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71
백문조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수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출수하여 완맥을 움켜쥐었다.
“헉! 왜, 왜 이러십니까?”
기수는 깜짝 놀랐다. 백문조의 무공도 결코 북궁천 못지 않았다.
새 품종 같은 이름, 왜소한 체구라고 얕볼 게 결코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
백문조는 기수의 몸 상태를 확인한 후 손을 놔줬다.
“정말이군. 맹탕이야.”
“하핫! 아무리 그래도 맹탕이란 말씀은 좀….”
백문조의 날카롭기만 하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번졌다.
“너. 이름이 양칠이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사형에게서 뭘 얻을 수 있을 것 같나?”
“무슨 말씀이신지….”
“어느 정도 짐작했겠지만, 사형은 상태가 약간 안 좋을 때도 있단 말이지.”
“그, 그런가요?”
“너를 건드리면 뭐 어쩐다는 식으로 우리를 위협하기는 했지만, 어떤 날은 네가 제자라는 사실도 까맣게 잊을 수 있단 말야. 그러니까 나한테도 잘 보여 두지 않으면 곤란하단 말이지.”
“아! 그, 그렇군요.”
아침에 깨울 때도 낯선 사람 보는 표정이기는 했다.
“네가 한 가지 일만 해준다면 나도 사질을 아끼고 보살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가끔씩 용돈도 주고….”
기수는 머리를 굴려보았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사람만 믿고 이쪽 패거리한테 밉보였다가는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어려운 일만 아니라면 하겠습니다.”
“하하하!… 역시 현명하군. 어려운 일은 아냐. 오히려 아주 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 뭐냐 하면 말야… 사형이 방안에 온통 어지르는 그 종이들 있잖아. 그걸 모아서 태우기 전에 나한테 건네 줘. 내가 대신 태울 테니까.”
기수는 백문조가 북궁천의 무공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사형제지간에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되었다.
북궁천은 미친 듯이 새로운 초식과 진기운용법들을 창안하곤 하니까 그것들이 그냥 버려지는 게 아깝기는 할 것 같았다.
하나씩 검토해 보면 그 중 쓸 만 한 걸 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제가 그러는 걸 알면 사부님이 싫어하지 않으실까요?”
“사형은 어차피 매일 새로운 낙서를 하는 게 취미니까 예전 낙서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신경을 쓰지는 않을 거야. 오히려 네가 청소를 깨끗이 잘 한다고 칭찬할 걸?”
“하지만 청소는 제 일인데 사숙을 수고스럽게 하긴 죄송해서…”
“하하!… 그 정도는 수고라고 할 수도 없지. 닷새마다 은자 한 냥씩 주지.”
“하하!… 하루에 한 냥이 좋겠습니다.”
백문조는 기수를 노려봤지만 곧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종이가 나오는 날마다 한 냥씩 쳐서 주지.”
“감사합니다. 훌륭한 사숙을 모시게 되어 기쁩니다.”
기수는 솥에 납은 밥을 박박 긁어서 먹고 첫번째 일을 시작했다.
방에 온통 널브러진 종이들을 긁어모아 백문조와 약속한 대로 건물 밖 처마 아래 돌로 눌러 놓았다.
잠시 뒤에 나가 보니 종이들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은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생긴 건 좀 그래도….사람이 신의가 있네.’
백문조는 아직 40대 초반.
꽃 같은 미녀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 아무래도 남자로서의 욕구를 참기 힘들 텐데, 설매가 버진으로 있었던 것을 보면 사부와 제자 사이에 지켜야 할 선은 확실히 지킨 거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매일 한 냥씩 벌 수 있단 얘긴데, 이걸 시급으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은자 한 냥이 현대의 화폐가치로 얼마나 될까 한참 계산하고 있는데 북궁천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여기 있던 종이들 다 어디 갔어?”
“제가 치웠는데요….”
그러자 북궁천이 씩 웃었다.
“잘했어! 역시 제자를 거둔 보람이 있군.”
기수는 추궁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낙서 정도로 여기는 듯 했다.
북궁천은 기수를 데리고 나가 목욕 준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목욕통에 뜨거운 물을 채우는, 어찌 보면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현대였다면 보일러 켜고 온수와 냉수 적당히 맞춰서 틀어놓으면 되겠지만 기수는 물을 길어오고, 그걸 끓일 나무를 해오는 일까지 전부 자기가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부님. 목욕은 얼마나 자주 하시나요?”
“그동안은 사질들한테 준비를 부탁해야 했기 때문에 자주 못했어. 사흘에 한 번 정도? 오늘부터는 매일 할 거야. 준비할 수 있겠지?”
“목욕을 너무 자주 하는 것도 피부에 안 좋다던데요. 일주일에 한 번은 어떠십니까?”
“밥과 빨래까지 하고 싶다고?”
“혈액순환을 위해서도 매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막상 해보니까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었다.
밥은 백문조의 제자들이 하니까 청소와 목욕물 준비, 그리고 이따금씩 빨래만 하면 되었다. 어찌 생각하면 엄청 귀찮은 일이지만, 알바라고 생각하면 시급 받는 게 미안할 정도 수준에 불과했다.
그렇게 사나흘 지나면서 보니까 북궁천의 하루 스케줄은 정말 제멋대로였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서 목욕, 화장, 새 옷으로 갈아입는 의식을 끝낸 이후엔 혼자 팔다리를 움직이며 종이에 초식과 구결을 쓰는 게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어떤 날은 종이가 두세 장에 불과했지만 어떤 날은 수십 장씩 나왔다.
그리고 어떤 때는 혼자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화를 내기도 하고, 훌쩍훌쩍 울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있어야 했다.
5일째가 되던 날. 북궁천이 기수를 앉혀놓고 말했다.
“이제까지 관찰해 본 바에 의하면 넌 내게서 무공을 배울 자격이 있다.”
“하핫! 원래 그럴 생각으로 절 제자로 거두신 것 아닌가요?”
“아니지. 비인부전이라…. 제자로 삼았다고 해도 성실한 인간인지 됨됨이를 살피는 게 우선이니라. 넌 합격했다.”
5년도 아니고 고작 5일 관찰하고 합격시킨 게 좀 성급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자기 입장에선 반가운 얘기였다.
북궁천이 의외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모름지기 만사가 다 그렇지만, 무공을 익히는 데는 뚜렷한 목표부터 세우는 게 중요하다. 너. 혹시 무슨 복수 같은 거 할 거라도 있냐?”
“복수라면야….”
유소진을 제압하고 빼앗긴 진기를 되찾고 싶었다.
그러나 꼬치꼬치 캐물으면 대답하기 귀찮을 것 같았다.
“그런 거 없습니다. 워낙 바르게 살아서인지 원수 진 사람이 없습니다.”
“흐음…. 그렇다면 이렇게 목표를 세워보자. 지금부터 시작해서 네가 사질들을 전부 쓰러트리는 거다!”
기수는 곧바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걸 목표로 삼겠습니다!”
안 그래도 백문조의 제자들을 전부 쓰러트리고 싶었다.
설매도 자기가 위로 올라가서 진짜 제대로 한 번 하고 싶었다.
나머지 다섯도 미모와 몸매를 생각하면 ‘므흐흣…’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북궁천이 흡족한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하하하!…. 아주 좋구나. 사내가 그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지. 사실, 그 아이들의 무공이 제법이라서 너무 높은 목표를 잡은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네가 그렇게 의욕을 보이니 다행이구나. 자! 시작해보자.”
기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 자신 있습니다!”
“우선…. 혈도의 이름을 모두 외우는 것부터 시작해볼까?”
“예? 심법과 초식을 연마하는 거 아닙니까?”
“하루빨리 고수가 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만, 무공도 모름지기 이론적인 기초가 중요한 것이다. 일단 우리 몸의 근골, 그리고 기혈 흐름의 모든 경로에 대해 완전히 안 다음에 시작해야 진전도 빠른 것이니라. 초식부터 배우면 일견 성취가 빠른 것 같지만 상승의 경지엔 결코 오를 수 없다.”
그러더니 백문조가 무한정 공급해주는 종이 뭉치에서 한 뭉텅이 들고 와서는 그 위에 붓으로 빠르게 휘갈기기 시작했다.
“받는 대로 다 외워라.”
“처, 천천히 쓰십시오.”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힌 종이들이 쉬지 않고 계속 넘어왔다.
기수는 시작도 하기 전에 기가 질려 버렸다. 그 중 한 장을 외우는 것만 해도 꼬박 하루, 어쩌면 사나흘이 걸릴 것 같았다.
“사부님. 정말로 이걸 다 외워야 합니까?”
“오늘은 첫날이니까 이 정도만 하자.”
중간에 끊었다는 게 10장이 넘었다.
“사부님. 이걸 어떻게 다 외우고 계십니까?”
“히히… 내 머릿속에는 만 권의 책이 들어있다. 전부 외웠지.”
기수는 속으로 웃었다.
‘만 권의 책이면 하드 몇 기가 쯤 되려나. 그걸 다 외운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 책들이 들어가려니까 공간이 부족해서 대신 정신이 나간 모양이지요? 크크…’
기수는 종이들을 곱게 접은 후 말했다.
“일하면서 틈틈이 외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심법도 하나만 가르쳐주십시오.”
북궁천은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일까지 다 외워야 한다. 내일은 다른 걸 적어줄 테니까.”
“하핫…이, 이걸 전부 내일까지요?”
“고문법에 대해서도 연구를 하고 있는데, 너한테 시험해보게 하지 마라.”
“사부님. 끔찍합니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농담 아냐. 내일 보자.”
그러더니 붓과 종이를 들고 전각 안을 껑충껑충 뛰어 다니면서 낙서를 시작했다.
기수는 고문이라는 말에 바짝 쫄아서 종이에 적힌 내용들을 외웠다.
그러나 그의 뇌 용량엔 한계가 있었다. 특히 휘발성메모리의 비율이 높아서 뒤의 내용을 외우다 보면 앞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다음 날.
기수는 최대한 사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심지어는 목욕물에 들꽃을 따다 넣기까지 했다.
“향기가 마음에 드시죠?”
“그래. 좋구나.”
그러나 두 시간 뒤. 심판의 순간은 가혹했다.
“한 장도 다 못 외웠구나?”
“좀 봐주십시오. 그 많은 걸 어찌 다 외웁니까?”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주마.”
“끄아아악………!”
기수는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어디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참을 수 없는 극심한 통증이 전신을 마구 헤집고 있었다. 해파리에게 쏘이면서 동시에 스턴건에 지짐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외우겠습니다! 제발….”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정말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반 시진 주마.”
고통에서 풀려난 기수는 미친듯이 종이의 내용을 외우기 시작했다.
북궁천은 냉정하게 다시 시험을 했고 기수는 다시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속으로 온갖 저주를 다 퍼부었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중엔 애원의 눈빛으로 북궁천을 바라봤지만, 그는 전혀 가엾어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히히덕거리며 자신의 고통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진짜 내가 이러다 죽어도 눈 하나 깜빡 않을 사람이야.’
기수는 다시 한 번 외울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싸이오닉 스톰 찜질을 피하기 위해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했다.
마침내 또 다른 반 시진이 지났을 때, 기수는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을 완수해냈다. 전부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다 외운 것이다.
‘와! 나도 하면 되는구나….’
갑자기 자신감이 급격히 고양되었다.
중원무림에 와서 의지력과 체력만 향상된 게 아니라 정신력, 집중력, 어쩌면 지능까지 좀 향상된 것 같았다.
북궁천은 기수의 성취에 대해 칭찬하지 않았다.
“자! 이건 오늘 외울 분량이다.”
“으아아! 사부님…. 이건 어제보다 많지 않습니까?”
“일신우일신이란 말도 모르느냐? 매일 조금씩 늘어야지.”
기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리고 그날 밤은 한숨도 못 자고 반복해서 외웠다.
‘영어, 수학 공부를 이런 식으로 했으면 지금쯤…..’
고문을 피할 수만 있다면 생전 처음 보는 지수함수 문제도 기냥 풀릴 것 같았고, 영어도 원어민과 조크까지 주고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에 깜빡 잠들었다 깨어난 기수는 화들짝 놀라 외운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다행히 상당부분이 남아 있었다.
‘가만 있어봐. 나 의외로 외우기도 잘 하는 거 아냐?’
시작은 고문을 피하기 위해서였지만 막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확인하고 나니까 도전의욕을 불태울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해가 떠오를 때쯤엔 마침내 두 번째 과제를 완전히 외우는데 성공했다.
기수는 엄청난 성취감을 느꼈다.
‘아! 진짜 되는구나….. 난 정말 천재였어!’
그러나 고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밤을 새는 바람에 정작 시험을 볼 때는 머리가 멍해져서 중간에 꼬이고 만 것이다.
그래도 고문을 한 번만 당하고 세 번째 과제를 받은 것은 큰 진전이었다.
세 번째 과제를 외울 때는 요령도 터득하게 되었다.
예전에 색욕을 억제할 때 단전에 의식을 집중하면 정신이 맑아지는 경험을 했는데, 외울 때도 단전에 의식을 집중하니까 평소보다 더 잘 됐다.
‘운기조식과 외우기를 병행하면 되겠구나!’
세 번째 과제는 고문 없이 통과했다. 엄청난 진전이었다.
기수는 공부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자신의 능력을 확인한 것도 기쁘지만, 북궁천의 지도에 따라 몸에 대해 구석구석 알고 나니까 무공에 대한 개념도 예전보다 더 넓고 깊어진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요혈과 급소의 위치만 아는 게 아니라 그곳이 요혈과 급소가 되는 원리를 이해하게 되니까 호기심과 탐구욕이 급증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처음에 분광권이나 잔백지 등을 배울 때도 이랬던 것 같았다.
뭔가 새로운 것, 스스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파고들 때는 엄청난 집중력이 발휘되는 것이었다.
북궁천은 기수의 많아지는 질문에 몹시 기뻐했다.
“히히…!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다니까.”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는지는 질문의 수준을 보면 딱 알 수 있기 마련이었다.
북궁천은 자기가 아는 바를 총동원하여 기수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었다.
북궁천 식 무공이론의 기초를 마스터한 기수는 매일 갖다 버리던 종이들을 한 번씩 읽어보게 되었다. 예전과는 다른 것들이 보였다.
예전엔 읽기는 해도 그 속뜻은 모르는 용어가 많았는데 이젠 다 이해가 되었다.
‘아! 배움엔 정말 끝이 없구나… 그리고 북궁천 이 사람은 천재다!’
무공의 완성도엔 솔직히 좀 문제가 있었다. 싫증을 빨리 내서 마무리까지 제대로 짓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공에 대한 접근방식에는 창의력이 넘쳐흘렀다. 이젠 기수도 그걸 알아볼 정도의 안목이 있었다.
‘이거 은자 한 냥은 너무 싼 거 아냐?’
백문조가 종이들을 탐내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기수는 종이들 중에서 독창성이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백문조에게 주지 않고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했다.
자기도 나름대로 무공관이 생겼기 때문에 뭔가 연구할 과제가 필요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