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58
유청기는 막붕비와 갈태독에게 말했다.
“제가 적 진영을 정찰하고 온 뒤엔 곧바로 출정하자고 할 수도 있으니, 병력을 준비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몹시 공손한 태도였다.
자기한테 필요하게 되니까 돌변하는 모습이 가증스러웠지만, 막붕비와 갈태독은 그나마 이제라도 군사가 제대로 처신하는 게 반가웠다.
“만반의 준비를 해놓을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시오.”
그렇게 유청기와 기수는 환영연회 중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쪽배를 탔다.
기수가 배를 저어 강 북쪽으로 다가가자 유청기가 말했다.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내가 당신을 들고 경공을 시전하겠소.”
그럴 경우에 대비해서 단둘만 오자는데 쉽게 응낙한 것이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기수에겐 비록 범장 캐릭터라고 해도 자존심 문제였다.
배에서 내린 기수는 그렇다고 해서 본래 실력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적당한 수준의 경공술로 유청기를 안내했다.
그가 거침없이 나아가면서도 경비초소를 모두 피해가자 유청기가 말했다.
“범채주는 여기 자주 와 본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길을 다 외울 정도지요.”
“대단하십니다. 우리 수로맹을 위해 그토록 노력을 아끼지 않으시다니.”
“하하! 제가 할 일을 할 뿐인데요 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렇게 백리세가 장원까지 도착한 두 사람은 담 가까이에 높이 자란 나무 위로 은밀하게 올라가 장원을 내려다봤다.
유청기는 의외로 신중한 성격이었다. 장원의 구조와 인원 배치 등을 꼼꼼히 보고 외우느라 정신을 집중했다.
기수에겐 노마크 찬스였다. 나란히 서있기는 하지만 가지의 각도가 달라서 유청기는 기수 쪽으로 등을 무방비로 드러내고 있었다.
기수는 검지를 들어 올렸다.
‘이걸 한 방 쏘기만 하면…..’
거리가 가까우니까 토끼보다 훨씬 깨끗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기수는 망설였다. 왠지 모르지만 선뜻 파천강기가 나가지 않았다.
옛날 서부영화를 보면 등에 총 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내가 카우보이는 아니지만 이런 식은 좀 아니잖아?’
당당하게 얼굴을 마주보고 맞짱 떠서 쓰러트리고 싶었다.
상대가 강하다는 사실은 이미 감 잡고 있는 상태.
테스토스테론의 작용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동시에 겁도 났다. 어쩌면 자기가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생각 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서부 개척시대에 총 맞고 죽은 사람 대부분이 등에 맞았다더라.’
현실과 영화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들 선조가 그런 비겁한 짓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아니까 영화에서라도 대리만족 해보려고 그렇게 찍은 거겠지.
기수도 쉬운 길 놔두고 일부러 고생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진기가 검지에 모였다.
‘쏜다! 넌 이제 죽었어!’
그러나 기수는 차마 그걸 쏠 수가 없었다.
자기가 비록 바른생활 사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겁자도 아니었다.
결국 기수는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내쉬고 손을 내렸다.
유청기가 돌아보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조용히 하셔야지요.”
“야. 너 나 좀 따라와 봐.”
“따라오라니요? 어디를요?”
“닥치고 따라와. 이 새끼야.”
그리고는 먼저 경공을 시전하여 산으로 올라갔다.
유청기는 기수의 갑자기 달라진 말투에 분노한 표정으로 따라왔다.
인적이 없는 공터에서 기다리던 기수는 유청기가 도착하자 말했다.
“너. 나한테 좀 맞아야겠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범채주.”
“어쩌면 죽을 지도 몰라. 그러니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는 곧바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 강렬한 기도에 유청기는 깜짝 놀랐다.
“이, 이게 뭐 하자는 짓이냐?”
“얘기했잖아. 널 죽이겠다고. 두 번 기회를 주지는 않을 거니까 너도 즉시 내공 끌어올리고 준비하는 게 좋을 거다.”
유청기는 황급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기수에게 말했다.
“그래. 어쩐지 네놈이 좀 수상하다 했어. 그런데 이제 확신이 드는군. 살인 방화나 저지르고 다닐 수준의 무공이 아냐. 무슨 목적으로 우리 맹에 잠입했느냐?”
“널 죽이려고.”
“뭐라고? 흐흐흐…. 헛소리 말고 사실을 말해라.”
“아! 진실을 얘기해도 믿어주지 않는 세상이라니…”
기수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생각하고 곧장 몸을 날려 유청기를 공격했다.
우선 간을 보자는 생각으로 평범한 정권찌르기에 파천강기를 실어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청기는 방어를 하지 않았다.
퍽! 소리와 함께 파천강기가 상대의 가슴에 적중한 순간.
“으음….!”
기수는 신음과 함께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무슨 쇳덩어리를 때린 것처럼 주먹과 손목이 아팠다.
“크하하하!…… 이거 웃기는 놈이구나. 감히 내게 파천강기를 써먹어?”
기수는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기감으로 상대의 몸을 둘러싼 강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상대도 자기와 같은 강기를 운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즈가 달랐다.
길이 2~3미터짜리 창 같은 강기들이 수십 개나 뻗어 나와서 마치 성게 같았다.
그리고 그 강기들이 서로 합쳐져서 갑자기 5~6미터 짜리로 변하기도 했다.
‘내가 저길 때린 건가?’
몸에 구멍 나지 않은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고 다시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유청기가 말했다.
“적어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다 익히다니. 제법 자질이 뛰어난 놈이구나. 하지만 나한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하하하!…”
기수는 그냥 뒤통수를 뚫어주지 않은 걸 후회했다.
“이걸 네가 만든 거냐?”
“그렇다. 동생과 함께 만들었지. 그리고 진짜 위력은 바로 이것이다.”
순간 그가 기수를 향해 돌진해 왔다.
기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파천강기의 위력은 누구보다도 자기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고슴도치 같은 강기 덩어리를 무엇으로도 섣불리 막을 수 없었다.
그는 황급히 몸을 날려 나무 위로 올라갔다.
“하하하!….. 네놈이 나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유청기는 즉시 진행방향을 바꾸어 기수를 따라왔다.
“저리 가! 씨발….”
기수는 선풍비로 달아나려 했지만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유청기가 강기를 합쳐서 갑자기 길이를 늘이는 바람에 허벅지를 찔린 것이다.
“크윽….!”
기수는 나무에서 떨어졌다. 겨우 착지는 했지만 허벅지에서 극심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내려다보니 옷이 찢어져 있었고 피가 흥건했다.
유청기가 따라 내려와 그걸 보고 말했다.
“정통으로 맞고도 뚫리지 않은 걸 보면 네놈 무공이 진짜 고강하구나. 정체가 점점 더 궁금해지는걸?”
그가 다가오자 기수는 손을 내저었다.
“잠깐! 타임… 야! 이거 너무 치사하잖아. 강기를 그렇게 갑옷처럼 두르고 있으면 도대체 어떻게 싸우라는 거야?”
“하하! 내가 싸우는 방법까지 알려줘야 하나?”
기수는 아직 잔백지에 실어 날리는 파천강기는 상대에게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그것마저 안 통하면 진짜 희망이 없기 때문에 비장의 무기로 일단 숨기는 것이었다.
공격을 성공시킨 후 유청기의 태도가 약간 교만하게 바뀌었기 때문에 기수는 말을 걸어 통증 가라앉힐 시간을 벌기로 했다.
“내가 배운 것에는 도대체 무슨 제약을 건 거지?”
“진기의 경로를 약간 바꾸었을 뿐 제약은 없다.”
“같은 거라고?”
“그렇다. 형태만 다를 뿐이다. 치사하게 제약 같은 것 넣지 않았다.”
“그래도 치사하다!”
“창을 들고 싸우는 사람도 있고 칼을 들고 싸우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무기의 종류를 선택하지 못한다고 해서 치사하다고 할 것까진 없지. 후후후….”
기수는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형태만 다르고 본질은 같다고 했나?”
“그렇다.”
“그럼 둘이 부딪히면 강한 쪽이 이기겠군.”
“그야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칼과 칼이, 쇠와 쇠가 맞부딪히면 더 단단한 쪽이 남고, 약한 쪽은 부러지는 거지. 흐흐흐….”
기수는 씩 웃었다.
“고마워. 이길 방법을 가르쳐줘서.”
유청기는 피식 웃었다.
“미친 놈. 무슨 헛소리냐? 네가 날 이긴다고?”
“그래. 이런 스타일의 상대는 처음이라 좀 당황했는데, 바로 그게 문제였어. 그냥 본질에 충실하면 되는데 말야. 단단한 쇠가 이긴다!”
기수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형태만 다를 뿐 본질은 같은 파천강기. 상대보다 단단해지려면 방법은 하나.
자신의 내공을 최대한 동원해야 했다. 역용술로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유청기는 기수의 달라진 모습에 크게 놀랐다.
“너, 너는 누구냐?”
“하하! 말까지 더듬을 건 없잖아? 소개를 새로 하기로 하지. 난 기수다.”
“네, 네가 기수라고!”
“그래. 너희 12명을 모두 지옥으로 보내줄 저승사자다.”
유청기는 기수를 노려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우리 12사도가 그리 쉽게 당할 것 같으냐?”
“12사도? 흐음…. 그런 이름이었군. 뭘 추종하는 사도냐? 혹시 사이비종교냐?”
유청기는 거기에 대해선 대답하지 않았다.
“흐흐흐… 먼저 간 두 형제의 원한은 내 손으로 갚아주마.”
갑자기 유청기를 둘러싼 성게 가시들이 부쩍 자라나는 느낌이 들었다.
기수의 정체를 알게 되자 긴장해서 풀 파워를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기수도 방심할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을 줘서 허벅지 상태를 체크한 후 내공을 한도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열 손가락 끝에 정신을 집중했다.
유청기는 기수를 노려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간격을 좁혀왔다.
무림인들이 습관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거리.
그 거리에서 갑자기 파천강기의 가시를 뻗어서 카멜레온이 먹이 사냥하듯 눈 깜빡할 사이에 승부를 결정짓는 게 그의 장기였다.
기수는 상대의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다. 바로 직전에 그 수법에 당해서 허벅지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가까이 와라.’
그러면서도 상대의 접근을 허용하는 것은 자신의 손가락 발칸포 역시 거리가 가까울수록 관통력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기수는 상대의 눈을 봤다.
그리고 한 순간, 유청기의 파천강기가 합쳐지기 직전에 그의 열 손가락이 일제히 강기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파팟!……..
강기와 강기의 격돌!
유청기의 강기가 기수의 목을 찔러 왔지만 그 자신의 몸이 수십 발의 날아오는 강기에 맞아 뒤로 밀려나는 바람에 기수의 목을 꿰뚫지는 못했다.
하지만 목에 압박이 가해지는 순간까지는 맞이했었기 때문에 기수로서도 등골이 서늘한 경험이었다.
간격이 10여 미터로 벌어지자 기수는 공격을 멈추었다.
유청기는 머리가 흐트러지고 옷이 여기저기 찢어진 낭패한 몰골로 물었다.
“이, 이게 무슨 수법이냐?”
“후후…..네가 아까 그랬잖아. 본질은 같은 거라고. 네가 창을 만드는데 내가 화살을 만들지 못할 이유가 뭐야?”
“으으….. 이럴 수가.”
“화살은 창보다 사거리가 길지. 아마…”
순간 다섯 개의 강기가 날아가 유청기의 얼굴을 때렸다.
퍼퍼퍼퍼퍽!……
유청기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가 돌아왔다.
기수는 한방 먹인 게 기분 좋아서 통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네가 만든 무공에 당한 기분이 어떠냐?”
“흥! 제법이긴 하다만 어쨌거나 내겐 통하지 않는다.”
기수의 표정이 굳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분명 공격을 멋지게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상대의 몸을 뚫지는 못한 것이다.
‘역시 카피는 오리지널을 이길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손가락 발칸포가 통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너무나 끔찍하기 때문이었다.
기수는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다시 한 번 혼신의 힘을 다해 파천강기를 날렸다.
파파파파팍!…….
진짜 발칸포처럼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유청기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비록 그의 몸이 서너 걸음 뒤로 밀려나긴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옷만 몇 군데 찢어졌을 뿐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
“후후후!…. 어리석은 놈. 안 되는 걸 계속 시도하다니…”
“헉…. 헉….”
기수는 자신의 호흡이 가빠졌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젠장! 진기 소모가 너무 심했구나.’
최고의 무기가 상대를 뚫지 못하는데다가 이제는 그 실탄마저 간당간당한다는 사실에 절망감이 밀려왔다.
유청기가 여유 있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놈을 죽이기 전에 한 가지 묻겠다. 넌 누구의 명령을 받고 있느냐?”
“그런 거 없다.”
“거짓말 마라. 우리를 죽이라고 사주한 자가 누구냐? 말해라!”
“씨발…. 나도 그걸 알고 싶다!”
정말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중원무림으로 이동해 와서 이런 죽을 고생을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속 시원히 알고 싶었다.
‘아! 내 삶이 여기서 이런 식으로 끝나야 하는 건가?’
억울하고 원통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여기 온 게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집에서 그냥 알바나 하고 살았다면 길에서 보는 아가씨들의 짧은 치마 아래 다리를 곁눈질하면서 괜히 안 보는 척, 스마트폰 들여다보는 척 하는 게 다였을 테지만, 여기선 연예인 뺨치는 미녀들을 정말 원 없이 눕혀보았다.
눕히기만 했나? 그런 것도 해보고, 요효효횻! 그렇게도 해보고, 그것도 해보고….
기수의 표정이 갑자기 멍해지고 눈빛이 초점을 잃자 유청기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네놈의 사문이라도 밝혀라! 고문당하기 싫으면…”
기수는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앞에 강적이 있는데 섹슈얼 회상에 빠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뭔가를 깨달았다.
기수는 씩 웃으며 이소룡처럼 깡총깡총 뛰기 시작했다.
“아뵤~! 자! 이제 다시 시작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