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53
숙소에 도착한 기수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방으로 들어가서 급히 준비해둔 옷으로 갈아입고 두건까지 썼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얼굴의 역용술을 풀었다.
깜짝 놀랄 만큼 잘생긴 얼굴이 거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떠한 제약도, 불필요한 내공 낭비도 없는 본래의 모습이 역시 가장 좋은 것 같았다.
기수는 거울 속의 핸섬가이에게 손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어 윙크와 함께 한 방 쏴준 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제갈세가 무복을 입은 자들이 수류탄 던지는 현장을 급습했다.
잔백지가 가장 편하지만 백리세가에서 그걸 본 사람이 있기 때문에 선풍비로 바짝 다가가서 한 놈씩 두들겨 팼다.
특별히 분광권의 초식을 쓸 필요도 없었다.
훅도 아닌 스트레이트를 얼굴에 꽂아 넣는 것만으로 상대는 픽! 픽! 쓰러졌다.
“너, 너는 누구냐!”
“누군데 감히 제갈세가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냐!”
갑작스런 고수의 출현에 놀란 제갈세가 무사들이 물었다.
기수는 오랜만에 자신의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후후후….. 난 기수다!”
“기수!”
제갈세가 무사들은 크게 놀랐다. 삼 공자를 죽인 세가의 원수이자, 삼황맹엔 공포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는 강적이 나타난 것이다.
“기수가 나타났다!”
“놈을 죽여라!”
갑자기 수류탄들이 집중적으로 날아왔다.
“헉! 씨발….”
자기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역시 폭탄은 겁이 나는 것이다.
기수는 황급히 선풍비를 시전했는데, 오래지 않아 그다지 겁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우선, 날아오는 수류탄의 속도보다 자신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화살이라고 해도 피할 수 있을 정도인데, 손으로 던져서 날아오는 참외만한 도자기 병 정도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파괴력도 겁먹을 만큼은 아니었다.
깨진 도자기 파편에도 맞아봤지만 따끔한 걸로 끝이었다.
폭음과 화염, 그리고 터지는 인터발에 익숙해진 기수는 날아오는 수류탄을 잡아서 폭발 전에 되던지는 경지에까지 금방 이르게 되었다.
화살이라고 해도(어쩌면 총알도?) 잡아서 되던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기수에게 그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자기네가 던진 폭약이 자기들 얼굴로 날아와 터지자 제갈세가 무사들은 혼비백산했고, 더 이상 기수를 어찌해볼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등을 보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기수는 놓치려 하지 않았다. 특히 수류탄 가방을 둘러맨 놈들은 끝까지 따라가서 정의의 주먹을 먹여주었다.
그렇게 쫓아갔다가 돌아와 보니 상황은 정리되어 있었다.
백리운이 인원을 보충하여 뚫린 자리를 막아놓은 것이다.
“기대협! 저는 백리운이라고 합니다!”
백리운이 기수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기수도 그에게 포권을 했다.
“예. 반갑습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를 위해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양오 형님의 부탁도 있고 해서…..”
“아! 양소협을 만나셨군요.”
“예. 하지만 저는 삼황맹과 제갈세가에 개인적으로 갚아야 할 빚이 있습니다. 제 행동이 혹시 백리세가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방해라니요!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삼황맹은 저희와도 원수이니, 마음껏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그럼 전투가 끝난 뒤에 다시 뵙도록 하지요.”
“예! 조심하십시오.”
기수는 그를 뒤로 하고 근처 건물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높은 곳에서 적의 지휘관을 찾기 위해서였다.
‘분명 제갈빈이 여기 와 있을 거야.’
제갈세가의 놈들은 비록 무공으로는 자기만 못하다고 해도 뭔가 꺼림칙한 게 있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기회가 있을 때 잡아 죽이는 게 좋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안력을 돋우어 찾아봐도 제갈빈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 형제는 기수가 자기네 무사들을 공격하는 시점에 이미 몸을 감춘 상태였다. 부하들을 도와주러 가기보다는 자기 목숨 보전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기수는 결국 제갈빈 찾기를 포기했다.
대신 전황을 내려다보고 가장 많이 밀리는 곳을 찾아가 돕기로 했다.
기수가 가세하면 상황은 금방 호전되었다.
그러면 기수는 곧장 다시 높은 곳으로 올라가 밀리는 곳을 찾는 식으로 이쪽저쪽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가 바쁜 만큼 정도 무림인들의 피해는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처음에 이 의문의 사나이가 누구인지 궁금히 여겼지만, 오래지 않아 정체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모두가 다 기수의 활약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다.
삼황맹과 녹림72채 연합군은 차츰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수적 우세로 몰아붙여 담을 넘을 때까지는 좋았지만, 정도 무림인들의 조직적인 방어 때문에 끝장을 내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가면서 피해가 계속 누적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기수가 돌아다니면서 공격의 맥을 톡! 톡! 끊어놓으니까 도무지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병력의 절반인 삼황맹 측이 ‘마신이 나타났다!’며 움츠러들기까지 하니까 결국은 후퇴명령이 내리게 되었다.
정도 무림인들은 퇴각하는 그들을 쫓아갔다.
그동안 기수가 짠 방어 전략에 따라 탄탄하게 지키면서 시간을 끌었지만 이젠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수도 선두에 서서 놈들을 쫓았다.
녹림도건, 삼황맹이건 닥치는 대로 쓰러트렸지만 그가 특히 노리는 적은 제갈세가 놈들, 특히 제갈빈이었다.
‘분명히 주력부대 근처에 있을 텐데.’
그래야 지휘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놈을 찾던 기수는 ‘제갈’이란 두 글자가 적힌 깃발을 발견했다.
‘후훗! 멍청한 놈들. 자기가 있는 위치를 광고하고 다니다니….’
기수는 그 깃발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갈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제갈빈도 기수를 발견한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검을 뽑아 들었다.
기수는 씩 웃었다.
“네 아버지가 애당초 편을 잘못 골라서 모든 불행이 시작된 거다.”
제갈량의 후손을 자처하는 놈들이 새외 무림인들의 중원 정복에 앞잡이가 되었으니 멸문지화를 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었다.
선풍비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기수는 한 주먹에 제갈빈을 쓰러트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마치 눈앞에 커텐을 치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 경관이 갑자기 바뀌었다.
그리고 제갈빈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허걱!….. 좆됐다!’
기수는 자신이 기문진법 안에 들어왔음을 즉시 알아차렸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벌판이었는데 좌우로 산과 계곡, 그리고 강과 논밭들이 보였다. 눈을 씻고 다시 보니까 어이없게도 그는 강변 모래사장에 서 있었다.
발바닥에 힘을 주어 눌러 보니 흙이 아닌 모래 밟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기수는 일단 차분하게 마음부터 가라앉혔다.
‘진정하자! 진정해. 나는 과학을 공부한 사람이야. 이게 일루전이건, 최면술이건, 레이더 홀로그램이건, 어쨌든 실체가 아니니까 속으면 안 돼!’
기수는 자기가 달려왔던 방향, 그리고 제갈빈이 서 있던 방향을 떠올려보았다.
‘내 몸이 아직 그 방향을 향하고 있으니까 시각에 현혹되지 말고 곧장 직진하자! 그러면 이까짓 속임수에서 금방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기수는 눈에 뭐가 보이건 개의치 않고 전진했다.
순간, 펑! 하는 굉음과 함께 수류탄이 터졌다.
“으윽!……”
기수는 신음을 토했다. 조온나게 아팠다.
내려다보니 옷은 걸레처럼 찢어졌고 드러난 피부 여기저기에도 상처가 나서 피가 흘렀다. 특히 귀에서 찌잉~ 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고 머리카락 탄 냄새도 났다.
“으아아아! 씨발….!”
기수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눈앞에 제갈빈이 보이면 한 주먹에 때려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계속 변하는 황당한 풍경뿐이었다.
어느 쪽으로건 멀리 이동하면 벗어날 수 있을 거라던 생각은 포기해야 했다.
폭약뿐만 아니라 창을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리로 향해 몸을 날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꼼짝없이 갇혔다고 생각하니까 후회가 밀려왔다.
‘아! 왜 미리 조심하지 않았을까? 제갈빈이 수로맹에 찾아와서 진법으로 나를 잡을 거라고 얘기까지 했었잖아. 그런데 진법에 걸려드냐? 이 멍청아!’
그러나 자신을 탓할 수만도 없었다.
장원의 담을 넘고 이삼백 미터도 안 되는 이곳은 적이 진격해 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 것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장원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이런 곳에 함정을 팠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깃발! 맞아. 어느 바보가 자기 위치를 그렇게 알리겠어. 미끼가 아닌 이상….’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자신의 경솔함이 더 부각되었다.
그리고 제갈세가의 주도면밀함에 기분이 나빠졌다.
기수는 가만히 서서 청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적이 화살을 쏘거나 수류탄 던지는 경우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탁지연에게 배운 진법의 기초를 떠올렸다.
살아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존본능 때문인지 어느 때보다 이론이 이해가 잘 됐지만 지식의 한계 때문에 파해법을 찾을 수는 없었다.
배워서 남 주는 게 아닌데 좀 더 배울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처음의 수류탄 폭발 이외의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소협! 제 말이 들리세요?”
“누구십니까?”
“저는 아미파의 무정이라고 합니다.”
“아! 예. 반갑습니다.”
“지금 기소협은 기문진에 갇혀 있습니다. 여기서는 생문이 보이는데 빠져나오실 수 있도록 도와드릴까요?”
두 말하면 잔소리지!
“그렇게 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무정선자는 방위를 불러주었다.
기수는 그녀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였다. 그나마 탁지연에게 기초를 배운 게 도움이 되어서 낯선 용어를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원래의 풍경, 그리고 아미파 제자들이 보였다.
기수는 무정선자에게 포권을 했다.
“기수라고 합니다. 도와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기소협이 저희들을 도와주신 것에 비하면 작은 일에 불과한 걸요.”
“하핫! 겸손하시군요.”
“아뇨. 이건 아마 제갈세가에서 만든 진법 같은데, 기문진의 일부가 무너져서 파해법이 쉽게 드러나 보였어요. 진이 온전했다면 이렇게 쉽게 파해하진 못했을 거예요.”
“아! 그랬군요.”
제갈세가에서 급히 도망치기 위해 수류탄 하나를 던져놓고 갔는데 그게 기수는 죽이지 못하고 진법의 구성 요소를 망가뜨려서 그나마 파해가 가능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아미파에 은혜를 입었군요.”
기수는 다른 제자들을 향해서도 감사의 표시로 포권을 했다.
그리고 살짝 미소도 날려주었다.
그러자 아미파 여제자들의 눈이 단체로 하트 모양으로 변했다.
폭발의 순간 급히 가렸기 때문에 기수의 얼굴엔 아무 상처도 없었다.
반면 가장 피해가 심했던 가슴 부위는 옷이 걸레가 되서 탄탄한 근육이 가슴 절반 이상 드러나 있었다.
미남형 얼굴에 야수 같은 상체 조합이 꽤 섹시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그냥 명성만으로도 선망의 대상인데 자신들을 향해 미소를 보이기까지 했으니 그녀들이 볼을 붉히며 몸을 비트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딱 한 명은 그러지 않길 바랬는데, 아쉽게도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송란. 그녀는 심지어 기수에게 추파까지 던지고 있었다.
기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 양오 형님.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건 내 잘못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형님이라고 하는 거나, 자기가 자기한테 질투를 느끼는 거나 몹시 이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웃겼다.
무정선자가 물었다.
“기소협. 적을 추격하는데 저희들과 함께 가시지요.”
아미파 제자들 모두 ‘플리즈~’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합니다. 저는 다른 급한 일이 있습니다.”
“아!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여제자들의 단체 한숨 소리가 들렸다.
기수는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인사를 한 후 장원으로 돌아갔다.
제갈세가 추격은 포기하기로 했다. 지금의 진법지식 가지고는 또 무슨 함정에 빠질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 있어 급한 볼일 우선순위는 수로맹으로 바뀌었다.
백리세가는 이제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니 자기가 더 이상 돕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반대로 수로맹 27채는 제갈세가의 전략에 따라 지금쯤 상륙해서 장원으로 진격해오는 중일 텐데 빨리 가서 돌봐줘야 했다.
기수는 자기 방에서 다시 옷을 갈아입고 이번엔 범장의 얼굴로 바꾼 후 경공술을 시전하여 장원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 오늘 진짜 바쁘네…’
강을 향해 달린 지 1분도 안 되어 기수는 일대 혼전이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예상대로 수로맹의 26, 27, 28채 병력이 상륙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동참한 것이었다.
강변을 온통 메울 정도로 많은 병력.
그러나 상황은 그다지 유리해 보이지 않았다.
적의 대규모 공격을 물리친 백리세가 측은 사기가 바짝 올라 있는데 반해 뭍으로 올라온 수로맹 병력은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갈빈이 제시한 전략대로라면 자기네들은 장원이 점령되는 동안 밖으로 도망쳐 나오는 백리세가의 패잔병들이나 처리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도 당황하게 만드는 이유였다.
기수는 백리세가 무사들 사이를 파고들며 외쳤다.
“수로맹 채주 범장이 여기 있다! 자신 있는 놈은 다 덤벼라!”
그러자 백리세가 무사들이 즉시 그를 에워쌌다.
“수로맹 채주다!”
“범장이다! 우리 동료를 죽인 원수다!”
“절대로 놓치지 마라!”
기수는 그들과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이제껏 함께 하던 동지와 적이 되어 싸운다는 게 좀 아이러니이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기수는 수로맹 편을 들어야 했다.
그의 지상목표는 수로맹주를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손속에 정을 둬서 죽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