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08
좌우의 인적을 살피고 경공을 시전한 기수는 오래지 않아 예전 추억이 깃든 강 남쪽의 창고에 도착했다.
‘햐! 여기 오랜만이네…’
탁지연과 보냈던 시간들이 새록새록 기억났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여기저기 먼지가 쌓이고 사람이 있었던 흔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내가 없는데 혼자 뭐 하러 여길 오겠어?’
기수는 잠시 걸상에 앉아 작전을 수립했다.
어려울 건 없었다. 일단 탁지연을 만나 탈출계획을 세운 후 탈출지점 근처의 장소로 유소진을 유인해서 결전을 벌이면 되었다.
유소진은 기수가 살아있다는 한 마디 보고서면 찾아올 게 분명했다.
자기 오빠를 죽인 원수이고, 자기가 진기를 다 빨아들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지연이한테는 어떻게 가지?’
범장의 캐릭터는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수로맹에선 죽은 걸로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했지만 방법은 곧 생각났다.
‘강달의 고향친구라고 하면 되겠지.’
그렇게 작전을 구상한 기수는 그녀와 처음 만났던 양일의 얼굴로 역용했다.
처음 역용술을 배울 때 워낙 많이 연습을 했던 얼굴이라 거울이 없어도 됐다.
“자! 가 볼까?”
기수는 장검을 챙겨 들고 강변으로 나갔다.
물새들 날아다니는 한적한 풍경이었지만 기수는 수로맹 27채의 초소가 어디 있는지 훤히 다 알고 있었다.
그 중 하나에 접근하자 수적 두 명이 더러운 인상을 쓰며 길을 막았다.
“어이! 넌 뭐냐?”
“이쪽엔 무슨 일로 오는 거야?”
기수는 씩 웃은 후 대답했다.
“고향 친구를 만나러 왔다. 여기서 한 자리 하고 있다던데…”
“네 친구가 누군데?”
“강달이다.”
그러자 수적들 표정이 확 변했다. 그리고 말투까지 달라졌다.
“정말 우리 채주님과 친구요?”
“채주? 하하하!… 그 녀석 출세했네. 나와 함께 담 넘고, 강도질하고, 불 지르며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수적들은 기수가 채주의 친구라고 믿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채주님을 만나려면 좀 기다리셔야 할 거요.”
“왜? 무슨 일이라도 있소?”
“채주님과 부채주님은 다른 곳으로 갔소.”
“어디로 말이요?”
기수 입장에선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걸 말해줘도 되려나 모르겠네…”
수적 졸개들은 꺼리는 눈치였다.
기수는 조급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짚이는 게 있었다.
“아하! 정사대전에 도움을 주러 난주 쪽으로 갔군.”
수적들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그것을 어떻게 아시오?”
“말하지 않았소. 강달은 나와 아주 친한 사이라고. 전에 인편으로 소식을 전했을 때 많은 얘기들을 들었지.”
수적들은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수는 수로맹이 삼황맹, 녹림72채와 함께 제갈세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백무영에게 듣기를 무림맹과 마교가 싸우는데 삼황맹과 녹림72채가 마교 쪽을 돕기 위해 갔다고 하니 수로맹도 동참했을 거라는 예측이 가능했다.
수적이 말했다.
“가신지 얼마 안 됐으니 돌아오시려면 한참 걸릴 거요. 별달리 묵을 곳이 없다면 우리 배에서 함께 지냅시다.”
채주의 친구라고 하니까 호의를 베푸는 것이었다.
기수는 손을 내저었다.
“고맙긴 한데, 난 친구를 찾아가봐야겠소. 강이나 좀 건너게 해주시오.”
“그럽시다.”
수적들은 기꺼이 배를 내주었다.
강 북쪽에 내린 기수는 일단 한숨부터 내쉬었다.
‘시간이 꽤 걸릴 수도 있겠는 걸.’
10일 안에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당장 탁지연을 찾는 일부터 장난이 아닐 것 같았다. 중국 땅이 좀 넓은가.
‘일단 난주 쪽으로 가보자. 정사대전의 발발지가 거기니까…’
난주라면 또 생각나는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녀의 얼굴은 가물가물했다. 탁지연의 영상이 더 또렷하게 남아서인지, 메모리에 문제가 있어서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기수는 무작정 북쪽을 향해 걷다가 인적 없는 곳에선 경공을 펼쳤다.
그리고 중간 중간 쉬면서 기감을 끌어 올려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살폈다.
2시간도 지나기 전에 한 무리의 무림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의 무공은 그저 그런 수준이라 기수는 들키지 않고 가까이 접근하여 살펴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수로맹은 아니었다.
복장 상태로 보아 녹림의 무리 같았다.
기수는 그들을 닥달해볼까 하는 생각을 가졌지만 곧 포기했다.
‘어차피 저 정도 무공의 소유자라면 졸개들이니까 그저 명령에 따를 뿐일 거야.’
기수는 대신 기감을 끌어 올려 다른 사람들이 있는 방향을 찾았다.
사람이 많을수록, 고수가 많을수록 제대로 된 방향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찾아가는 사이 날은 어두워졌다.
기수 입장에선 오히려 어둠이 반가웠다.
자정 무렵 한 번 더 다른 무리를 만났지만 그들 역시 녹림도들이었다.
‘아무 일도 없는 곳에 인원을 배치하지는 않았을 거야. 제대로 찾아가는 게 맞아.’
하지만 난주는 아직도 한참 멀었는데 벌써부터 병력이 배치된 게 이상했다.
기수는 그들의 주변에 머물면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어보았는데 온통 무당파 얘기뿐이었다.
기수는 이곳이 난주와는 한참 멀지만 무당산과는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사대전의 장소가 무당산으로 옮겼나?’
그럴 가능성은 낮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제갈세가 놈들이 교란작전을 펼치는구나!’
무림맹 문파들이 난주의 싸움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후방을 시끄럽게 만들려는 게 분명했다. 본문이 습격당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무리 무당파라고 해도 신경이 쓰일 것이었다. 그리고 무당뿐 아니라 소림이나 화산, 청성, 아미 같은 무림맹 내 다른 문파에도 똑같이 게릴라를 파견할 수 있었다.
‘잔대가리는 참….’
기수는 제갈세가의 그런 시도가 전술적으로는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에 동원된 사람은 생각해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주력은 정사대전에 집중되어 있을 테니까 이런 게릴라전엔 그저 그런 병력, 오면서 만난 녹림도 정도 레벨을 투입했을 가능성이 컸다.
‘어차피 큰 도움 안 되는 병력이라 보고 소모품 취급 하는 거겠지.’
어쩌면 전략가 입장에선 그렇게 하는 게 맞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수는 탁지연과 수로맹 27채 식구들이 소모품 취급 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탁지연의 무공은 상당한 수준이니까 무당파를 상대로 이기라고 하면 무리일지 몰라도 자기 한 몸 안전하게 빠져 나오는 일이라면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었다.
문제는 육대기를 비롯한 다른 수적들이었다.
기수는 그들이 비록 정도 무림인들로부터, 또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수적들이라고 해도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정사를 불문하고 인연 있던 사람은 다 자기 편이라는 게 기수의 사고방식이니까, 만약 27채와 무당파가 싸운다면 당연히 무당이 적이었다.
기수는 방향을 바꾸어 난주가 아닌 무당산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흩어져 있는 병력을 좀 더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무당산에 가까워질수록 부상자도 많이 보였다.
무당파 도사들을 상대할 실력이 못 되는 것이다.
기수는 새벽이 될 때까지 쉬지도 않고 산속을 헤매어 다니며 수로맹 식구를 찾았다.
그리고 동이 틀 무렵 마침내 낯익은 얼굴을 한 명 찾을 수 있었다.
기수가 반가워서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수적은 깜짝 놀라서 칼부터 휘둘렀다.
기수는 그의 공격에 당황했지만, 곧 상황을 알아차렸다.
‘아! 맞다. 난 지금 범장의 모습이 아니지.’
기수는 금나수로 수적의 칼을 간단히 빼앗았다.
수적은 갑자기 나타난 낯선 사내가 놀라운 초식으로 무기를 빼앗자 겁에 질렸다.
기수는 그를 진정시켰다.
“너. 수로맹 27채 소속 수적 맞지?”
“그, 그렇다… 그걸 어, 어떻게 알았느냐?”
“하핫!… 다 아는 수가 있지. 너희 채주한테 나를 안내해라.”
그러자 수적이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이봐. 난 채주의 적이 아냐. 그러니까 안심하고 안내해도 돼.”
“흥! 누가 속을 줄 알고?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채주님의 위치는 말할 수 없다.”
기수는 웃음이 나왔다.
탁지연이 채주로서 부하들의 존경을, 그것도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머리 좋은 여자는 다르다니까…’
기수는 수적을 안심시키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강달의 고향친구야. 이번 싸움에 도움을 주러 왔어. 그러니까 안심하고 나를 안내해줘도 돼.”
“그, 그게 정말이냐?”
“날 믿어. 무당파 도사놈들 전부 이 검으로 찔러 죽이러 왔단 말야. 내가 적이었다면 너를 살려뒀겠냐?”
그러면서 그의 칼을 돌려줬다.
수적은 머뭇거리며 칼을 받았지만 여전히 기수를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기수는 그를 더 이상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쪽에 있구나. 내 말이 맞지?”
수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수는 염정구심술로 약도를 훤히 읽고 있었다.
“좋아. 나와 함께 가자.”
“어, 어디를 간단 말이냐?”
“사실, 아까 질문은 널 시험해 본 거고. 강달과 나는 서로 정한 암호가 있어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찾아가서 만날 수 있다. 하하! 따라와라.”
수적은 기수가 망설임도 없이 정확하게 채주 있는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산을 올라가는 중에 기수는 세 차례나 경계병을 만났고 은신처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두가 무기를 들고 진형을 갖춰 내려오는 걸 맞닥뜨리게 되었다.
‘햐! 진짜 잘 훈련된 군대처럼 움직이네.’
자기가 없으니까 탁지연이 능력을 더 잘 발휘하는 것 같았다.
“웬 놈이냐!”
육대기가 다짜고짜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기수는 그의 칼에 실린 위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제법 늘었는데?’
그러나 그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바로 자기가 가르쳐준 도법이었기 때문이다.
기수가 민첩하게 몸을 회전시켜 피하자 뒤에 있던 강달이 소리쳤다.
“멈춰라!”
육대기는 갑자기 나타난 사내의 민첩한 보법에 깜짝 놀랐기 때문에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고 채주의 명에 따를 수 있었다.
강달이 천천히 걸어나와 기수와 마주 섰다.
기수는 그 얼굴을 보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너. 인상 진짜 더럽다. 하하!…. 나야 나. 고향친구 양일이야.”
“야, 양일….”
탁지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냐의 두 눈에 가득 눈물이 고였다.
생사를 모르던 정인이 멀쩡히 살아 돌아와 자기 앞에 선 모습을 보니까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수도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양일!”
탁지연은 고함을 지르며 기수에게 달려들어 품에 안겼다.
“강달!”
기수도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너무나 기쁜 재회라서 하마터면 그 역시 눈물을 흘릴 뻔했다.
오는 동안은 내내 그녀의 엉덩이만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보다 허그가 더 좋았다.
그녀를 꽉! 끌어안은 채 힐끗 보니 육대기가 손짓으로 부하들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도록 하고 있었다.
기수는 탁지연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 포옹으로 정말 많은 말을 대신하는 기분이었다.
육대기는 한참을 기다려도 두 사람이 떨어지지 않자 헛기침을 했다.
채주가 죽은 후 부채주 혼자 남아서 지내는 모습이 안 되어 보인다고는 생각했다.
고향친구를 만나자마자 끌어안고 우는 걸 보니 정말 외로운 마음에 사무치기는 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끼리 껴안고 부비는 모습을 오랜 시간 봐주기는 힘들었다.
기수와 탁지연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육대기를 봐서 참기로 했다.
엉거주춤 떨어진 후 기수가 물었다.
“무당파와 싸우는 건가?”
“응. 싸운다기보다는 적의 신경을 긁는 일이야.”
기수는 자기 추측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나. 전략가 해도 되겠는데? 하긴, 뭘 한들…’
감정을 추스린 탁지연은 차분한 어조로, 그러면서도 두 눈엔 사랑을 듬뿍 담은 시선으로 기수를 보면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맹주님 명령에 따라서 우리 27채는 무당파 배후 교란 임무를 맡았어. 그런데 삼황맹과 녹림72채는 따로 놀고, 무당파 도사들은 무공이 고강해서 여간 힘든 게 아냐.”
육대기는 채주가 곧바로 전략 전술에 대해 의논하자 양일이란 낯선 사내에 대해 경계심을 풀었다.
기수는 이제 탁지연과 만났으니까 간단히 이곳을 떠나도 그만이었다.
탁지연 역시 수로맹에 묶일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육대기를 비롯한 부하들이 무당산 근처의 숲속에서 빨치산 처지가 되어 구르는 모습을 보니 차마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무당파 도사, 누가 문제야?”
기수는 예전에 무림맹에 잠시 있을 때 이른바 신주5룡으로 불리는 정도무림 후기지수들과 교분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때 무당파의 진운도장을 만났는데 20대 후반이라는 나이에 비해서는 상당히 무게를 잡는 남자였다.
풍기는 기도도 만만치 않았다는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의 사형제라면 역시 탁지연과 육대기가 상대하기엔 버거웠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