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6
기수는 상춘관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갔다.
물을 긷거나 짐을 나르면서 수없이 오르내리던 계단인데 사람이 바뀌고 나니까 그 계단도 다르게 보였다.
참배객, 환자들과 섞여 위로 올라가던 기수는 제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어! 기수다!”
“배짱도 좋군. 제 발로 여길 찾아오다니.”
제자들은 서로 연락을 한 후 우르르 몰려나와서 기수를 에워쌌다.
“여어! 다들 오랜만이네.”
기수는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들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그를 본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는 장헌으로 정두원에 이은 사부의 두 번째 제자였다.
장헌은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기수를 노려봤다.
“드디어 사부님을 해친 놈을 잡았구나.”
기수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옛날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상대가 장헌이건 정두원이건 쫄 이유가 없었다.
“장사형. 사부님의 원수를 갚고 싶습니까?”
“당연하지.”
“그렇다면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네가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이냐?”
“나는 사부님이 돌아가시던 순간 옆에 있었습니다.”
“그야 당연하겠지.”
기수는 그들이 사모와 정두원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답답한 일이지만 일단 오해를 풀 필요가 있었다.
“그날 사부를 찌른 건 대사형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웅성거렸다.
장헌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 우리더러 그 얘기를 믿으란 말이냐?”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내가 정말로 사부님을 해쳤다면 이렇게 내 발로 찾아올 리가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더 큰 소리로 웅성거렸다.
장헌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문주님이 그러셨을 리가 없다. 네가 말을 꾸며대는 게 틀림없어.”
“문주님?”
“그렇다. 대사형이 그날부로 새 문주님이 되셨다.”
기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사모님은?”
“상복을 입고 전 문주님의 빈소를 지키고 있다.”
“흥! 그 두 년놈이 붙어먹다가 저지른 살인인데 기어이 문주 자리까지 꿰찼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군.”
장헌이 호통을 쳤다.
“무슨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얘들아! 이놈을 묶어라!”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자 기수는 고함을 질렀다.
“이 멍청한 놈들아! 적어도 진실을 알려는 시도는 해봐야 할 것 아냐!”
기수의 고함이 어찌나 큰지 앞장서서 달려들던 제자들은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였다.
장헌의 표정이 변했다.
기수가 어딘가 달라졌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제자들이 다치지 않도록 자신이 나서서 기수를 제압하려고 했다.
장헌이 출수하여 완맥을 잡으려 하자 기수는 간단히 한 걸음 옮기는 것으로 피한 후 그를 떠밀었다.
“장사형. 정말 진실을 알고 싶지 않은 것이오?”
장헌은 자신의 공격이 너무나도 간단히 무력화되자 깜짝 놀랐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어디서 무공을 배웠느냐?”
“내가 상춘관 말고 어디서 무공을 배웠겠습니까?”
장헌은 의심스러워서 함부로 덤비지 못했다.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
“진실을 밝히는 것이오. 그러니 나를 대사형, 사모와 한 자리에 모여 삼자대면하게 해주시오.”
장헌이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좋다. 나를 따라와라.”
그가 순순히 응한 것은 자기 실력으로 제업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형과 함께라면 제 발로 찾아온 흉수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기수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기수가 제자들과 함께 들어서자 정두원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기수를 잡았구나! 잘 했다.”
기수는 코웃음을 쳤다.
“흥! 사부님을 죽이고 그 죄를 나한테 씌우다니. 용서할 수 없다.”
정두원이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용서를 못한다고?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얘들아! 저놈을 묶어라!”
제자들은 선뜻 나서지 못했다.
장헌이 밀리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기수는 정두원을 만난 이상 시간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선풍비의 신법으로 단숨에 날아가 그의 혈도를 단번에 제압해버렸다.
“헉! 이, 이게 무슨 수법이냐?”
정두원은 마혈이 풀려 말을 할 수 있었지만 그 외에는 온몸이 마비되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제자들은 문주가 한 순간에 통나무처럼 쓰러지자 크게 동요했다.
기수가 못 본 사이에 놀라운 고수가 되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기수가 말했다.
“가서 사모를 데려와라.”
제자들은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경홍부인은 기수 앞에 정두원이 쓰러져있는 것을 보고 겁을 먹었다.
기수가 정두원과 경홍부인을 한 번씩 가리키며 말했다.
“그날 난 너희 둘이 창고 안에서 방사 치르는 걸 봤다. 나중엔 사부님도 그 광경을 보시게 되었지. 그러니까 두원 네가 사부를 찔러죽이고 그 죄를 나한테 씌운 것이다. 내 말이 틀렸다면 얘기해봐라.”
“말도 안 되는 소리!”
“거짓말 하지 말거라!”
정두원과 경홍부인이 동시에 강력하게 부인했다.
기수는 정두원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경홍부인을 겨누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물러서려 했지만 기수의 지풍 한 방에 혈도를 제압당해 쓰러지고 말았다.
무공을 모르는 그녀는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정두원, 장헌을 비롯한 제자들은 이제 기수의 무공이 자신들과 한참 차이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자들 중 그 누구도 그런 식으로 지풍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기수는 의자 2개를 갖다 놓고 정두원과 경홍부인을 나란히 앉혔다.
그리고 검을 경홍부인의 얼굴에 갖다 댔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온몸을 떨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멈추어라!”
“진실을 말해라. 이 일은 그래야만 끝날 것이다.”
경홍부인은 제자들을 향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무엇을 보고만 있느냐? 당장 이놈을 잡아라!”
제자들이 다가오려 하자 기수는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와 제자들 사이의 마당에 흙먼지가 일면서 금이 파였다.
지풍과 마찬가지로 검기가 발출되어 그렇게 한 것이었다.
제자들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진실을 듣고 난 후엔 얼마든지 상대해주겠다. 그때까지는 참아라.”
기수는 검을 다시 경홍부인의 얼굴에 갖다 댔다.
“자. 이제 얘기해라.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경홍부인은 부들부들 떨면서 애원했다.
“기수야. 이게 무슨 짓이냐. 문주님이 널 얼마나 아끼고 보살펴줬는지 생각해 보거라. 그렇다면 내게 이럴 수는 없을 것이야.”
기수는 이곳에서의 어렸을 적 기억이 없었다.
지나온 1년 동안 사부와 대화를 나눈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전장에서 구해와 먹여주고 재워준 은인이라는 사실은 잊지 않고 있었다.
“사부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다.”
경홍부인은 기수를 표독스럽게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라는 것이냐! 그날 네가 내 남편을 검으로 찔러 죽이지 않았느냐! 그건 분명히 기억한다.”
“이 년이…”
기수는 검으로 그녀를 찔러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자신의 결백을 밝혀내려던 이제까지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정두원과 경홍부인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둘만 입을 맞추면 절대로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 테니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입을 다물자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기수는 그들을 고문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얻어낸 자백은 제자들이 의구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 그걸 써먹어보자.’
기수는 내공을 끌어올리고 염정구심술을 시전했다.
그러자 정두원의 눈이 풀리는가 싶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부인이 먼저 나를 유혹했다.”
그의 얘기에 경홍부인은 깜짝 놀랐다.
“거짓말하지 마라! 네가 나를 강간하지 않았느냐!”
제자들이 웅성거렸다. 어찌되었거나 둘이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은 인정한 셈이었다. 기수의 말이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정두원은 자기가 왜 그 말을 했는지 몰랐다.
속에 있던 말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온 것이다.
급히 변명을 하고 수습해보려 했지만, 그 다음엔 입을 열 수 없었다.
‘사술이다! 저놈이 언제 이런 걸 익혔지?’
말을 한 마디도 할 수 없으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반면에 일단 말문을 연 경홍부인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저놈이 나를 범하고 네 남편을 죽였다. 그리고 그 얘기를 발설하면 나를 죽인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다.”
자기 혼자라도 살자는 뜻이었다.
제자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대사형이 사부를 시해한 것이다.
기수는 경홍부인의 입을 다물게 하고 정두원이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염정구심술이 진짜로 통하는 것을 보니까 재미있었다.
아직은 사용 경험이 많지 않아서 상대의 심신을 완전히 조종할 정도는 안 되지만 진실을 토해내게 하는 데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부인이 입을 다물고 정두원의 관점에서 얘기가 진행되자 제자들은 다시 경악했다.
그동안 정숙하다고 생각해 온 부인이 실제로는 사내를 꼬여서 남편을 죽이도록 사주한 음녀, 악녀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정두원이 모든 잘못을 부인에게 전가하는 동안 부인은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녀 입장에선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이었지만, 기수는 애당초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양쪽에 공평한 기회를 줄 마음이 없었다.
진실만 밝혀지면 되는 것이다.
그가 정두원에게 말했다.
“자. 이제 나에 대해서 얘기해라.”
“기수는 그날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사부님의 피가 그의 옷에 묻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죄를 뒤집어씌울 생각을 했다. 그건 정말 미안하게 됐다.”
상춘관 제자들은 비로소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장헌은 분을 참지 못했다.
“대사형!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사모를 범하고 사부를 죽이다니!”
모두의 분노가 정두원과 경홍부인을 향했다.
정두원은 기수에게 애원했다.
“사제. 제발 나를 살려주게.”
“이제야 사젠가? 너를 살려줄 수는 없다.”
“아아… 제발…”
“대신 기회를 주겠다.”
기수는 그의 혈도를 풀고 검을 던져주었다.
“네 능력으로 살아서 도망쳐 봐라.”
정두원은 기수를 노려보다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기수가 전에 비해 달라졌지만 최선을 다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랐다.
그를 제압하기만 하면 다른 제자들 중엔 자기의 적수가 없었다.
기수는 예전에 그에게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서 정두원의 움직임이 한없이 느리고 힘없게 느껴졌다.
퍽! 소리와 함께 정두원이 뒤로 날아갔다.
기수의 스트레이트가 제대로 눈탱이에 꽂힌 것이다.
원래는 잽이라고 던진 건데, 아직도 힘 조절이 완벽하지 않았다.
정두원은 즉시 일어나서 다시 덤볐고, 기수는 훅으로 그의 턱을 부숴버렸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그의 명치에 어퍼컷을 꽂아 갈비뼈를 부러뜨렸고, 최종적으로 플라잉 니킥으로 마무리했다. 멀리 날아가 쓰러진 정두원은 일어나지 못했다.
기수의 강력한 3연타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제자들은 그의 시체에 악담과 욕을 퍼붓고 침을 뱉었다.
기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때릴 때의 기분은 통쾌했는데 막상 살인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묘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게 생각보다는 양심을 건드리지 않았다.
사부의 원한을 갚아준 일이었기에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 여기는 강호무림이야.’
경찰도 검찰도 없고 힘이 지배하는 세상인 것이다.
아녀자인 옥수나찰도 눈 하나 깜빡 않고 살인을 저지르는 판인데 사내대장부가 살인에 위축될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장헌이 기수에게 물었다.
“사모는 어떻게 하지?”
경홍부인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했다.
“난 아무 잘못도 없다. 모두 저놈이 벌인 일이야. 그러니 살려다오.”
기수는 냉소를 지었다.
“웃기지 마라. 너야말로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근원이야.”
장헌이 말했다.
“사부님 영전 앞에서 저 계집의 목을 자르자!”
그러자 제자들 모두 호응하는 함성을 질렀다.
기수는 순간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다.
“그건 내년 기일로 미루는 게 어때?”
제자들은 기수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기수는 씩 웃었다.
경홍부인의 침실.
경홍부인은 자신의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리고 팔목과 발목엔 수갑과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그녀가 기수를 보고 애원했다.
“기수야. 제발…”
“제발 뭐? 내년 사부님의 제삿날까지 목숨이 연장된 걸 고맙게 생각해.”
그리고는 방안에 가득 차 있는 제자들에게 물었다.
“자. 누가 먼저 할래?”
제자들은 경홍부인의 나신을 보고 흥분해서 이미 바지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딱 한 사람. 기수만 예외였다.
경홍부인의 농익은 몸이 색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그의 차가운 이성이 거부했다.
제자와 붙어먹고 남편을 죽인 못된 년에게 자신의 소중한 양기를 낭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생각은 그렇게 하더라도 아랫도리가 따로 반응했을 텐데, 지금의 기수는 달랐다.
의지가 몸을 컨트롤할 수 있었다.
장헌이 침을 꿀꺽 삼킨 후 말했다.
“이건 사악한 계집에게 벌을 주는 것이니까 단 한 명도 빠져선 안 된다. 입문 순서대로 차례를 지키고, 자기 앞과 뒤로 하지 않는 제자가 없는지 확인해라.”
“예. 알겠습니다.”
장헌이 먼저 바지를 벗고 침상에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