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63
탁지연은 기수가 예상보다 늦게 돌아오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예상보다 이틀이나 더 지난 뒤에 마침내 배가 돌아왔는데, 거기 탄 사람은 기수가 아니라 군사 유소진이었다. 탁지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소진이 와서 한 말은 더욱 끔찍한 것이었다.
“범채주는 죽었어요.”
탁지연은 무릎에 힘이 풀려 쓰러질 뻔 한 것을 억지로 참고 버텼다.
그러나 유소진의 다음 말이 그녀를 기쁘게 했다.
“기수는 죽이지 못하고 놓쳤어요.”
막붕비와 갈태독은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탁지연은 채주 잃은 슬픔에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기수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다만, 걱정은 되었다.
‘이 계집이 살아 있다면 기소협은 어떻게 된 거지? 혹시 중상을 입은 것은 아닐까?’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보살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저… 군사님. 그 원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소진은 이마를 찌푸렸다.
상대의 진기를 완전히 빨아들여서 거저먹기나 마찬가지 상태였는데 막판에 자기한테 사술을 쓸 거라고는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는 비록 살아서 도망쳤지만 무공을 모두 잃고 폐인이 되었으니 앞으로 우리 수로맹의 일에 방해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 그, 그거 잘 됐군요.”
탁지연은 암담한 심정이 되었다.
‘무공을 잃다니.’
유소진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막붕비가 말했다.
“범채주의 희생은 정말 큰 손실입니다. 하지만 당장 27채를 누가 지휘해야 할지 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소진은 탁지연과 육대기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대뜸 탁지연을 가리켰다.
“이 사람에게 임시 채주를 맡기면 되겠네요.”
두 사람의 기도를 비교하고 단번에 결정한 것이다.
탁지연은 사양하려 했다.
“아, 아닙니다! 전 감히 채주가 될 자격이 못 됩니다.”
지금 그녀의 마음은 오로지 기수를 향하고 있었다.
그가 어찌 되었는지 걱정이 되어서 이 자리만 벗어나면 곧장 찾아나설 생각이었는데 채주를 맡으라니.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갈태독이 말했다.
“범채주와 의형제지간이라고 들었는데 너무 사양하지 말게.”
탁지연은 생각을 바꾸었다.
자기가 찾아 나선다고 해봤자 기수의 종적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면 자칫 두 사람이 서로를 찾아 헤매면서 일생을 허비할 수도 있었다.
자기라도 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나중에 기수가 찾아올 수 있을 것이었다.
“그, 그렇다며 부족하나마 형님의 원한을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유소진이 말했다.
“원수는 내가 이미 갚았어. 어쩌면 죽이는 것보다 이 편이 더 잔인한 복수라고 할 수도 있을 거야. 호호호!…”
탁지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 원수는 너야.’
그녀의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탁지연은 수로맹 27채의 임시채주가 되었다.
한 편, 절벽에서 떨어진 기수는 바위에 부딪히다가 한 나무에 걸려 멈추었다.
“으으….. 존나게 아프네….”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어디 부러진 건 아닌가 싶을 정도의 통증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억지로 몸을 이동시켜 석벽으로 이동한 그는 일단 몸을 숨긴 채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먼동이 터오자 주변 정황이 드러났다.
그는 처음 매달려 있던 곳에서 10여미터 정도 내려온 위치에 있었는데 이전 위치보다 몸을 숨길 게 별로 없었다.
날이 더 밝아지면 유소진에게 들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미끄러운 석벽을 따라 이동했고, 그러다가 갈라진 틈을 발견하고 그 안으로 숨었다.
동굴처럼 쑥 들어간 곳이라 완전히 몸을 가릴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기수는 상처부터 살펴봤다.
다행히 뼈가 부러진 곳은 없었다.
“휴우!…. 무협지 보면 절벽에서 떨어졌다 하면 기연이던데, 난 이게 뭐냐. 상처뿐이네. 이 장소만 해도 그래. 보통은 절벽 중간에 있는 이런 장소는 동굴로 이어지….”
기수는 중얼거림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진짜 안쪽으로 동굴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 뭐야… 혹시 기연?’
기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좁지만 분명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일부 사람의 손으로 넓힌 흔적도 보였다.
‘누군가 여기 살았었다!’
기수는 차분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석실을 발견했다.
방 하나 크기의 공간이었는데 그 가운데 사람이 한 명 앉아 있었다.
기수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에 깜짝 놀랐지만 그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곧 알아차렸다. 결가부좌를 튼 채로 죽은 시체였다.
예전 같으면 이 정도 어둠쯤은 꿰뚫어 볼 텐데 내공을 잃은 상태라 석실 안에 뭐가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여기저기 더듬던 기수는 한참 만에 부싯돌을 찾았다.
나뭇가지를 모아 작은 불을 피우고 나니까 석실 안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시체는 얼마나 오래됐는지 거의 미이라 상태라 냄새도 나지 않았다.
걸치고 있는 옷의 상태나 옆에 놓인 검으로 보자면 당당한 무인의 기품이 느껴졌다.
그리고 석실 벽 전체에 검으로 새긴 글자들이 보였다.
“아싸! 기연!”
기수는 너무나 기뻤다. 마녀를 만나 진원지기가 앵꼬 되자마자 전대 고인이 남긴 비전을 만났으니 이렇게 운이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기수는 즉시 석벽에 새긴 글들을 읽었다.
노부가 후인에게 전한다는 얘기, 자신의 자라온 내력과 강호에서의 경력 등은 스킵하고 본론을 찾아갔다.
“여기부터다!”
기수는 기쁜 마음으로 고인이 남긴 심법과 검법을 읽었다.
정신을 집중한 지 1시간.
마침내 기수는 끝까지 다 읽었다. 그리고 소리 질렀다.
“뭐야!… 이 새끼. 나보다 하수잖아!”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검법은 잘 봐줘야 월영검법 수준이었고, 심법은 평범해서 태무대력신공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기수는 벌러덩 자빠졌다.
“아! 씨발….. 괜히 기연인 줄 알고 좋아했네.”
허탈해서 웃음도 안 나왔다.
잠시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고 있자니 이해가 되는 면도 있었다.
자기가 너무 고수였기 때문에 실망했을 뿐, 사실 이 정도의 검술과 내공이라면 후세에 남길 만 하기는 했다.
기수는 자빠진 채 고개를 돌려 시체에게 말했다.
“미안하게 됐수. 주인장. 근데 뭐 먹을 건 없수?”
지금 자기에겐 벽에 잔뜩 적힌 검결보다 건량 한 조각이 더 필요했다.
그때 그의 눈에 석실 구석에 놓인 항아리가 보였다.
‘혹시 저 안에 영약이?’
끝까지 기연에 대한 희망을 품었지만 하나는 물항아리였고, 하나는 벽곡단이 들어 있었다. 배가 엄청나게 고팠지만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벽곡단을 먹을 만큼은 아니었다. 기수는 조심스럽게 동굴 밖으로 나가보았다.
아직 날이 밝아서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니 땅과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리고 곳곳에 발 디디기 편하도록 파놓은 흔적도 보였다.
‘당분간 여기서 지낼까?’
숨어 지내기에는 최적의 장소 같았다.
그리고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연공을 할 수도 있었다.
기수는 밤이 되기를 기다려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과연 발 디디기 좋게 파놓은 곳이 있어서 쉽게 오르내릴 수 있었다.
기수는 항아리 두 개를 깨끗이 씻었고 나무열매를 따서 허기도 면했다.
그리고 동굴로 돌아와 시신을 한쪽 구석으로 옮겨놓고 한 잠 늘어지게 잔 후 깨어나서 앞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내공도 잃고 돈도 한 푼 없는 신세.
낙양에 가면 자신만의 보물창고가 있긴 하지만 선풍비 없이 거기까지 가려면 걸어서 두세 달은 걸릴 것이었다. 그리고 당장은 유소진 때문에 함부로 나갈 수 없었다.
“아! 문제는 내공인데….”
그것만 회복할 수 있다면 옛날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지금은 신세가 너무 처량했다. 주인공이 칼을 휘두르면 한꺼번에 쓰러지는 엑스트라들. 딱 그 정도 능력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단기간에 내공을 증진시킬 수 있지?’
생각나는 건 딱 하나. 자기가 해온 바로 그 방법이었다.
‘여자 고수를 찾자! 기왕이면 젊고 예쁘면 좋겠지?’
절세고수는 아니더라도 일단 그녀 수준으로 복구하고, 좀 더 고수를 찾아 또 그 수준으로 복구하면 60년이 아니더라도 1갑자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므흐흐흐흣….! 나 그럼 앞으로 도대체 몇 명하고 해야 하는 걸까?’
좋아할 상황이 아닌데도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첫 번째 상대를 만나 음양대법을 시전하려면 이쪽에도 어느 정도 내공이 있는 편이 좋았다. 기수는 벌떡 일어나 결가부좌를 했다.
노느니 조금씩이라도 내공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
‘그래! 한 걸음씩 가는 거야.’
10갑자 넘는 내공을 운용하던 인프라는 고스란히 남아있으니까 남들보다 유리한 스타트라고 할 수 있었다.
꼬박 6시간 정도 운기조식을 하자 배고픔도 사라지고 상처도 빨리 낫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옛날의 가락이 있어서인지 단전에도 얼마간의 진기가 모였다.
기수는 종일 동굴에서 지내는 김에 주인이 남긴 검술도 익혀보기로 했다.
그가 남긴 검은 검신에 용 비슷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보통 검보다 무거웠다.
검술 역시 쾌와 변보다는 파워를 중시했다.
“이거 꽤 괜찮네? 주인장. 하수라고 한 거 사과하우.”
월영검법은 탁지연같은 여자에게 어울리고, 자기에겐 이 검법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막상 검을 잡아 보니 내공이 없어도 상당 수준까지는 검초를 펼쳐낼 수 있었다. 적어도 녹림도 정도는 겁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 양기수. 아직 죽지 않았어! 기초부터 차근차근!’
물론 여자 고수를 찾을 때까지 만이지만, 초보로 돌아간 것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동굴에서 지낸지 열흘 정도가 되자 기수는 슬슬 떠나고 싶어졌다.
안전하긴 하지만 온종일 미이라와 함께 지내는 게 유쾌하지는 않았다.
‘어디로 가지?’
지금 당장이라도 탁지연을 만나기만 하면 음양대법을 펼칠 수 있었다.
그녀는 약선문의 대청단을 먹었고 자신을 사랑하니까 가장 중요한 정신적 결합이 처음부터 가능했다. 그리고 속궁합도 엄청 잘 맞으니까 최단기간에 자신의 내공을 상당한 수준까지 복구시켜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최선의 선택이라고 해도 수로맹에 있는 한은 접근이 불가능했다.
‘그래. 일단 범장으로 역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만 내공을 모으자.’
희망을 본 기수는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넉넉잡고 6개월 정도만 열심히 연공하면 역용은 가능해질 것 같았다.
범장 얼굴만 만들 수 있으면 슬쩍 찾아가서 기수에게 당했지만 죽은 것은 아니었다고 하고 탁지연과 함께 갈 데가 있다며 배만 타면 끝인 것이다.
‘그냥 여기서 6개월 버틸까?’
그러나 영 아니었다. 기수는 다른 연공장소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밤 시간을 택해 동굴을 나섰다.
“주인장. 잘 쉬었다 갑니다. 그리고 이 검은 여기 놔두는 것보다 내가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가져갑니다. 극락왕생 하시우.”
막상 떠나려고 보니 시체인데도 같이 지내는 사이 정이 든 것 같았다.
그에게 바이바이를 하고 동굴을 나선 기수는 백리세가를 멀리 우회해서 산을 넘었다.
그리고 관도에 들어서서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수로맹 27채 구역에서 멀리 갈 필요는 없지만 얼굴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니까 장강과 백리세가 모두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는 떨어져야 했다.
그런데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상했다.
내려다보니 절벽에서 굴러 찢어지고 피가 말라붙은 옷이 문제였다.
‘아! 근처에 의류재활용 수거함이라도 없나?’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은자 하나만 있었으면….’
옷도 사 입고 제대로 된 음식도 사먹고 싶었다.
그때 마을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슬쩍 끼어들어 어깨너머로 보니 방이 붙어 있었다.
[요괴를 잡기 위해 힘과 용기를 겸비한 영웅을 모집함.]
기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돌아서다가 방을 다시 한 번 봤다.
‘은자 30냥이라고?’
아래쪽에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다.
‘요괴라면 귀신이잖아? 나 그거 별론데.’
초등학교 때부터 공포영화는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은자 30냥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그 정도 돈이면 아예 집을 한 채 빌려서 먹을 것 사다 쌓아놓고 하루 온종일 운기조식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6개월보다 훨씬 빨리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도 컸다.
기수는 방에 적힌 객잔을 찾아갔다.
점소이를 붙잡고 묻자 그는 기수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더니 2층으로 안내했다.
“손님! 지원자가 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점소이는 두둑한 팁을 받고 꾸벅 인사를 한 후 내려갔다.
기수는 순간적으로 차라리 점소이를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중원무림 알바의 꽃은 점소이가 아닐까?’
현대에서는 안 해본 알바가 없는데 여기서도 한 번쯤은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게 느껴졌다.
‘시급은 엄청 짜겠지만 팁으로 커버할 수 있지 않을까?’
“뭘 망설이고 계세요? 들어오세요.”
여인의 목소리가 기수의 상념을 깼다.
‘여자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방안엔 40대 남자와 20대 미녀가 함께 앉아 있었다.
점소이에게 팁을 준 남자는 인상이 차갑고 몹시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그 옆의 여인은 상당한 미녀였다. 송란과 무정선자를 합쳐놓은 것처럼 약간 냉정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여운 면도 있었다.
기수가 여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사내가 말했다.
“이봐! 뭘봐? 날 봐! 요괴와 맞설 담력과 배짱은 있나?”
“요괴요? 아! 예…. 뭐 일단은… 그렇습니다. 은자 30냥은 선금입니까?”
“그럴 리가 있나. 일을 마치면 주겠네.”
기수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일단 지금 당장 배가 고픈데 한 냥만 땡겨 주시면 안 될까요?”
사내는 뭐 이런 거지가 있어? 라는 표정으로 기수를 훑어보았다.
당당한 체격에 검을 들고는 있지만 옷이나 얼굴은 꾀죄죄하기 그지없어서 개방 방도라고 하면 어울릴 수준이었다.
현대처럼 거울이 흔치 않은 시대이다 보니 기수가 자기 관리를 소홀이 한 탓이었다.
“안 돼! 뭘 믿고 선금을 줘? 그냥 도망치면 어쩌라고?”
사내가 단호히 거절하자 기수는 기운이 빠져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러자 여인이 은자 하나를 던졌다.
“받아요. 한 냥.”
“아! 고, 고맙습니다!”
기수는 자기를 믿고 돈을 준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보니까 그녀가 더 예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