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97
적당히 큰 도시에 가서 자신들의 존재를 짠! 하고 드러내면 소항산의 포위는 자동으로 풀릴 거라는 게 기수의 생각이었다.
기수는 경공술 시전하는 것을 즐겼다.
가장 빠른 탈 것이 말인 시대에 맞바람 시원하게 받으며 질주하는 건 상당히 즐거운 일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다섯 사매와 보조를 맞추다 보니 자기 욕심껏 최대 스피드를 낼 수는 없었다. 6명은 산 5개를 넘은 뒤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춘매가 기수에게 물었다.
“궁주. 산적들한테 자루째 다 주고 왔어?”
“응.”
“왜? 그거 굉장히 많은 액순데. 아깝지 않아?”
“그동안 공사하고 식량 사다 놓느라고 많이 썼는걸 뭐. 그리고 종업원 급여 떼먹는 악덕 사장이 되기는 싫었어.”
“죽이지 않고 살려준 것만도 다행이지. 그리고 그동안 그들이 일한 거 다 합해도 금화 한 두개면 충분했을 텐데.”
기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차피 내 돈도 아니었잖아.”
체크카드가 있는 시대도 아니니까 금, 은, 보석을 직접 들고 다녀야 하는데 그것도 꽤 무겁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우리 돈 좀 나누어줄까?”
“아니. 필요 없어.”
은 한 냥이 없어서 나무열매 따먹으며 연명하던 때도 있었지만 무공을 되찾은 지금은 돈에 구애받을 일이 없었다.
금화 하나면 충분히 한두 달은 버틸 수 있었고, 부족하면 낙양의 비밀창고에 가서 꺼내오면 되는 것이다.
그때. 기수의 기감을 자극하는 기도가 감지되었다.
기수나 손을 들어 올려 검지로 한 방향을 가리키자 사매들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기수가 가리킨 방향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하! 나를 이렇게 쉽게 찾아내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나타난 자는 20대 후반쯤 되는 사내였다.
춘매가 검을 겨누며 말했다.
“넌 누구냐? 어떻게 우리를 찾았지?”
사내는 진정하라는 손짓을 했다.
“검은 내려놓고 얘기합시다. 나쁜 의도를 가지고 온 것은 아니니까요.”
기수는 사매들에게 무기를 내리라는 수신호를 했다.
그가 보기에 사내는 상당한 고수였다. 비록 문사 차림에 무기도 없고 체형도 약간 말랐지만 그의 강함을 확연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적대적인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생김새도 자기보다는 약간 처지지만 호남형과 미남형의 중간이었으며 무엇보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악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기수가 나서서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누구고, 무슨 목적으로 접근했는지 말하시오.”
사내는 기수가 풍기는 기도에 일순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포권을 했다.
“저는 백모라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춘매가 다시 나섰다.
“백모라니? 왜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거지?”
“저의 제안을 수락하신다면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락하지 않는다면?”
“갈 길을 계속 가시면 되겠지요.”
“목격자를 놔두고?”
기수는 춘매를 진정시켰다.
“일단 얘기부터 들어보자고.”
문사 차림의 사내가 말했다.
“저는 여러분이 북경성과 소항산에서 한 일을 알고 있습니다.”
춘매의 눈빛에 살기가 번졌다. 다른 사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을 안다면 살려둘 수 없는 것이다.
기수는 그들에게 손짓을 한 후 물었다.
“그래서. 우리를 관에 고발이라도 할 생각입니까?”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설령 고발한다 해도 천하의 진천호를 제압한 고수에게 누가 감히 손가락 하나라도 댈 수 있겠습니까?”
기수는 문사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어떻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다 안단 말인가.
청년 문사가 말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제안은, 저와 손잡고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기수는 피식 웃었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는 사람과 말입니까?”
“저는 동창을 감시하고 견제하면서 동시에 무림의 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저와 한 편이 된다면 동창에게 쫓겨 다닐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매들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동매가 말했다.
“그렇다면 대장군부?”
천하에 감히 동창을 감시하고 견제한다고 말할 사람들은 그들밖에 없었다.
동창은 황제의 측근인 내시들이 주도하는 정보 조직이지만, 대장군부는 그들과 달리 무관으로 이루어진 정보 조직이었다.
황제 한 사람에게 충성한다기보다는 나라 전체의 안전을 걱정하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황제에 대한 충성을 전제로 하지만, 동창은 황제가 바뀌면 환관도 바뀌기 때문에 조직 수뇌부 전체가 물갈이되지만 군권은 황제가 바뀌어도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속성이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기수는 잘 모르지만 사매들은 동창에서 일했었기 때문에 대장군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춘매가 문사에게 물었다.
“당신의 직급은 어떻게 되나요? 우리가 믿고 몸을 의탁할 수 있을 정도인가요?”
공무원 출신답게 일단 직급부터 물었다.
조직 내에선 계급이 최고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 약속을 충분히 지킬 정도는 됩니다.”
사매들이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기수는 순간 깨달았다.
사매들은 어린 시절부터 동창이라는 국가기관을 위해 일하도록 훈련받은 요원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역시 그쪽으로 끌리는 게 분명했다.
자기처럼 자유롭게 천하를 주유하며 돌아다니는 거나, 어디 산속에 기문진 치고 들어앉아 오순도순 애 낳고 사는 것은 그녀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차선책에 불과했다.
기수는 문사 차림의 남자를 살펴보았다.
자기 말에 책임을 질 정도의 직급은 된다고 하는데, 무공 수준이나 태도로 봤을 때 거짓말은 아닌 듯 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들떠 있는 사매들을 봤다.
동창을 피하기 위해 대장군부의 그늘로 들어가는 게 과연 잘 하는 일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사매들이 원하는 건 분명해 보였다.
“당신과 손잡으면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합니까?”
기수는 일부러 대장군부가 아닌 당신이라고 말했다.
조직에 소속되기보다는 개인적으로 계약하는 편이 나중에 빠져나오고 싶어졌을 때 조금이라도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사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저와 손을 잡으면 그때그때 필요한 일들을 처리해주면 됩니다. 딱 집어서 어떤 일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여러분의 능력이라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급… 아니, 대우는 어떻게 해줄 생각입니까?”
“종7품 도사에 해당하는 녹봉을 지급해주고, 추가로 맡은 일의 성과에 따라 상급을 드리겠습니다.”
춘매가 물었다.
“우리에게 종7품의 정식 벼슬도 주어지나요?”
“원한다면 각 기관에 가서 통용될 정식 신분증을 만들어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군적에 올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사매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에게, 그것도 뭔가 비밀스러운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에게 정식 관직을 주지 않는 것은 동창이나 대장군부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가 문사에게 말했다.
“잠시 우리에게 의논할 시간을 주시오.”
“저쪽에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그가 멀어지자 춘매가 곧바로 말했다.
“하자! 좋은 기회야.”
그러자 예상대로 나머지 네 사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군부라면 동창에서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
“맞아. 도망자 신세로 떠돌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야.”
기수가 그녀들에게 물었다.
“그럼 저 사람과 손잡는 거다?”
“좋아!”
기수가 부르자 문사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다가왔다.
“결정하셨습니까?”
“딱 한 가지 조건만 만족하면 당신과 일하겠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임무를 제시했을 때 그걸 할지 말지는 우리가 결정하게 해주십시오.”
기수의 말은, 그의 명령을 듣는 게 아니라 꼴리는 대로 골라서 하겠다는 뜻이었다.
문사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매들도 그런 조건이 받아들여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동창도 그렇지만 대장군부는 군대였다.
명령이 떨어지면 이유 불문하고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수는 절대 그 조건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당신이 위험한 임무를 맡겨도 무조건 따라야 한다면 차라리 동창에게 쫓기는 편이 낫지. 적어도 위험을 피해 다닐 수는 있으니까.”
그리고 기수는 팔짱을 딱 꼈다.
그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혈매궁을 고용하고 싶다면 하고, 아니면 꺼지라는 태도였다.
솔직히 기수 개인으로 보자면 아무데도 묶이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오로지 사매 5명의 취업을 위해 하는 일이었다.
문사 청년이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 조건이라면 대장군부가 아닌 저 개인과의 접점만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오.”
문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는 백무영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매들이 깜짝 놀랐다.
“백무영이라면 부마도위?”
“대장군 백윤문의 둘째 아들?”
문사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저에 대해 알고 계시는군요.”
기수는 상대의 배경이 빵빵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대장군의 아들인 동시에 황제의 사위라면 동창쯤은 겁낼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자기가 한 약속에 책임 질 정도의 직급은 된다는 게 과장이 아니었다.
“일단 저와 함께 조용한 곳으로 가시지요.”
“그럽시다.”
혈매궁의 여섯 사람은 백무영을 따라 산을 내려갔다.
그곳엔 일곱 채의 가마가 대기하고 있었다.
가마는 차양이 쳐져서 밖으로 노출되지 않았고 각각 4명의 가마꾼이 들었는데 움직이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게 가마를 타고 한참을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와 도착한 곳은 북경성 남쪽에 자리잡은 한적한 장원이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안내되어 간 객청은 차분하고 정갈한 분위기였다.
백무영이 차를 대접하며 말했다.
“이곳은 천풍재라고 합니다. 제 별장 겸 서재이지요. 앞으로 여러분이 머무실 곳이기도 합니다.”
“천풍재라…”
기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범한 장원 같아 보이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고수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런 곳에서 지낸다면 동창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우리가 맡을 일은 무엇입니까?”
“하하! 뭘 그리 서두르십니까? 일단 며칠 쉬고 나서 얘기하시지요.”
“그럽시다. 까짓 거.”
백무영은 총관을 불러 일행에게 머물 곳을 안내해주게 했다.
후원으로 들어가자 건물들이 여러 채 보였다.
그들 중 두 채의 건물이 혈매궁에 주어졌다. 큰 건물에선 사매 다섯이 지내기로 했고, 기수는 조금 떨어진 작은 건물을 혼자 쓰기로 했다.
총관이 10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 하나를 기수에게 소개했다.
“이 아이가 공자님의 시중을 들 것입니다.”
동자는 꾸벅 절을 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기수는 시녀가 아닌 남자아이라는 사실에 살짝 실망했다.
그러나 시녀가 배정된다면 사매들이 그냥 놔두지 않을 것 같기는 했다.
총관이 기수에게 권했다.
“일단 목욕부터 하고 식사를 하시지요.”
“그럽시다.”
동자가 인도하는 곳으로 가 보니 목욕통에 이미 뜨거운 물이 들어 있고, 옆에는 갈아입을 새옷까지 있었다.
기수는 오랜만에 개운하게 목욕을 했다.
식사는 객청이 넓은 사매들 거처에서 함께 하기로 했는데, 요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기수가 젓가락을 바삐 움직이며 말했다.
“도대체 우리한테 어떤 어려운 일을 시키려고 이렇게 극진하게 대접하는 걸까?”
“무슨 걱정이야? 궁주와 우리가 함께라면 못할 일이 뭐가 있겠어?”
사매들도 모두들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어서인지 다들 피부가 발그레하고 뽀송뽀송, 매끌매끌 윤기가 흘러서 은근히 땡겼다.
‘햐! 다들 진짜 예쁘단 말야…’
기수가 그녀들에게 말했다.
“우리 대장군부와 함께 일하게 된 기념으로…. 어때? 응?”
당연히 오케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일단 며칠 지내면서 상황을 좀 보고….”
그동안 자유롭게 지냈지만 다시 조직 생활을 시작하려고 하니까 군기가 바짝 든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걸 마다하다니….. 별일이네…’
기수는 뭐 아무래도 좋았다. 사매들에게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자기도 지금 연구하고 연공해야 할 것들이 산적해 있었다.
백무영은 첫날 천풍재로 안내한 이후엔 보이지 않았다.
굉장히 바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나타나서 일행을 한 자리에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