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61
배가 강변에 다가가자 기수가 유소진에게 말했다.
“이제 곧 내릴 겁니다.”
“알았어요.”
유소진은 채찍을 거두어 들여 둘둘 말았다.
그때 자세히 보니까 그녀의 채찍엔 좀 특이한 부분이 있었다.
채찍은 끝 부분에 쇳조각 같은 게 달려 있어서 파괴력을 높이는 게 보통인데, 그녀의 채찍은 끝이 전부 갈라져 있었다. 그것도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져서 맨 끝은 수백 가닥의 머리카락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저기 맞아서 아프기나 할까?’
갑자기 유소진이 쏘아붙였다.
“지금 어딜 보는 거예요?”
기수는 화들짝 놀랐다. 그는 그녀가 허리에 도로 감는 채찍을 보고 있었는데 유소진은 자기 엉덩이를 본다고 오해한 것이다.
기수는 얼른 사과했다.
“미, 미안합니다. 전 채찍을 보고 있었습니다.”
“흥!”
유소진은 경멸에 찬 시선으로 기수를 노려본 후 먼저 배에서 내렸다.
기수는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야! 내 애인은 너보다 100배는 더 예쁜 엉덩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난 진짜로 채찍을 본 거란 말야.’
그러나 상대의 무기를 관찰했다는 것보다는 응큼한 남자인 편이 나을 것 같아서 그냥 오해를 하게 놔두기로 했다.
“어디죠? 오빠와 기수가 싸운 곳은?”
“이쪽입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기수는 적당한 수준의 경공술로 길을 안내했다.
결전 장소로 가 보니 예상대로 유청기의 시신은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나마 머리와 팔다리가 몸통에 붙어 있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유소진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그 앞에 풀썩 주저앉더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기수 입장에선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오빠에 이어 너도 내 손에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언제 알려줘야 하지?’
그 시점 잡기가 정말 어려울 것 같았다.
타이밍을 어떻게 잡건 무조건 최악일 것이었다.
여자가 우는 모습은 기수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속으로 결심을 한 가지 하게 되었다.
‘그래. 적어도 충격 하나라도 줄여주자. 범장이 바로 기수였다는 사실은 굳이 몰라도 되는 거잖아?’
그럼 죽더라도 속았다는 느낌, 배신감 같은 건 덜 느낄 것 같았다.
‘미안해. 그 정도가 내 호의의 전부야.’
여자를, 그것도 미녀를 죽이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한차 서럽게 울고 난 유소진이 중얼거렸다.
“시신이 이렇게 훼손되어서야 흉수의 수법을 알 수가 없잖아.”
기수는 그 와중에도 단서를 찾으려는 그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유소진이 기수에게 말했다.
“오빠를 매장하고 싶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예. 자리만 정해주십시오.”
유소진은 북극성을 찾아 방위를 확인하고 주변 산세를 살핀 후 한 지점을 가리켰다.
“저 둔덕 아래가 좋을 것 같아요.”
기수는 그 자리의 땅을 팠다. 양손을 삽처럼 사용해서 번갈아 움직이자 구멍이 금방 만들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유소진이 말했다.
“범채주 대단하군요. 파천강기를 벌써 그 수준까지 익히다니.”
“아! 예. 감사합니다. 군사님 덕분에 엄청난 무공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기수는 속으로 웃었다. 실력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손가락 끝부분에만 강기를 일으켰는데 그 정도 가지고도 대단하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 정도 깊이면 될 것 같네요.”
“예. 시신은 제가 옮기겠습니다.”
죽은 지 좀 지난 시체를 만지는 것은 유쾌한 기분이 아니지만 기수는 의외로 담담한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그동안 비위가 좋아졌나?’
그보다는 살인을 대수롭지 않게 하다 보니까 그 결과물에 대해서도 둔감해진 것 같았다. 살인은 하지만 시체는 싫다! 하는 건 왠지 이율배반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가면 시체 닦는 알바나 장의사 알바에 도전해볼까?’
구덩이에 유청기의 시신을 조심스레 내려놓자 유소진이 말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이제 보니까 구덩이가 처음 파달라고 했던 곳보다 약간 옆으로 치우쳐 있네요?”
“미안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뭐, 큰 문제는 아니니까.”
기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제대로 판 거야. 그래야 너를 오빠 옆에 안장할 수 있거든.’
그녀는 죽인 뒤에 시체를 버려두지 않고 특별히 묻어줄 생각이었다.
흙을 덮고 돌을 얹는 일은 유소진도 도왔다.
그렇게 하다 보니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유소진이 기수에게 물었다.
“백리세가는 어느 쪽이죠?”
“기수를 찾는 거라면 거기보다는 산을 뒤지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그 자는 백리세가에 신세지기를 원치 않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번에도 숲길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싸우게 되었더랬습니다.”
“우연이 아니라 그가 먼저 우리를 발견하고 따라온 거겠죠.”
“어쨌거나 기수를 찾는 일이라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어떻게요?”
“제가 앞장서 가면서 좀 시끄러운 소리를 내겠습니다. 그러면 그가 몰래 제 뒤를 밟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때 군사님이 배후에서 놈을 잡으십시오.”
“그런 방법이 통할까요?”
“백리세가로 찾아가서 소란 피우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물론 그 방법은 백발백중이었다. 범장이 앞서가면 반드시 기수를 만날 수 있었다.
“좋아요. 일단 한 시진 정도만 그렇게 해보기로 해요.”
기수는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허공에 휘둘러 파공음을 내면서 숲을 이리저리 뛰기 시작했고 유소진은 넉넉히 거리를 벌리고 따라갔다.
20분 정도 바람잡이를 한 기수는 꽤 높아 보이는 골짜기 앞에 이르렀다.
“이 정도면 되겠다.”
그는 외투를 벗어 나무 뒤에 숨기고 얼굴을 본래로 돌렸다.
그리고 범장의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잠시 후 유소진이 손에 채찍을 쥔 채 나타났다.
그녀는 낯선 남자가 서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웨, 웬놈이냐?”
“하핫! 자기 소개부터 하는 게 순서 아닐까?”
“범채주는 어디갔느냐?”
“범채주? 아! 그 수로맹의 도적놈 말이냐? 지난번에 놓쳐서 찜찜했는데 오늘 또 나타났더군. 후후….. 지금쯤 저 아래 피떡이 되어 있을 거다. 내 일 장에 맞았으니까.”
그러면서 골짜기 아래를 가리켰다.
유소진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범채주를 죽였다고? 그렇다면 너, 너는….?”
“난 기수라고 한다. 넌 누구냐?”
기수란 말에 깜짝 놀란 유소진의 눈빛이 살기를 번뜩이기 시작했다.
“난 수로맹의 군사 유소진이다. 그리고 지난번에 네 손에 죽은 유청기의 동생이기도 하지. 오늘 너를 죽여 오빠의 원한을 갚겠다!”
“하핫! 미안. 죽는 건 네 쪽이야.”
“누구 마음대로!”
순간, 그녀의 채찍이 파공음을 내며 얼굴을 후려쳤다.
기수는 잽싸게 피하며 파천강기를 쓰려다가 멈칫했다.
‘범장이 기수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마음 편히 죽게 해주겠다고 했으면서 파천강기를 쓰면 다 소용없잖아?’
그래서 파천강기가 실리지 않은 순수한 잔백지만 날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유소진의 혈도로 지풍이 제대로 파고들었는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 채찍을 휘둘렀다.
“죽어랏! 오빠의 원수!”
기수는 당황스러웠다.
‘어째서 잔백지에 맞고도 아무렇지 않은 거지? 파천강기로 막았나?’
그러나 성게 같던 유청기와 달리 그녀의 몸 주변에선 어떠한 기의 응집도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찾자면 아지랑이 같은 게 감도는 느낌이었다.
기수는 그녀의 채찍을 피하면서 다시 잔백지 공격을 했다.
분명 제대로 혈을 찍었는데 이번에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았다.
‘내가 착각한 게 아냐. 공격은 모두 성공했는데….통하지 않아!’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유소진의 채찍이 손목에 감겨왔다.
기수는 팔을 흔들어 그것을 떨쳐냈다. 그런데 끝에 달린 수백 가닥의 머리카락 같은 것들이 의외로 끈적거리며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이게 뭐지? 접착제라도 발랐나?’
그러나 달라붙는 느낌이 좀 특이했다.
무슨 말미잘의 촉수나 문어의 흡반처럼 밀착되었다.
“이, 이게 뭐 하는 수작이냐?”
“호호호!… 넌 이제 벗어날 수 없다.”
“무슨 헛소리냐?”
바로 그때. 기수는 믿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갑자기 단전의 기운이 채찍을 통해 확!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헉! 이것은 흡성대법?”
이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나 만화에서 비슷한 걸 본 적 있는 것 같았다.
“호호호!….. 이것은 혼세흡정공이다!”
기수는 그녀가 오빠 유청기와는 완전히 다른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유청기는 강력한 파천강기로 상대를 꿰뚫어 죽이는 스타일이라면, 유소진은 상대의 공격을 무슨 스펀지처럼 흡수해서 혈도조차 잡히지 않는 독특한 방식의 호신강기로 방어하면서 채찍으로 진기를 빨아들이는 사악한 무공을 사용했다.
기수는 이대로 진기를 빨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황급히 몸을 날렸다.
‘네가 아무리 괴상한 무공을 익혔다 해도 나의 선풍비를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다!’
스피드라면 자신 있었다.
금방이라도 죽일 수 있다고 자신했던 상대로부터 몸을 피한다는 게 자존심 상하기는 했지만 흡정공을 상대할 방법이 나올 때까지는 일단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채찍의 가느다란 가닥들은 길이가 순식간에 고무줄처럼 늘어나면서 떨어지지 않았고 유소진도 금세 거리를 좁혀왔다.
“호호호!… 발버둥 칠수록 내겐 고마운 일이지.”
그녀가 왜 고맙다고 하는지 의문을 가지는 순간, 기수는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아! 이건…. 내가 내공을 많이 끌어올릴수록 빠져나가는 속도가 더 빨라지는구나!’
심각한 상황이었다.
기수는 오른손에 붙은 섬모를 왼손으로 잡아 뜯었다.
어느새 피가 날 정도로 깊이 박혀 있었지만 그 정도 아픔은 계속 내공을 빼앗기는 결과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오른손에 붙은 것들을 띁어내는 순간 왼손에 더 많은 섬모가 달라붙었고, 동시에 허리와 허벅지에도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노출된 피부뿐만 아니라 옷 속으로까지 파고드는 것이었다.
기수는 당황함을 넘어 이젠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마공을 쓰는 마녀를 살려둬선 안 돼!’
여자라서, 미녀라서 죽이는 게 미안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한심했다.
기수는 배려고, 호의고 다 집어치우고 비장의 신무기인 손가락 발칸포로 그녀의 이마에 구멍을 뚫어주기로 마음먹었다.
파천강기를 위해 내공을 모으던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크, 큰일이다! 내공이 모이지 않아!’
소모가 심한 파천강기를 시전하려면 평소보다 내공을 많이 모아야 하는데, 내공에 집중할수록 혼세흡정공으로 빠져나가는 속도는 더 빨라졌다.
“호호호!….. 지금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지만 계속 하거라! 아주 좋구나.”
기수는 조금의 진기라도 아끼기 위해 일단 내공 운용을 중지했다.
그리고 유소진에게 물었다.
“내게서 빨아들인 내공은 너의 내공이 되는 것이냐?”
“일단은 그렇다고 해야겠지? 호호호!….”
“너희 남매는 정말 지독한 무공을 잘도 창안해냈구나.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냐?”
유소진의 표정이 변했다.
“사도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지?”
“네 오빠가 얘기해주었다.”
“흥! 뭐 어차피 이젠 상관없는 일이겠지. 오빠와 나는 사도들 중에서도 특별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런 일을 맡겨주신 것이기도 하고…”
오빠 얘기가 나오자 그녀 눈빛에 살기가 더 짙어졌다.
기수는 다시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를 추종하는 사도냐? 너희가 믿는 신은 누구지?”
“흥! 곧 죽을 놈이 그건 알아서 뭐 하려는 거냐?”
“그 정도는 얘기해줘도 되잖아?”
유소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대화로 시간을 끌면서 빠져나갈 방법을 연구해보려는 모양인데, 내 채찍들이 네 살 속으로 파고든 이상 어떠한 수단으로도 탈출은 불가능하다.”
기수는 속으로 그녀를 욕했다.
‘눈치 빠른 년!’
그리고 그는 절망감을 느꼈다. 내공이 그나마 쌩쌩하던 조금 전에 선풍비를 전력으로 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탈출에 실패했는데, 지금 다시 시도한다면 그나마 조금 남은 내공마저 전부 잃기만 할 것이었다.
그러나 기수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대화를 시도했다.
“네 오빠 말로는 마교에 있는 사도가 너희 남매보다 뛰어나다고 하던데?”
한 번 넘겨 짚어서 찔러 보는 얘기였다.
“흥! 그들 중 누구도 오빠와 나의 협공을 막아낼 자는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네놈이 우리 남매를 갈라놓았지!”
기수는 마교에 침투한 사도가 한 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혹시 마교 외에 다른 곳에도 사도가 있나?”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호호호!…. 재미없는 얘기는 그만 하기로 하고, 이제부터 슬슬 시작해볼까?”
그러더니 유소진은 비수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새파란 날이 보기에도 섬뜩했다.
기수는 침을 꿀꺽 삼킨 후 물었다.
“그, 그걸로 뭘 어쩌려는 거지?”
“오빠의 무덤을 저 쪽에 만들어 놓았다. 그 앞으로 가서 너를 토막토막 잘라 제물로 바칠 것이다.”
기수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원한에 사무친 그녀라면 그리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겐 그걸 막을 힘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