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00
석초가 기수에게 말했다.
“저쪽에서 약속을 깼으니까 아무래도 이 임무는 원점에서부터 다시 검토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설마… 되돌아가자고?”
“일단 근처의 도지휘사사를 찾아가 머물면서 시랑님에게 자세한 내용 적은 서찰을 올리고 지시를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 그건 안 되지.”
전화라도 있다면 모를까, 인편으로 전해지는 서찰이 왔다 갔다 하는 걸 기다리려면 시간이 적어도 한 달은 걸릴 것이었다.
기수는 이런 단순한 임무에 그렇게 오랜 시간 매이고 싶지 않았다.
능력을 인정받은 후 좀 더 고급 정보에 접할 수 있게 되면 강호 정세를 세밀하게 파악하면서 사도가 있음직한 위치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산적을 가장한 습격 한 번 받았다고 일정을 늦출 수는 없었다.
“이번 임무는 내가 책임자지?”
“물론입니다.”
“그럼 내가 하자는 대로 하는 거야. 우리는 패천방까지 무조건 간다.”
“하지만 저들은 우리 쪽 사람을 내놓지 않을 겁니다.”
기수는 씩 웃었다.
석초는 꽤 괜찮은 녀석이지만 군관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공무원 마인드가 깊이 박혀 있었다. 명령에는 성실하게 복종하지만 뭔가 자기가 책임져야 할 일은 피하는,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도 지시를 기다리자는 생각을 먼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수는 공무원이 아니었다.
“만약 저들이 내놓지 않는다면 우리가 빼앗으면 되지. 저들이 시도했듯이.”
“하지만 패천방은 큰 문파입니다. 그들을 상대로 우리 11명이…”
“왜? 못 할 것 같아?”
석초는 잠시 멍하니 기수를 보다가 결국 씩 웃었다.
“형님과 함께라면 왠지 가능할 것 같군요.”
“후후… 다 잘 될 거야. 우리 임무는 어쨌거나 우리 쪽 사람을 인수받아 오면 되는 거고. 만약 그게 잘 안 되면 우리도 포로를 돌려주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아주 간단한 일이야. 일일이 백형한테 물어볼 필요가 없어.”
“맞습니다! 형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좋아. 일단 편한 길은 버리고 걸어서 산을 넘자. 저들이 예상 가능한 경로로 가는 건 우리한테 불리할 수도 있으니까.”
일행은 즉시 가마를 버리고 소서시를 걷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계산착오였음이 곧 밝혀졌다.
추가된 두 명의 포로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상반신 일부 점혈을 했기 때문에 진행속도가 늦춰진 것은 그렇다 쳐도 소서시는 무공을 전혀 할 줄 몰라서 산길을 걷는데 익숙하지 못했다.
“조,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어디서 엄살이야! 어서 걸어.”
동매는 한 대 때리기라도 할 듯이 주먹을 치켜들며 소서시를 위협했다.
기수가 말했다.
“천천히 가자고. 무리해서 좋을 일 없으니까.”
소서시는 기수에게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기수는 그냥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 말았다.
사매들이 전원 도끼눈을 뜨고 자신을 노려봤기 때문이다.
산길로 가니까 확실히 적의 매복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자 잠을 자는 게 문제였다. 14명이 노숙하기엔 장비도, 식량도 부족했다.
기수는 날이 어두워지자 다시 관도로 돌아갔다.
객잔을 잡아 머물 방을 정하고 밥을 먹고 나자 석초는 4명의 가마꾼들에게 2명씩 맞교대로 객잔 주변을 지키도록 했다.
낮은 무사히 넘어갔지만 밤사이 습격을 당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음날 일찍 출발하기 위해 다들 잠자리에 들고 3시간 정도 지난 한밤중.
기수는 눈을 번쩍 떴다.
숲에서 뭔가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가 벌떡 일어나서 장검과 유성추를 챙겨 들자 옆에서 자고 있던 석초도 덩달아서 함께 일어났다.
“왜 그러십니까? 형님.”
“밖의 보초병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
그 말에 깜짝 놀란 석초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움직임으로 창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무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웬놈들이냐!”
“발각되었다! 총 공격하라!”
다른 방에서 자고 있던 사매들도 무기를 들고 뛰어 나왔다.
어느 틈엔가 주변 숲과 마당, 객잔 내부까지 온통 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수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장검을 휘두르며 적을 향해 뛰어들었다.
적의 무공은 이번에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역시 기수나 사매들과는 미스매치였다.
순식간에 사상자가 늘어나자 적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퇴각하라!”
“흥! 누구 마음대로?”
춘매와 동매, 추매와 설매가 도망치는 놈들을 추격하며 닥치는 대로 찍어 넘겼다.
그녀들이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이후엔 정말 용서가 없었다.
기수도 슬쩍 겁이 날 정도의 기세였다.
기수는 혹시라도 그녀들이 다칠까봐 따라붙었다.
그때 천장 일부가 무너지면서 한 무리의 적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차!”
기수는 풍매 혼자 소서시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히 돌아갔다.
지붕을 부수고 뛰어 들어온 놈은 모두 4명은 즉시 풍매를 포위 공격했다.
가녀린 여인 한 명이라고 우습게보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풍매가 그들 4명을 하나씩 제압할 기세로 맹렬히 검을 휘둘렀다.
거기에 기수까지 달려오자 그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갑자기 암기를 꺼내어 던지기 시작했다.
막 도착한 기수는 그들이 던지는 암기를 보고 외쳤다.
“풍매 조심해! 암기에 독이 묻어 있어.”
풍매 역시 청녹색으로 번뜩이는 표창을 알아보고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기수는 장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암기들을 모두 쳐냈다.
그러자 침입자들의 표정이 변했다.
그들은 갑자기 목표를 바꾸어 소서시를 향해 표창을 던졌다.
기수는 깜짝 놀랐다.
그녀를 빼내가기 위해서 이런 무리한 시도를 반복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죽이려고 하는 것은 전혀 예상 밖의 행동이었다.
소서시도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기수는 날아가는 표창들을 향해 잔백지를 날렸다.
그러자 모든 표창들이 공중에서 경로가 바뀌어 벽에 박혔다.
침입자들은 그걸 보고 깜짝 놀라 일제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기둥에 묶여 있던 산적 두령과 장팔에게 표창을 날려 그들의 목숨을 끊어 버렸다.
“뭐 저런 놈들이 다 있어?”
기수는 어제 습격한 자들과 오늘 습격한 자들이 같은 편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선풍비로 따라붙어 놈들을 전부 점혈해 버렸다.
잠시 후. 석초와 사매들이 돌아왔다.
석초는 바닥에 쓰러진 놈들을 보자 달려와서 닥치는 대로 발길질을 했다.
“이 새끼들! 너희들이 감히….”
가마꾼으로 따라온 부하들이 이번 싸움에서 모두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 분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석초는 4명을 반쯤 죽도록 패준 후에 아혈을 풀어 놓고 심문을 했다.
“너희들은 누구냐!”
“저, 저희들은 패천방의 청부를 받고 여자를 빼내가기 위해 왔습니다.”
“너희들도냐?”
그러나 석초와 달리 기수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거짓말은 작작하고. 진짜 너희들에게 이 일을 맡긴 게 누구지?”
“패천방입니다.”
“나한테 거짓말은 안 통해.”
석초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형님은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놈들. 소서시를 죽이려고 했어. 정말로 패천방이 시켰다면 그럴 리가 없잖아.”
“아! 그렇군요. 그럼 누군가 우리와 패천방의 교환을 방해하려는 걸까요?”
“저기 묶인 동료를 죽여 입을 막은 걸 보면, 패천방에 떠넘기고 숨으려는 자들이 있는 건 분명해.”
석초는 한 놈의 멱살을 잡고 일단 몇 대 팬 후 물었다.
“누구냐? 배후가.”
“저, 저희들은 그저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배후는 모릅니다.”
“누가 시켰단 말이냐?”
“저희 방주님의 명에 따랐을 뿐입니다.”
“네놈 방파가 뭔데?”
“사혼방입니다.”
석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죽은 놈들도 너희 사혼방 소속이냐?”
“아닙니다. 저들은 우룡당으로 알고 있습니다.”
석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혼방과 우룡당이라면 패천방과 함께 모두 일월신교 소속이 아니냐? 그런데 왜 같은 편끼리 따로 노는 거지?”
기수도 궁금증을 느꼈다.
그는 석초와 달리 비폭력적인 심문방법을 알고 있었다.
한 놈의 앞에 앉아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보며 염정구심술을 시전했다.
확실히 사혼방 출신이고 자기네 방주에게 명령을 받은 것은 맞았다.
서주로 향하는 길목에 매복하고 있다가 관군 무리가 나타나면 여자를 빼앗아 오고, 여의치 않으면 죽이되, 사로잡혔을 경우 패천방이 시켰다고 하라는 명령이었다.
기수는 소서시에게 가서 물었다.
“일월신교에서 왜 널 죽이려고 하지?”
“예? 그, 그럴 리가 없어요.”
“아까 표창이 너를 향해 날아왔던 거 기억하지?”
“예. 그때 제 목숨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분명히 너를 죽이려는 거였어. 왜 그랬다고 생각해?”
“전 모르겠어요. 왜 저를 죽이려고 하는지….”
그러더니 그녀는 소매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다.
옆에서 동매가 그녀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야. 연기하지 말고 똑바로 이실직고 해.”
그러나 기수는 이미 염정구심술로 소서시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 무슨 비밀을 간직하거나 한 게 아니었다.
기수는 그녀가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첩자로 활동하다가 들켜서 수감생활을 한 것만 해도 끔찍할 텐데, 이제 자기네 편으로 돌아가는 마당에 동료라고 믿었던 자들이 자기를 죽이려 하고, 황당하게도 그들이 그러는 이유를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기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해주었다.
“네 말을 믿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네 목숨을 내가 지켜줄 테니까 마음 놔.”
“고맙습니다!”
소서시는 기수의 품에 와락 안겼다.
사방이, 심지어는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까지 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기를 보호해주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 더 이상 고마울 수 없었던 것이다.
기수는 그녀의 볼륨이 꽉 밀착해 오는 느낌에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사매들 눈치 때문에 그녀를 안아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밀어낼 수도 없어서 참으로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다. 그는 속으로 외쳤다.
‘야! 서지 마! 죽어! 죽어!’
소서시가 위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전 지금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원하신다면 저를 드릴게요.”
아무리 기녀 출신이라고 해도 대담한 제안이었다.
기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안 그래도 바짝 밀착된 그녀의 따끈따끈, 말랑말랑한 몸 감촉이 장난이 아닌데 위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예쁜 얼굴까지 더해져서 불을 확! 당겼다.
그러나 퍽! 소리가 나더니 소서시는 얼굴을 기수 가슴에 찧고 말았다.
춘매가 손바닥으로 그녀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다.
“이 년이 어디서 개수작이야?”
소서시는 화들짝 놀라 기수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춘매에게 머리 숙여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전 여러분이 같은 사문이라 무슨 특별한 관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제 보니 당신의 정인이었군요.”
“그래. 궁주님은 내 남자야. 앞으로 그에게 눈길 한 번이라도 주면 눈알을 확! 파내서 까마귀한테 던져줄 테니까 그리 알아.”
“아, 알겠습니다.”
석초는 당황한 표정으로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했다.
기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석초는 어여쁜 춘매 입에서 그런 말들이 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기수가 모두에게 말했다.
“어쨌거나 패천방이 배후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해. 우룡당과 사혼방이 패천방의 일을 방해하려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거기 가는 걸 막을 수는 없을 거야. 이왕 다들 잠이 깨었으니까 이대로 서주까지 달려서 일을 끝내버리자고.”
모두들 동의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석초가 말했다.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는 부하들의 무덤을 팠다. 차마 시체를 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기수도 그를 도왔다. 네 사람을 안장한 석초는 그들의 명복을 빈 후 이번에 습격한 사혼방 놈들을 전부 끌어다가 무덤 앞에서 자기 검으로 찔러 죽였다.
부하들 영전에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다.
기수는 사매들에게 부탁했다.
“시간을 단축시켜야 하니까 힘 좀 써 줘. 아니면 내가 업어도 되고.”
“우리가 할게.”
사매들이 소서시를 교대로 업은 덕분에 일행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서주로 갈 수 있었다.
아침 일찍 도착한 일행은 곧바로 패천방을 찾아갔다.
패천방은 강변에 커다란 장원을 가지고 있었다.
석초가 문지기에게 찾아온 용건을 얘기하자 한참을 기다리게 한 후 문이 열렸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수십 명의 방도들이 좌우로 도열해서 겁을 주고 객청 앞에 깡마른 40대 사내가 뒷짐을 지고 서서 일행을 맞았다.
그는 체형만 마른 게 아니라 눈은 쑥 들어가고 얼굴빛이 거뭇거뭇해서 얼핏 보면 미이라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하하!…. 어서 오시오. 내가 패천방의 방주 호중만이오.”
목소리는 의외로 좋았다. 아무리 흑도 방파라고 해도, 정도 문파라면 모를까 관군을 상대로 적개심을 드러내서 좋을 일은 없기 때문에 나름 예의를 지키려는 모습이었다.
기수가 나서서 말했다.
“난 북경에서 온 양모라 하오. 길게 얘기할 것 없이 바로 일을 시작합시다.”
“하하! 성격이 급하시군. 좋소.”
그가 손짓을 하자 안쪽에서 한 남자가 끌려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