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07
기수는 심호흡으로 기식을 안정시키며 상대의 공격을 기다렸다.
월영검법보다는 검의 무게에 맞는 동굴검법을 쓸 생각이었고, 언제든 파천강기를 끌어올릴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도 해두었다.
기수는 예전과 달랐다.
무학에 대한 깊이가 생겨서 효율을 중시하게 되었기 때문에 파천강기는 최후의 일격으로 준비만 해둘 뿐, 불필요한 내력 소모를 할 생각은 없었다.
박피왕이 양손을 펼치자 어느새 그의 손엔 2개의 큰 낫이 들려 있었다.
자루 길이가 1m 정도에 날의 길이도 1m 정도인 좀 독특한 외형이었다.
기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걸 보면 진짜 기역자를 모를 수 없겠다.’
박피왕이 내공을 끌어올리자 그의 옷자락이 부풀어 올랐다.
그 역시 기수를 만만하게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흐흐흐….. 일단 팔부터 하나 자르고 시작해볼까?”
순간, 그의 두 자루 낫이 귀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횡으로 베어 들어왔다.
기수는 그 스피드에 깜짝 놀랐다.
두툼하고 긴 날 때문에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 무기였는데 박피왕은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 자유자재로 휘둘러 댔다.
선풍비로 황급히 피하던 기수는 검으로 그 날을 막아야 했다.
1m나 되는 긴 날을 보법만으로 피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쨍! 가가가각…..’
날과 날이 긁히는 소름끼치는 굉음과 함께 기수는 답답한 신음을 토했다.
“으음…..!”
기혈이 격탕하는 게 느껴졌다.
‘이 놈 뭐 이렇게 세냐? 장난 아닌데?’
손목이 울려서 아플 지경이었다.
뒤에서 사매들이 외쳤다.
“힘 내!”
“궁주. 조심해!”
기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본격적으로 검초를 펼쳐내기 시작했다.
‘상대가 강한 건 강한 거고, 난 내 무공을 펼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기회가 없는 것이다.
스페인 국대하고 붙는다고 해도 9-0-1 포메이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기수는 상대의 두 자루 낫에 버거움을 느끼면서도 계속 기회를 노렸고, 날카로운 초식으로 박피왕을 두세 걸음 물러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흐흐흐…. 제법이구나.”
그러나 박피왕은 별로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낫은 더 빠르고 강하게 기수를 압박해왔다.
“으으….”
기수는 상대가 의외로 꽤 신중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 번 강하게 밀어붙여 자신의 능력을 확인한 후 거기에 맞춰 조금 더 강도를 높이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젠장! 이런 식이면 기회를 노리기도 쉽지 않겠는데…’
방심도 하지 않고 조금씩 더 세게 눌러서 상대를 짜부러트리는 싸움 운용방식은 비록 적이라 해도 배울 바가 있었다.
문제는 그 상대가 자기라는 점이었다.
더 강한 반격은 상대의 적응력만 높여줄 뿐이지만 당장 낫에 베이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흐흐흐…. 그래. 네가 가진 것을 좀 더 내놔봐라.”
기수는 호흡이 버거울 정도의 압박감을 느꼈다.
‘파천강기 한 방으로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
그 유혹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떻게든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기수는 참았다.
그걸 써서 성공하면 좋지만 만에 하나 실패하면 더 이상은 대응수단이 없는 것이다.
파천강기는 죽기 직전까지 남겨두어야만 했다.
스나이퍼의 마지막 한 발인 셈이었다.
“윽…!”
낫이 팔을 스치고 지나갔고 베인 옷자락 사이로 피가 보였다.
박피왕은 껄껄 웃었다.
“흐흐흐…. 출혈이 계속되면 위험해지지 않겠느냐? 지혈할 시간을 줄까?”
마음을 교란시키는 수작이었다.
기수는 차라리 검 대신 분광권을 쓸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곧 머리를 가로저었다.
‘견뎌야 한다!’
파천강기나 분광권은 모두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려는 유혹에 불과했다.
맨손으로 두 자루 낫에 대항하는 게 더 위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끝까지 버티면서, 기수는 그동안 이론으로만 알고 있던 많은 부분을 실전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황이 바뀌지는 않았다.
여전히 밀렸고, 박피왕은 능글맞게 웃으면서 조금씩 공세를 강화할 뿐 절대로 빈틈을 노출하지 않았다.
‘과연 역전의 기회가 있을까?’
기수뿐만 아니라 사매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
제3자 입장에서 싸움을 보며 상황을 더욱 확연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일제히 박피왕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다섯 자루 검이 날카로운 검광을 뿌리자 박피왕도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펼쳐진 매화오궁진은 박피왕을 몰아붙였다.
박피왕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기수는 사매들의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이 살짝 부끄러웠다.
그러나 생사를 가르는 마당에 1대1로 이기는 게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공평하게 하려면 체중부터 재고 무기도 같은 거 썼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기수도 매화오궁진에 가세했다.
원래 매화진의 원형은 매화육궁진이었다.
그것을 기수가 오궁진으로 변형시킨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매가 빠진 자리에 기수가 들어가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공격력이 더욱 배가된 느낌이었다.
석초가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형님!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됩니다.”
이길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러나 박피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여섯이 덤비니까 이제야 싸울 맛이 나는구나. 흐흐흐….”
순간 그의 낫이 자루에서 분리되면서 하나는 기수를 향해, 다른 하나는 설매를 향해 날아갔다. 육궁진에서 가장 강한 구성원과 가장 약한 구성원을 동시에 노린 것이다.
기수는 깜짝 놀라 그것을 쳐냈다. 무기가 분리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엉겁결에 반사적으로 나온 대응이었다.
설매도 황급히 그것을 쳐냈는데 그녀는 기수와 달리 타격이 있었다.
“으윽…..!”
검이 중간에 부러져버렸고 피도 한 모금 토했다.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렇게 피해를 입힌 낫의 날 끝에는 쇠사슬이 달려 있어서 파이프 형태의 자루와 연결되어 있었다.
박피왕은 그것을 채찍처럼, 철퇴처럼 휘두르기 시작했다.
여섯 명은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기수는 회전하는 날들을 도맡아 방어하면서 생각했다.
‘비장의 한 수는 나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설매의 내상으로 인해 육궁진의 균형은 무너졌다.
‘오궁진만으로 버틸 수 있을까?’
버티는 건 가능할 것 같았지만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과 사매들이 힘을 합해도 박피왕을 압도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 좀 충격적이긴 했다.
‘그래도 우리 6명이 목숨 걸고 덤빈다면 이길 수는 있을 거야.’
문제는, 박피왕이 사부의 원수도 아니고, 소서시의 원수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것은 애당초 사매들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할 정도의 싸움이 아닌 것이다.
결국 기수가 말했다.
“후퇴한다!”
박피왕은 코웃음을 쳤다.
“흥! 누구 마음대로? 내가 너희들을 보내줄 것 같으냐?”
기수는 그가 뭐라하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사매들도 설매를 보호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끝까지 승부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일단 궁주의 명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박피왕은 기합을 내지르며 여섯 사람을 압박해 왔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그러나 말처럼 적극적으로 막으려 들지는 않았다.
그 역시 6명을 상대하는 건 버거웠던 것이다.
석초가 먼저 길을 열고 6명이 박피왕과 싸우다가 물러서기를 반복하면서 거의 1시간가량 산길을 쫓겨 내려오게 되었다.
결국 박피왕은 낫을 거두어들였다.
“혈매궁도 별 것 아니구나. 내 낫이 더러워질 것 같아서 오늘은 이만 하겠다.”
그리고는 부하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기수와 사매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기수는 우선 설매의 내상부터 확인하고 진기를 주입하여 응급조치를 해주었다.
“어때? 괜찮아?”
“난 괜찮아. 그보다 놈이 도망치는데 왜 쫓아가지 않아?”
마지막에 박피왕이 낫이 더러워지니 마니 한 것은 괜한 허풍에 불과했다. 혈매궁의 배후를 캐겠다고 공언한 그가 힘이 남아있었다면 그냥 물러설 이유가 없는 것이다.
6명을 몰아붙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도 한계에 도달했다는 증거였다.
춘매도 그 점을 아쉽게 생각했다.
“다음엔 이런 기회가 없을지 몰라.”
그러나 기수는 생각이 있었다.
“아니. 기회는 있어. 놈들이 이곳을 버리고 옮길 수는 없을 테니까 우리가 준비를 갖춰서 다시 돌아오면 돼.”
“무슨 준비?”
“지금보다 무공이 고강해진 뒤에 다시 오는 거야. 놈의 낫이 분리된다는 사실도 알았으니까 다음엔 이길 수 있어.”
석초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형님. 무공 증진할 시간을 어떻게 기다립니까? 그 사이에 저놈들은 강시를 완성시킬지도 모릅니다.”
무공의 완성이라는 것은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특히 혈매궁처럼 일정 수준에 도달한 고수들이라면 거기서 한 단계 더 올라가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수가 씩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다 방법이 있으니까.”
석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사매들을 봤다, 그런데 그녀들 모두 볼을 붉히며 뭔가 몹시 기대하는 듯, 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석초는 그녀들이 그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기수도 사매들이 몸을 꼬는 것을 봤다. 그는 이유를 알았다.
음양대법으로 6명 모두 고수가 되자! 그런 생각인 듯 했다.
그러나 기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 방법은 더 이상 효율이 예전만 못했다.
‘우선 나의 내공이 더 압도적으로 올라가야 돼.’
그래야 사매들도 쫙, 쫙 끌어 올려줄 수 있었다.
지난번 진유룡과 싸울 때도 그랬고, 이번 박피왕과 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공이 부족하니까 자꾸 아슬아슬한 싸움만 하게 되는 것 같았다.
‘순서를 바꾸자. 일단 유소진을 잡아서 내 옛날 내공부터 찾는 거야.’
그렇게 해야 자신과 사매들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일단 나를 따라와!”
기수는 무석산 경계를 벗어나 서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설매의 내상이 다 낫지 않아서 경공을 시전하기엔 약간 무리가 있었다.
석초가 물었다.
“형님.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장강변에 백리세가라고 있어. 거기까지 갈 거야.”
“거기라면 꽤 먼 거리인데요.”
“그러니까 서둘러야지.”
“제가 말을 구해올까요?”
관리, 그것도 무관과 함께 다니는 보람을 이럴 때 찾을 수 있었다.
근처 역관에 들러 제일 좋은 말로 일곱 필을 고른 일행은 각자 마음에 드는 말에 올라탔다. 덕분에 피곤하지 않으면서 진행속도는 월등히 빨라졌다.
기수는 말이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너무 높고 출렁임도 심했다.
‘기마식이 왜 나왔는지 알겠네.’
조금 속도를 내려니까 무릎에 힘이 엄청나게 들어갔다.
꼬박 사흘 동안 말을 달린 뒤에 백리세가가 가까워지자 기수는 새로운 고민에 휩싸이게 되었다.
유소진을 만나려면 수로맹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곳엔 탁지연이 있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한 가지 있었으니, 자기에겐 지금 다섯 사매가 딸려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행동해야 돼. 그러니까 너희 6명은 근처에서 기다려.”
석초와 사매들 모두 받아들이지 못했다.
“형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궁주. 왜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해?”
“떼어 놓으려는 게 아냐.”
“아니긴. 무공을 증진시킬 거라면서? 그런데 오는 동안 내내….”
석초가 있으니까 더 자세한 얘기는 하지 못했지만 은근히 기대하던 사매들 입장에선 여간 실망스러운 밤들이 아니었다.
“내게 방법이 있으니까 좀 믿어 줘. 길게도 말고 딱 열흘이면 돼.”
“무슨 방법인데 우리한테 얘기를 못 해?”
“하핫! 그러니까…. 다녀와서 얘기해줄게.”
“혹시 여자 만나러 가는 거야?”
풍매의 질문에 기수는 소름이 끼쳤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고 당당히 대답했다.
“절대로 아냐! 날 그렇게 못 믿어?”
“믿기야 하지만….”
기수는 사매들을 겨우 달래서 10일의 여유를 얻어냈다.
사매들은 객잔을 잡았고 기수는 석초가 그 동네 역관에 말을 돌려주러 갔다 오는 사이에 10일 동안 헤어지는 대가(?)로 가열찬 봉사를 해야 했다.
우애 깊은 사매들은 내상 입은 설매에게 음양대법을 시행하도록 1번 타자 자리를 양보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용서가 없었다.
“어떻게 하려는 건지 얘기 안 해줄 거야?”
“갔다 와서 다 말해줄게.”
“이래도? 이래도?”
“으으……쫌만 천천히…쫌만….”
“그렇게 못 하겠다면?”
“그럼 내가 더 빨리 하는 수밖에!”
“꺄악! 호호호….”
사매들과 지내는 시간은 언제나 빨리 흘러갔다.
“그럼 나 다녀온다.”
“빨리 와야 돼. 궁주.”
힘차게 꾹꾹 잘 눌러줘서인지 다들 흡족한 표정으로 기수를 전송했다.
“알았어. 끝나는 즉시 올게.”
문을 닫고 객잔을 나서자마자 탁지연의 엉덩이 라인이 생각났다.
기수는 콧노래를 부르며 수로맹 27채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