥐며 애원조로 말했다.
“양소협마저 저희들을 버리시면 어떻게 합니까?”
기수는 자기가 도망치는 거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백리운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어 잡으며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저는 백리세가를 버리는 게 아닙니다. 기수를 데려오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기수를요? 그가 지금 여기 와 있습니까?”
“장원 안은 아니지만 근처 숲에 있을 거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제가 가서 찾아낸 후 이곳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불러오겠습니다.”
“그냥 여기서 큰소리로 부르는 것은 안 될까요?”
양오가 일단 장원 밖으로 나가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기수는 답답했다.
‘이봐요! 아저씨. 이 손을 놔주셔야 기수가 짠! 하고 나타날 수 있단 말입니다.’
기수가 말했다.
“불러서 올 거였으면 벌써 이 싸움에 끼어들었겠지요. 제가 직접 만나서 그를 설득할 것이니 조금만 더 버텨주십시오.”
“하지만 지금 장원 밖으로 나가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입니다. 적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기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대답했다.
“우리 정도 무림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 위험쯤은 감수하겠습니다.”
“아아! 양소협…. 존경스럽습니다.”
기수는 씩 웃었다.
“제가 가서 그를 불러올 때까지 조금만 더 버텨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백리운도 더 이상 기수를 잡지 않았다.
그리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돌아서서 부하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