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54
기수의 가세로 전황이 바뀌었다.
고수 한 명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이미 백리세가 장원 전투에서 증명했지만 이곳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러모로 능력을 제한한 범장이라는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기수가 백리세가 조직을 훤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 벙커 플러스 마린 제안을 한 게 바로 기수였다.
그 후 세부사항은 백리세가에서 정했지만 애당초 컨셉의 주창자이기 때문에 기수는 백리세가 조직의 맥점을 알았다.
즉 어디로 가서 누구를 공격하면 명령체계가 무너지는지 정확히 알았다.
기수가 그렇게 포인트만 콕콕 찝어서 공격하자 백리세가의 체계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같은 11명이 뛰어도 군대 축구는 포메이션 없이 공이 가는 쪽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는데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군대축구 수준의 오합지졸이 되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챌린지 리그 수준은 되던 포메이션이 조기축구 수준으로 다운그레이드 되었다.
그러자 수로맹 측의 숫자가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기수는 그 와중에 27채 부하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탁지연, 육대기 등과 우선 눈인사만 나눈 후 외쳤다.
“모두 나를 따르라!”
“채주님이다!”
“와아! 채주님이 돌아오셨다!”
27채가 선두로 나서며 기세를 올리자 26채와 28채도 덩달아 기가 살았다.
반대로 백리세가는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파악하고 후퇴를 선택했다.
강변처럼 넓게 펼쳐진 개활지보다는 장원으로 돌아가 건물과 담을 이용해서 싸우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들이 물러나자 기수는 추격을 중지시켰다.
따라가서 싸워봤자 피해만 늘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막붕비와 갈태독이 가까이 왔다.
그들은 곧바로 기수를 추궁했다.
“어디에 가 있다가 이제 나타난 것이오!”
“아! 그러니까…. 그게….”
갈태독이 한 마디 했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 단독행동이라니!”
기수는 탁지연과 육대기가 대충 둘러댔을 거라 생각하고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갈 길에 적이 함정이나 기문진을 설치해놓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고 혼자서 먼저 왔던 것입니다.”
막붕비가 말했다.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시오.”
“명심하겠습니다.”
군사작전에서 지휘관이 자리를 비운 것은 말도 안 되는 행동이지만 기수가 복귀하면서 열세이던 전황이 한 순간에 회복되었기 때문에 더 문책하는 것도 이상했다.
“자! 이제 놈들의 장원을 치러 갑시다!”
기수는 그들을 제지했다.
“안 됩니다! 삼황맹과 녹림72채는 이미 도망치고 있습니다. 우리만 갔다가는 오히려 포위되어 전멸당할 겁니다.”
막붕비와 갈태독은 깜짝 놀랐다.
“삼황맹이 도망친다고 했소?”
“예.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왔습니다.”
막붕비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갈태독이 버럭 화를 냈다.
“제갈빈은 모든 게 다 잘 될 것처럼 장담하더니 이게 무슨 꼴인까?”
기수가 슬쩍 끼어들어 한 마디 거들었다.
“제갈세가가 아무래도 명성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소.”
막붕비가 장원 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면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인가.”
기수가 대답했다.
“저들이 되돌아오기 전에 우리는 승전을 선언하고 슬쩍 빠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승전? 무슨 수로 승전을 선언한단 말이오?”
막붕비와 갈태독이 동시에 기수를 주시했다.
기수는 씩 웃은 후 말했다.
“지금부터 강변을 돌면서 매어져 있는 배를 전부 노획해 가는 겁니다. 삼황맹과 녹림72채는 도망쳤지만 우리는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가면 승전에 해당하지 않겠습니까?”
“호오! 과연 그렇소.”
“그리고 배를 몽땅 가져가면 백리세가가 장원에 병력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 수로맹을 귀찮게 할 방법이 없어지게 됩니다.”
“하하! 그거 진짜 좋은 계책이요.”
막붕비와 갈태독은 즉각 기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강변을 샅샅이 뒤져 배란 배는 전부 다 끌어가지고 철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백리세가 병력이 삼황맹과 녹림72채 추격전을 그치고 돌아왔을 때 강변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강 위에서, 수로맹은 승전축하연을 벌였다.
삼황맹과 녹림72채가 대패했다는 첩보가 들어왔지만, 아무리 동맹을 맺었다고 해도 그들은 그들이고 수로맹은 수로맹이었다.
수십 척의 배가 추가로 생긴 것을 축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새벽까지 연회에 참석했다가 자기 배로 돌아온 기수는 선실에 단둘만 남게 되자 곧바로 탁지연을 안고 서로 본래의 얼굴로 돌아온 후 입맞춤을 나누었다.
“아! 기소협 걱정 많이 했어요.”
“보고 싶었어. 지연.”
“어머! 머리카락이 탔네요? 어쩌다 이렇게 됐어요?”
“응. 바로 앞에서 폭탄이 터졌어.”
“폭탄이요?”
“제갈세가에서 이상한 물건을 만들었더라고. 요만한 작은 항아리에 화약을 넣고 불 붙여 던지는 무기였는데 그것 때문에 큰일날 뻔 했지.”
탁지연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화약? 끔찍하군요… 몸은 괜찮으세요?”
“괜찮아. 아무 이상 없어. 그런데 몸은 괜찮냐고 물으면서 왜 눈으로는 거기만 봐?”
“예? 제, 제가요?”
“응. 내 몸 중에서 거기만 중요한 건가?”
“호호! 그럴 리가 있나요. 기소협 존재 자체가 다 소중하죠.”
“그렇게 말하면서 지금도 시선을 못 떼네?”
“아,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확인해 봐. 폭발에도 무사한지.”
탁지연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기수와 바지와 속옷을 벗겨 내렸다.
그리고 탄성을 토했다.
“아!….. 다행히 아무 이상 없네요.”
“후후…. 도자기 폭탄 정도로는 내 호신강기를 뚫을 수 없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탁지연은 손으로 잡고 왼쪽도 살펴보고, 오른쪽도 살펴보고, 위도 보고, 아래도 보고, 골고루, 자세히 육안검사를 한 후 말했다.
“혹시 기능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도 확인해봐야겠어요.”
“기능이야 당연히…. 으음…. 오우!…. 와우!….”
기수와 탁지연은 폭발 후유증에 대한 검사를 밤새도록 반복해서 했다.
검사소견은 물론 정상이었다.
다음날은 오전에 채주 3인방 회의가 열렸다.
노획한 배를 어떻게 나누느냐 하는 간단한 내용이라 일찍 끝내고 하루 종일 시간이 남았다.
기수는 탁지연과 단둘이 선실에 들어갔다.
“정도 무림인들을 위기에서 구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참 잘하셨어요.”
“참 잘했으면 뭔가 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당연하죠. 제가 상을 드릴게요.”
탁지연은 생글생글 웃으며 옷자락을 풀었다.
기수는 오후 내내 상을 받았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비로소 옷을 입고 밥을 먹는데 육대기가 급보를 알려왔다.
“채주님. 내일 맹주님이 여기로 오신답니다.”
기수는 뛸 듯이 기뻤다.
“그게 정말이냐?”
“예. 방금 전령이 와서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마 이번 전쟁의 평가를 위해 오시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직접 오시는 걸로 봐서 아마 채주님을 정식 채주로 임명하실 것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하하….”
기수는 축하받을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수로맹과 백리세가 사이를 오가며 온갖 고생을 다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어서오너라! 수로맹주. 내일이 네 제삿날이다. 후후…’
기수는 탁지연에게 선실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밤새도록 운기조식으로 결전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자정 무렵에 탁지연이 문을 한 번 두드렸다.
“채주님. 선실에 뭐 놔두고 온 게 있는데 잠깐만 열어주세요. 금방이면 되요. 그것만 가지고 곧장 나갈게요.‘
그러나 기수는 속지 않았다.
그렇게 꼬박 밤을 새워 내공을 조절한 기수는 맑은 정신으로 수로맹주 맞을 준비를 했다. 막붕비와 갈태독도 자리를 함께했다.
그들이 기수에게 말했다.
“너무 긴장할 것 없어. 맹주님도 알고 보면 좋은 분이니까.”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 본인들이 긴장한 기색이었다.
기수가 대답했다.
“예.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그가 다소 경직되어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강적과의 대결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막붕비와 갈태독까지 가세하는 상황도 생각해야 했다.
초조하게 기다린지 한참이 지나 오전 11시쯤이 되자 배 서너 척이 빠르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수로맹주였다.
배와 배가 닿고 널빤지가 걸쳐지자 그가 건너왔다.
나이는 40대 초반. 키 170 정도에 약간은 왜소해 보이는 체격이었다.
기수는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처음엔 무슨 뱀파이어 분장을 했나 싶었다.
그러나 화장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파랗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창백한 낯빛에 눈 아래만 다크써클이 시커멓게 끼어 있었고, 놀랍게도 눈동자 색깔이 붉었다.
‘와! 인상 존나 섬찟하네.’
수로맹주의 보라색 입술이 열렸다.
“자네가 범장인가?”
목소리는 인상과 달리 완전 부드럽고 온화했다.
“예. 그렇습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기수는 일단 그에게 군례를 했다.
막붕비와 갈태독 없이 단둘만 있는 찬스를 노리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반갑네. 보고서에 보니 정말 대단한 일을 했더군.”
웃으며 칭찬을 하는데 그 느낌이 몹시 다정다감했다.
막붕비와 갈태독이 왜 ‘알고 보면 좋은 분’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첫 인상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봤자 넌 내 손에 죽을 거야.’
수로맹주는 손을 뻗어 기수의 손을 잡았다.
악수 비슷했는데, 순간 기수는 그의 내력이 파고드는 것을 느끼고 급히 내공을 끌어 올려 방어를 했다.
그러나 다른 생각도 들었다.
‘혹시 지금 내 내공을 시험하는 건가?’
그렇다면 실력을 전부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처음에 얼마간 버티는 척 하다가 슬며시 허물어지면서 고통스런 신음을 토했다.
“으으……!”
그리고 견디지 못하는 척 손을 빼내면서 휘청거렸다.
수로맹주가 입술을 비틀며 씩 웃었다.
기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몰라 은근히 긴장하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어차하면 3:1이라도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수로맹주는 기수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의외로 내공이 탄탄하군. 이 정도면 우리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군.”
막붕비와 갈태독이 덩달아 기쁜 표정을 지었다.
수로맹주가 다시 말했다.
“자네를 수로맹 27채의 채주로 정식 임명하겠네.”
기수는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채주 자리를 줘서라기보다 자기를 믿어줘서 고마웠다.
“즉위식을 거행하도록 하지.”
수로맹주의 명이 떨어지자 즉시 준비가 진행되었다.
배 위에 큰 상을 차리고 수적들 모두가 주변에 모여들어 지켜보는 가운데 의식이 치러졌다. 천지신명께 맹세하고, 수로맹주가 27채 채주임을 선포하고, 막붕비가 갈태독이 증인이 되어 함께 서약을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기수는 자기가 진짜 수로맹 채주가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말로만 하는 것과 의식을 거치는 것은 차이가 큰 것 같았다.
그 뒤엔 대대적인 축하 연회가 이어졌다.
기수는 축하주를 마시면서 좀 취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긴장이 다 풀렸는데,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왜 수로맹주를 봐도 두근거리지 않는 거지?’
맨 처음 구화산에서 천외존자를 만났을 때, 그리고 나중에 홍안산에서 티무르와 마주섰을 때, 분명 가슴을 흔드는 두근거림이 있었다.
단순히 강적과 마주섰기 때문에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것과는 달랐다.
뭔가 다른, 이질적인 두근거림이었다.
그런데 지금 수로맹주에게선 그게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엔 긴장해서 그런 줄로 알았는데,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더구나 술에 기분 좋게 취해서 긴장이 다 풀렸는데도 아무렇지 않았다.
‘생긴 건 분명 몬스터급인데….’
창백한 피부도 그렇지만 토끼처럼 빨간 눈을 가진 것을 보면 뭔가 기이한 무공을 익힌 게 분명했다. 콘택트렌즈를 낀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의 외모나 무공과는 상관없이 자기가 찾는 존재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놈이 진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확인하지?’
기수는 마음속으로 신(?)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이봐! 평소엔 절대 대답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딱 한 마디만 해 줘. 이놈 맞아? 예스야? 노야? 딱 한 마디만 해 봐.]
그러나 아쉽게도 대답이 없었다.
술자리가 한창일 때 수로맹주가 기수에게 말했다.
“27채주. 잠시만 단둘이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네, 나를 따라오게.”
“예. 알겠습니다.”
기수는 그를 따라 나섰다.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온몸의 신경이 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