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96
살살 하겠다는 설매의 약속은 거짓말이었다.
그녀가 자기 욕심 다 채우는 것으로 스타트를 끊으니까 다른 사매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다들 기수가 환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렇게 된 데는 기수의 책임도 컸다.
아프다는 사람이 그렇게 굳건하게 버틸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기수는 사매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예전에도 복수에 성공한 후 미친 듯이 섹스에 열중하던 한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도 강한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부님의 원수도 갚았고, 사도도 하나 잡은 것이다.
파티를 원하는 마음이 은근히 있었다.
암경을 중단전에 가둔 이후로는 큰 통증이 없었고, 또 자기는 가만히 누워있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버티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1차전이 끝나자 설매는 바로 2차전을 시작했다.
이번엔 기수의 의견을 묻지도 않았다.
기수는 슬그머니 음양대법의 구결을 운용했다.
설매는 생긋 웃으며 협조해주었고, 다른 사매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지금 궁주의 내상을 치료해주는 거지?”
“맞아. 중단하면 안 돼.”
기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밥을 먹고 난 이후에는 사매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갔다.
그리고 혼자서 정좌하고 내상 치료에 집중했다.
상대편 진영에 내상 입은 진유룡을 치료하고, 예전보다 더 강한 고수로 만들어낸 자가 있다는 사실이 그를 자극했다. 안 그래도 숫자에서 밀리는데 레벨에서까지 부족하면 목표 달성은 까마득해지는 것이다.
‘이쪽엔 나 혼자뿐이니까 어쩔 수 없어. 내가 마스터가 돼야 해.’
못해낼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아직 무공을 창안할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기존 무공을 개량할 수준은 되었다.
조금만 더 발전시키면 개파조사 되지 말란 법 없는 것이다.
기수는 일단 진유룡의 암경 복제에 집중했다. 그리고 꼬박 사흘을 노력한 끝에 자신의 장심에 붉은 기운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상당히 지독한 수법이었다.
사냥감의 혈관에 독을 집어넣는 뱀의 독아와도 같았다.
그 암경은 기혈을 따라 흐르면서 내장기관의 작동을 방해하고 정지시키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막판에 자기가 조금 빨랐기 망정이지 진유룡한테 제대로 맞았다면 그 즉시 심장과 폐의 활동이 중단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기수는 중단전의 봉인을 풀었다.
확! 풀려나온 암경이 통증을 유발하려 했지만 복제에 성공한 기수에게 암경을 분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거울에 비쳐 보니 가슴에 있던 붉은 손자국도 사라졌다.
마침내 정상 컨디션을 되찾은 기수는 제대로 북궁심법 운기를 해보았다.
몸은 약간 지친 느낌이 있었지만 진원지기는 그대로였다.
‘회복 속도가 좀 빨라진 건가?’
정타는 아니었다고 해도 끔찍한 암경에 맞아 상당히 고생을 한 셈인데 의외로 몸 상태가 괜찮았다.
기수는 분광권으로 몸을 한 차례 풀었다.
그리고 뻗치는 기운을 이기지 못해 산채 밖으로 나가 선풍비로 이웃한 산들을 넘어 다녔다. 뭄 푸는 데는 역시 달리기가 최고였다.
어느 골짜기를 지나다가, 기수는 늑대 한 무리를 발견했다.
‘저런 놈들이 있으면 농민들이 위험할 수도 있을 텐데…’
자연을 보호하는 건 한참 나중 얘기고, 지금은 인간을 보호해야 할 시대였다.
기수는 늑대 무리 한 가운데 착지했다.
그러자 깜짝 놀란 늑대들이 개처럼 깨갱거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완전히 도망가지는 않고 주변을 맴돌다가 슬금슬금 간격을 좁혀왔다.
으르르…. 하는 소리와 드러난 송곳니가 장난이 아니었다.
기수는 오른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봤다.
그리고 장심에 진유룡의 붉은 암경을 만들었다.
자기가 만든 암경도 상대에게 같은 상처를 입힐 수 있는지 확인해 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기수는 자기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한 늑대를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그러자 탁구공 사이즈의 붉은 기운이 날아가 놈의 이마에 닿았다.
“깨갱!”
놈은 곧바로 사지를 뻗고 죽어버렸다.
‘너무 셌나? 사람보다는 체중이 덜 나가니까 좀 줄여보자.’
기수는 바둑알 정도 크기로 만들어 다른 놈에게 날려보았다.
이번에도 즉사였다.
기수는 크기를 더 줄였다. 그러자 더 이상 즉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괴로워 발버둥치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도망도 못 치고 혀를 빼물며 자빠졌다.
‘씨발! 날 이렇게 죽이려고 했던 거야?’
이미 죽은 진유룡이 새삼스럽게 미웠다.
늑대들은 동료들이 계속 죽어 넘어지자 겁먹고 도망쳐버렸다.
기수는 더 이상 암경을 테스트해 볼 필요가 없다 생각하고 도망치는 늑대무리에 손가락 발칸포를 시원하게 ‘부우욱~!’ 발사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아쉽게도 타이밍이 약간 늦어서 늑대보다 나무만 넘어졌다.
숲이던 전방 일대가 공터가 되는 순간이었다.
기수는 호흡이 살짝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붉은 암경과 파천강기는 내공 소모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는구나.’
암경을 날릴 때의 진기 소모량은 파천강기에 비하면 아주 미약했다.
기분 상으로는 전부 다 관통하고 박살 내 버리는 파천강기가 훨씬 통쾌하고 멋있지만 살상효율을 생각하면 암경 쪽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었다.
파천강기가 날개안정 철갑탄이라고 하면 암경은 생화학 무기쯤 될 것 같았다.
암경으로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거나 바위를 깰 수는 없지만 생명체는 아주 쉽게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신무기 하나 장착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가 당한 고통을 생각하면 별로 쓰고 싶지는 않았다.
죽여야 해서 죽일 뿐, 상대의 고통을 즐길 생각은 없기 때문이었다.
‘헤드샷 한 방으로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죽여주는 게 예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산채로 돌아가던 기수는 한 무리의 관군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소항산을 포위하는 대형을 취하고 있었다.
‘얘들 포기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네.’
자신과 사매들은 진유룡과 하매를 죽여서 복수를 달성했으니까 다 끝난 셈이지만 동창 입장에선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수는 관군의 머리 위를 비조처럼 날아 산채로 돌아간 후 즉시 사매들을 불렀다.
사매들은 환하게 웃으며 몰려왔다.
“내상 치료할 시간이지?”
“얼마나 기다렸다고.”
기수는 손을 내저어 그녀들을 진정시켰다.
“아! 그런 거 아냐. 설매 너 옷은 왜 벗어? 다시 입어. 어서.”
기수는 자기가 산채 주변에서 본 것을 얘기해주었다.
춘매가 별 거 아니란 듯이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여기 볼 일 없으니까 적당히 기회 봐서 도망치면 되지.”
그러자 동매가 물었다.
“여길 떠나면 어디로 갈 건데?”
춘매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사부와 사숙의 복수가 이렇게 빨리 완수될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후의 일에 대해 생각해둔 사람도 없었다.
사매들은 서로를 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시원하게 복수에 성공했지만 동창과의 원한은 더 깊어진 상태.
앞길이 평탄할 거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다.
풍매가 기수에게 물었다.
“궁주. 우리 어떻게 해야 돼?”
기수에겐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었다.
사도 진영의 최고 고수보다 더 뛰어난 마스터가 되도록 노력하면서 다음 사도들을 하나씩 제압해 나가야 했다.
그러나 사매들의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글쎄… 이제 너희들을 묶는 건 아무 것도 없잖아? 평소에 하고 싶었던 걸 하면 되지. 만경전장에서 가져온 돈이라면 어디 가서든 여생을 편안히….”
“난 궁주하고 같이 살고 싶은데?”
“나도!”
“나도…”
기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좀 생각해볼 문제였다.
사매들이 싫은 건 아니지만 부인을 다섯이나 거느린다는 것에 대해서 아직까지 어떠한 마음의 준비도 해본 적이 없었다.
‘가만있어 봐. 탁지연은?’
탁지연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이전에 만났던 미녀들의 얼굴이 촤르르~ 떠올랐다.
‘절대로 5명 이상 한 침상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기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윽!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지만 다시 또 생각이 났다.
‘한 번쯤은 내 한계를 시험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추매가 기수의 상념을 깼다.
“궁주! 지금 무슨 생각해?”
“응? 아, 아냐….”
“아니긴. 굉장히 음탕한 표정인데.”
“음탕이라니! 나처럼 순수하고 천진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어쨌거나 우린 동창에 쫓기는 몸이야. 여섯 명이 똘똘 뭉치지 않고 흩어졌다가는 차례차례 목숨을 잃게 될 거야.”
기수는 그녀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좋아서라기보다 생존을 위해서 뭉치겠다는 얘기로도 들려서 약간 섭섭하기도 했지만 개인행동을 하면 위험했다.
“어떻게 하면 동창이 우리를 쫓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풍매가 말했다.
“죽은 걸로 위장하는 건 어때?”
추매가 곧바로 반대했다.
“저들도 두 번은 안 속을 거야.”
“그럼 어쩌지?”
“일단 떠오르는 건 아주 멀리 가서 기문진 둘러치고 우리 여섯이 오순도순 아들딸 낳고 사는 거지. 호호호!…”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말이 오순도순이지 감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
“어쨌거나 완전히 포위되기 전에 여기를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자 춘매가 투덜거렸다.
“여기 꽤 괜찮은데 아깝다. 북경도 가깝고, 기문진도 아주 잘 만들어 놓았고…”
추매도 동의했다.
“맞아. 건물도 이 정도면 겨울나기에 문제없을 것 같은데…”
동매가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여긴 다 타버릴 거니까 아쉬워하지 마.”
기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가 왜 타?”
“우리가 최대한 멀리 도망가는 동안 시간을 끌어줘야지. 동창에선 무슨 수를 쓰건 이 산채를 다 부수고 불태울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야. 그때 우리가 없다는 걸 알겠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게 되는 거지. 호호호!….”
사매들 모두 괜찮은 생각이라고 동의했다.
그러나 기수 생각은 달랐다.
동매의 말처럼 된다면 노동력을 제공해준 60명의 산적들은 미끼 역할을 하다가 전부 참형에 처해지게 될 것이었다.
그들의 직업이 비록 양만을 괴롭히는 산적이라고 해도, 자기와 어떻게든 인연이 닿았던 사이니까 그런 식으로 죽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수가 말했다.
“내일 새벽 떠난다. 다들 준비해.”
“알았어!”
“그리고 이곳은 우리 혈매궁의 첫번째 아지트로 남겨둔다.”
“아지트가 뭐야?”
“은신처로 남겨둔다. 춘매 말대로 북경과 가깝고, 투자도 많이 했으니까.”
“하지만 동창에선 결국 여기까지 쳐들어 올 텐데.”
“우리가 다른 곳에서 모습을 보이면 여기 매달릴 이유가 없지.”
“그러면 우리가 위험해지잖아?”
기수가 씩 웃었다.
“동창에 진유룡보다 쎈 놈이 누가 남았지?”
사매들의 표정이 변했다.
진유룡보다 고수라면 창주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창주 정되 되는 사람이 직접 나서서 자기들을 잡으러 올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진유룡을 이긴 기수와 함께 있는 이상 안전한 것이다.
설매가 기수에게 말했다.
“여기 떠나는 기념으로…..”
“안 해! 그건 기념할 일이 아니라고. 그리고 난 다른 할 일이 있어.”
사매들과 헤어져 밖으로 나온 기수는 산적들을 연무장에 집합시켰다.
“그동안 잘 협조해줘서 고맙다. 저 호리병에 든 해독약을 마시면 중독은 말끔히 다 나을 것이다. 지금 관군이 산채를 에워싸고 있지만 우리가 내려가면 포위는 곧 풀릴 것이다. 너희들에게 돈을 좀 줄 테니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던지 근처에 땅을 사서 농사를 짓던지 마음대로 해라.”
그리고는 지난번 마경전장에서 집어왔던 자루에서 금원보 하나만 꺼낸 후 나머지는 전부 그들에게 내주었다.
그러자 산적 중 한 명이 물었다.
“궁주님이 저희들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적을 유인하시는 겁니까?”
“그럴 의도는 없어. 그냥 우리 길을 찾아갈 뿐이야.”
“여기로 다시 돌아오실 겁니까?”
“어쩌면….”
“그럼 우리가 여기를 지키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기수가 무시무시한 무공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다들 두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에 가능하면 계속 그의 부하로 남아 있고 싶은 것이었다.
무림에서 고수를 두목으로 모시는 것보다 마음 든든한 것은 없었다.
“갈 곳 없다면 여기 남아 있어도 상관없겠지.”
청소라도 하고 건물 유지보수라도 한다면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기수는 한 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언제 돌아올지는 몰라. 영영 안 올 가능성도 크고.”
“그래도 기다리겠습니다.”
“좋을 대로 해.”
기수와 다섯 사매는 산채 떠나는 기념행사를 한 뒤에 새벽 동트기 전 산 봉우리를 넘어 무작정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