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99
석초는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는 남자였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탄탄대로의 청년 무관이 강호인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싹싹하게 형님 대접을 했다.
기수는 그런 석초가 마음에 들었다.
잠시 후. 사매들이 여죄수를 데리고 나왔다.
기수는 그녀의 자태에 깜짝 놀랐다.
노숙자 코스튬일 때는 전혀 몰랐는데, 상당한 미녀였고 나이도 20대 초반 정도였다.
그녀가 기수에게 허리 숙이며 말했다.
“인간적으로 대우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기수는 시선이 다른 곳에 빼앗겨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참 감사할 만한 광경이었다. 참외보다는 확실히 큰 사이즈였고, 목욕 후라서 그런지 색깔도 뽀얀 게 정말 탐스러웠다.
사매들이 좀 더 큰 옷을 입히지 않은 게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옆을 보니 석초도 헤벌레한 표정으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헛기침으로 대충 사매들의 눈도끼를 피한 기수는 곧바로 출발을 명령했다.
혈매궁의 여섯 사람과 석초, 그리고 4명의 가마꾼은 수갑과 족쇄 채운 여죄수를 데리고 천풍재를 나서서 길을 갔다.
임무 때문에 다들 남자 하인 복장을 했고. 기수와 석초만 무복을 입었다.
사람들이 눈에는 부잣집 마님이 가마를 타고 외출하는데 하인과 가마꾼이 9명이고 무사 2명이 수행하는 행렬로 보였다.
기수는 그제서야 여죄수가 궁금해져서 석초에게 물었다.
“저 여자는 도대체 누구야?”
“서류 안 읽어 보셨습니까?”
“별로 관심이 없어서….”
석초는 한숨을 내쉬었다. 팔자에도 없는 형님이 하나 생겼는데 왠지 모르게 자기를 엄청 고생시킬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받은 것이다.
“그녀는 소서시. 경사에서 유명한 기녀였습니다.”
“아! 기녀 출신이었군. 어쩐지…”
기수는 고개를 쳐들고 아까 본 그림을 다시 떠올렸다.
딱 동매와 춘매 중간 사이즈라고나 할까. 형태는 어떨지 궁금했다.
그 다음 얘기를 기다리는데 아무 얘기가 안 들려서 돌아보니 석초도 고개를 쳐들고 므흐흐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수는 헛기침으로 그를 깨웠다.
“그런데 그녀를 어디로 데려가서 누구와 바꾸는 거지?”
“정말 안 읽어보셨군요. 우리의 목적지는 서주의 패천방으로 데려가서 그들이 감금하고 있던 우리 동료와 바꿔 오는 것입니다.”
“패천방이 뭐 하는 덴데?”
석초는 한 번 더 한숨을 내쉰 후 설명해주었다.
“겉으로 드러난 건 흑도 방파이지만 우리는 그들이 일원신교의 일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심었던 거지요.”
“일월신교라면 천마교와 함께 마교의 두 축이잖아.”
“그렇습니다. 천마교가 하북과 하남 일대를 장악했다면 떨어져 나간 일월신교는 강남과 장강 일대를 장악했지요.”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석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저 여자도 첩자라는 얘기가 되는군.”
“그렇습니다. 조정의 실권자들을 유혹해서 정보를 빼내고 자기네 편으로 회유하려고 시도했었죠.”
“그랬군.”
서로간에 침투시켰던 스파이를 교환하는 일이라면 이 정도까지 인원을 투입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아! 그래. 일단 우리 능력을 테스트하는 거라고 봐야겠군.’
그리고 죄수가 여자니까 맡긴다는 의미도 포함시킬 수 있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군.”
“그래도 경계를 늦추면 안 됩니다. 요즘 강남 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거든요.”
자신과 사매들이 있는 한 그래봤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마를 메고 가는 행렬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하루 온종일 걷고, 객잔 만나면 먹고 쉬다가 또 걷고…
따분하다 보니 쉬는 시간에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냥 내가 업고 서주까지 휭! 달리면 하루만에 끝날 일인데…’
업는 김에 중간에 잠깐 쉬었다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모종의 상상을 하는데 춘매가 와서 등을 툭 쳤다.
“무슨 생각 해?”
“응? 아, 아냐. 아무 것도.”
“궁주…. 저 여자 생각했지?”
“하핫! 어이가 없네. 꽃보다 아름다운 사매가 다섯이나 있는데 내가 왜 여죄수를 생각하겠어?”
그 정도 찔러보는데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저 여자. 목욕할 때 보니까 아주 근사하던데?”
“뭐, 뭐가?”
“관심 있어?”
“아니. 전혀.”
춘매는 씩 웃은 후 말했다.
“등에 온통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써놨는데 솜씨가 보통이 아니더라고.”
“문신을 했어?”
“응. 등 전체에.”
“햐! 여자도 그런 식으로 문신을 하나?”
문신 한 여자하고는 해본 적이 없었다.
등에 했다면 정상 포지션으로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겠지만 뒤쪽 포지션이면 하는 내내 보일 텐데, 도대체 무슨 그림일지 궁금했다.
“뭐를 그렸어?”
“산수화.”
“설마…”
“진짜야. 아! 확인해 볼 생각은 하지 마.”
“안 한다니까! 도대체 날 뭐로 보고!”
발끈해서 호통을 치니까 춘매가 씩 웃더니 한 마디 했다.
“색마.”
“으으….”
그 호칭은 정말 억울했다. 상호 합의하에 한 건 풍매 정도고, 나머지 4명은 전부 나약한 자신을 덮치고 강제로 욕보인 여인들 아니던가.
그래놓고 이제 와서 색마라니…
밤이 되면 다섯 사매와 소서시가 한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는 다음날 아침까지 나오지 않았다. 사매들 모두 임무에 충실한 태도를 보였다.
천풍재 밖으로 나오면 사매들과 섬씽이 가능할 거라고 기대하던 기수로서는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설령 그녀들이 다른 태도를 보였다고 해도 석초와 4명의 가마꾼들 때문에 성사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 했다.
객지에 나와 좁은 방에서 함께 지내는 처지에 운기조식이나 무공연구를 할 수도 없어서 기수는 매일 밤 석초와 술을 마셨다.
얘기를 나눠 보니 무관임에도 불구하고 무식하지 않고 아는 게 많았다.
“너 정도 인재면 백형도 꽤 중용하겠다.”
“저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걱정 마. 내가 나중에 보고서 쓸 때 네 얘기 잘 해줄게.”
“고맙습니다. 형님.”
“자, 자… 마시자고.”
그렇게 꼬박 닷새를 걸어 제남부를 지난 일행은 제와령이라는 고개를 넘게 되었다.
오르막길은 가마꾼 역할을 맡은 군관들 모두가 싫어했다.
죄수는 마님처럼 편안히 가고, 자기들만 고생하는 게 기분 좋을 리 없었다.
행렬이 막 언덕 정상에 도착할 즈음.
기수가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렸다.
“정지!”
그러자 사매들은 순식간에 무기를 뽑아 들고 사방을 경계했다.
석초와 가마꾼들도 경계의 빛을 띠었다.
기수가 전방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 매복 들켰다! 나와라.”
아무 반응이 없었다.
기수는 씩 웃고는 돌맹이 하나를 집어 들어 숲을 향해 던졌다.
몸쪽 높은 직구는 정확하게 누군가의 헬멧을 강타했다.
“크아악!….”
비명이 터지자 곧 좌우에서 사람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인원은 30여명. 저마다 차림새와 무기가 제각각이었다.
그들 중 덩치 큰 사내가 대도를 쿵! 소리 나게 땅에 찍으며 말했다.
“이놈들! 우리는 제와령의 산적들이다! 가진 것 전부 내놓아라!”
기수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쁜 어조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지루하지 않게 해주셔서.”
산적 두령이 다시 호통을 쳤다.
“가진 것 전부 내놓고 저 가마도 여기 놓고 가라. 말을 들으면 곱게 보내주겠지만 만약 불복하면 네놈들을 전부 죽일 것이다.”
기수가 석초와 사매들에게 말했다.
“이건 나 혼자 처리할게. 아무도 나서지 마.”
그리고는 장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섰다.
“너희들. 녹림72채는 전부 난주로 몰려갔는데 여기 남아서 뭐 하냐? 설마 녹림72채에 끼지도 못하는 허접한 수준인 거냐?”
“흐흐흐…. 기어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게로구나. 장팔!”
두령의 부름에 눈매가 날카로운 사내가 나섰다.
“예! 두령님.”
“저놈은 제가 죽여라.”
“알겠습니다!”
기수는 어이가 없었다.
“야! 아무리 오랜만에 만난 여흥이라고 해도 이런 식은 아니다. 한꺼번에 덤벼.”
“닥쳐라!”
장팔이란 사내는 자기 무기를 꺼내들었다.
순간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을 토했다.
그것은 유성추였다. 예전에 도전했지만 결국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던 무기.
기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좋아! 일 대 일로 한 번 붙어보자!”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동굴검법 기수식을 취했다.
순간 장팔이 잽싸게 유성추를 던졌다.
“죽어랏!”
기수는 깜짝 놀라 그 추를 간신히 쳐냈다.
‘이 새끼. 뭐야!….’
단언컨데, 그들은 산적이 아니었다. 산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고수였다.
기수가 계속 수세에 몰리자 석초와 사매들도 상황을 알아차렸다.
산적을 가장한 고수.
다섯 사매는 가마를 에워쌌고, 가마꾼들도 모두 가마를 내려놓고 가마 아래 쪽에 숨겨두었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기수는 계속해서 밀렸다.
검으로 상대의 유성추 2개를 간신히 쳐내기만 할 뿐 반격을 못했다.
그 광경을 유심히 보고 있던 춘매가 소리 질렀다.
“장난 그만 치고 어서 끝내!”
그러자 기수가 대답했다.
“아직 안 돼. 좀 더 볼 게 있단 말야.”
기수는 상대의 유성추 다루는 법을 유심히 관찰하기 위해 일부러 방어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팔이 비록 산적이라고 하기엔 놀라운 고수였지만 기수에 필적할 수준은 아니었다.
자기가 곧 이길 거라고 생각하던 장팔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기수가 자신을 상대로 본 실력을 숨길 정도의 고수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놈! 죽어랏!”
기합을 내지르며 공격하는 순간, 기수의 검이 번개처럼 그의 대맥혈을 후려쳤다.
“크으윽….!”
찔린 게 아니라 맞아서 점혈 당한 장팔은 신음을 토하며 쓰러졌다.
그러자 산적 두목이 크게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총 공격! 전부 죽여라!”
30여명의 산적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석초도 장검을 뽑아 들고 고함을 지르며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산적들의 무공은 확실히 보통이 아니었다.
석초는 두 명을 연달아 찔러 죽였지만 5명에게 포위되자 수세에 몰렸다.
기수가 산적들을 공격하여 포위망을 풀어주었다.
“고맙습니다! 형님.”
“두목은 내가 잡을 테니까 가마를 지켜.”
“알겠습니다.”
그러나 가마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사매들의 무공이 워낙 뛰어나서 산적들은 전혀 접근을 못 하고 있었다.
세 배에 이르던 수적 우위가 어느새 2배 이하로 줄어들자 두령은 사태를 파악했다.
“철수다! 모두 퇴각하라!”
그리고 자신도 도망치려 했다.
“어딜 가시나? 나한테 허락도 안 받고.”
기수의 장검이 길을 막았다.
산적 두령은 대도를 휘둘러 기수를 베려 했다.
내외공을 겸비한 멋진 도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가 기수였다.
겨우 서너 초식만에 칼 움직임이 혼란스러워지면서 결국 어깨를 찔려 칼을 놓치고 연달아 잔백지에 마혈을 짚여 쓰러지고 말았다.
기수가 뒤를 돌아보니 상황은 정리되어 있었다.
부상자와 시신을 남겨두고 나머지 산적들은 전부 도망친 상태였다.
석초는 신음하는 부상자들을 자신의 검으로 전부 찔러 죽였다.
전원 확인사살을 마친 그가 덩치 큰 두령을 들쳐 메고 말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납시다.”
기수도 그를 따라서 장팔을 들쳐멨다. 그리고 유성추도 챙겼다.
전에 만든 것에 비하면 좀 더 크고 무거운 편이었다.
30분 정도 달려 한적한 곳에 도달하자 석초는 두령과 장팔을 나란히 앉혀놓고 그들의 마혈을 푼 뒤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우, 우리는 제와령의 산적입니다.”
석초가 피식 웃은 뒤 주먹으로 두령의 눈두덩을 빡! 소리나게 한 대 친 후 그 옆의 장팔에게 다시 물었다.
“너희들의 정체를 밝혀라. 바른 대답이 나올 때까지 난 이걸 밤새도록 할 수 있어.”
주먹이 눈 앞에서 왔다 갔다 하자 겁먹은 장팔은 침을 꿀꺽 삼킨 후 말했다.
“사, 사실… 저희는 패천방의 청부를 받았습니다.”
“패천방이라고?”
“예. 그, 그렇습니다. 여기서 기다리다가 가마 안에 든 사람을 구출해 오면 거액의 사례금을 주겠다고 해서….”
“이놈들이…”
석초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포로교환을 하자고 불러놓고 중간에 사람을 가로채고 자기네가 잡은 포로는 내어주지 않겠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