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09
탁지연이 기수에게 상황을 얘기해주었다.
“진성이라는 도호를 가진 40대 초반의 도사가 우리 쪽 방어를 맡고 있는데, 검술이 아주 매서워. 그가 이끄는 제자들에게 삼황맹과 녹림72채 병력이 심하게 당했어.”
“우리 27채는?”
기수는 말해놓고 실언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육대기와 부하들은 그걸 단순한 친근감의 표시로 받아들이는 듯 했다.
특히 육대기는 이미 기수의 실력을 한 번 봤기 때문에 채주의 새 연인(?)이 진퇴양난에 빠진 자신들을 도와주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랐다.
탁지연이 대답했다.
“우리는 아직 이렇다 할 피해가 없어. 부상자 한두 명 말고는…”
기수는 그게 지휘관의 역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하는 것만으로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진성이란 도사는 무공이 어느 정도나 되지?”
“글쎄…. 멀리서 본 것만으로는…”
탁지연의 눈빛에 걱정하는 기색이 어렸다. 처음엔 그저 반가운 마음뿐이었지만 지금은 기수의 몸 상태가 어떤지 더 궁금해진 것이다.
기수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내가 한 번 겨뤄봐야겠군.”
기수가 회복되었음을 안 탁지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육대기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당파를 상대로 그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탁지연은 즉시 계획을 얘기했다.
“그를 유인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아.”
끌어내면 기수가 진성도장을 제압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날 거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기수의 현재 상태는 예전에 좀 못 미쳤다.
“우리 쪽 피해는 최소화 하는 게 좋겠지?”
“그야 그렇지만…. 무슨 다른 생각이라도 있어?”
“진법을 만들어서 그 안으로 유인하면 좀 더 효과적일 것 같은데.”
탁지연은 웃었다.
기수가 진법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좋겠지만 무당파 도사들을 속일 정도의 기문진법은 아는 게 없어.”
“내가 한 가지 알고 있어.”
“네가?”
탁지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그동안 기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젓인지 궁금해졌다.
“나를 믿고 하루만 시간을 줘.”
“네가 자신 있다면야…”
“일단 주변 지형부터 살펴볼까?”
기수는 탁지연과 함께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단 둘만 있고 싶었지만 눈치 없이 육대기가 따라왔다. 둘이 번갈아 눈치를 줘도 육대기가 비켜줄 기미를 보이지 않자 탁지연이 기수에게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마녀를 만나서 죽기 직전까지 몰렸지만 운 좋게도 살아남았고, 사부를 만나서 무공도 그럭저럭 회복되었지.”
“사부를 만났다고? 하긴 우리 못 본지 꽤 오래 되었지?”
“그러게 말야.”
육대기를 점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억지로 참았다.
기문진 펼칠 장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도사 몇 명을 잠시만 속이면 되기 때문에 규모가 클 필요는 없었다. 단지 쫓고 쫓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지나갈 경로를 찾고 그 주변에 약간만 신경 써서 지형지물을 바꿔 배치하면 되는 것이다.
“이리로 유인하면 저 바위와 언덕 사이를 지날 수밖에 없군. 여기가 좋겠어.”
기수는 즉시 수적들을 동원하여 공사를 시작했다.
육대기가 적극 협조했기 때문에 작업은 오래지 않아 끝났다.
탁지연은 적을 유인하고 설정 경로를 통과하는 훈련을 반복해서 시켰다.
그리고 휴식시간을 가지도록 했다.
모두 밀린 잠을 자는 동안 그녀는 육대기를 따로 불렀다.
“부채주. 긴히 할 얘기가 있어.”
“예. 말씀하십시오.”
“예전에 부채주의 꿈이 뭐라고 했지?”
육대기는 기수 쪽을 힐끔 보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탁지연이 말했다.
“고운 색시 만나서 아들딸 낳고 조용히 살고 싶다고 했지?”
육대기는 살짝 볼을 붉혔다.
“그, 그건 나중의 일이지요. 돈을 충분히 모으고 수로맹도 그만둔 뒤에나….”
“어쨌거나 그런 꿈을 가졌으니까 우리를 이해해주리라 믿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채주도 알다시피 나는 예전 채주님과 사이가 아주 좋았어.”
“어흠! 예…. 뭐, 그건 알고 있습니다. 어흠!”
탁지연은 한숨 한 번 쉬어준 후 말을 이었다.
“짝 잃은 외기러기가 얼마나 괴롭고 힘든지 아나?”
“뭐 어느 정도 짐작은….”
“직접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어.”
기수는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육대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채주님. 혹시… 떠날 생각이십니까?”
탁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렇다네. 난 지난번처럼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 하지만 수로맹에 있는 이상 그럴 위험성은 항상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지. 여기 멀리서 찾아온 친구와 함께 이곳을 떠나 조용히 살고 싶어. 날 이해해 주게.”
육대기는 침음성을 흘렸다.
물론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그동안 함께 하면서 지켜본 결과,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게 무슨 미친 광증 같은 것은 아니었다. 차례대로 모신 두 채주 모두 자기 직분도 충실히 수행했다.
그냥 좋아하는 남녀가 사랑의 도피를 시도하는 것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채주가 없어지면 당장 27채가 어찌될 것인가는 심각한 문제였다.
탁지연은 육대기가 망설이는 이유를 알았다.
“다음 채주는 자네가 맡으면 돼.”
“예? 전 안 됩니다.”
“아냐. 내가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채주가 될 자질이 충분해.”
“하, 하지만…. 전 무공이 부족해서.”
“지금처럼 뭍에 올라와 싸우는 건 특별한 경우잖아. 수적일 하기엔 그다지 부족한 수준도 아냐. 그동안 해왔듯 앞으로도 계속 연공에 열중하면 되지.”
육대기는 머뭇거렸다.
막상 얘기를 듣고 보니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갑작스러웠고, 자신도 없었다.
탁지연이 다시 말했다.
“내가 그냥 가겠다는 게 아냐. 선물을 주고 갈게.”
“무슨 선물 말씀입니까?”
“무당의 진성도장을 네가 잡은 걸로 해. 나는 죽은 걸로 하고.”
“예? 어떻게 그런…”
기수가 끼어들어서 땅바닥에 무극환혼진 형태를 대충 그린 후 말했다.
“부채주는 여기서 기다리시오. 무당파 도사들이 이 지점을 통과한 후엔 각자 뿔뿔이 흩어지고 부하들 시야에서도 사라질 겁니다. 그러면 일이 다 끝나고 나서 나와 강달은 빠질 테니 당신이 무당 도사를 데리고 이쪽으로 나가면 됩니다.”
탁지연이 이어서 말했다.
“진성도장만 잡으면 우리는 약속대로 강으로 복귀할 수 있어. 그리고 삼황맹과 녹림72채가 못한 일을 우리 수로맹이 해냈으니 맹주님도 크게 기뻐서 공을 세운 너를 차기 채주로 임명해주실 거야.”
“하, 하지만…. 전 준비가 전혀…”
탁지연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부탁이야. 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줘.”
육대기는 긴 한 숨을 서너 번이나 내쉬다가 마침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채주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고마워. 정말 고마워.”
“부디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렴! 그래야지.”
탁지연은 기수를 보고 생긋 웃었다.
물론 강달의 인상은 험악했지만 기수는 그녀의 눈을 보고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부하들이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마침내 작전이 실행되었다.
무당파 근처에서 얼쩡거리다가 주의를 끄는 역할은 기수가 맡았다.
그는 기감을 살려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적의 위치를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적을 유인하기엔 최적이었다.
정찰 나온 수적처럼 기웃거리던 그는 적의 움직임이 감지되자 돌아서서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걸려들었구나!’
자신을 쫓아오는 무당파 도사의 기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걷는 속도에 맞추어 따라왔다.
한 명을 잡고 끝낼 게 아니라 은신처를 찾아내어 일망타진하려는 의도였다.
‘하나, 둘, 셋… 모두 여덟 명이군. 가장 기도가 강한 자가 진성도장이겠지?’
기수는 모르는 척 하면서 기문진 펼쳐진 장소까지 그들을 유인했다.
근처에 도착하자 미리 약속한 대로 수적들이 기수를 맞았다.
“무당파 놈들은 뭐 하고 있나?”
기수는 그들에게 대답하기 전에 뒤를 돌아본 후 마치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깜짝 놀라는 척 하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적이다! 도망쳐!”
무당파 도사들은 자기네 중 누가 발각된 것인지 따져보기도 전에 일단 달아나는 수적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수적들은 미리 연습한 경로로 달렸고, 기수는 적과의 거리를 가늠하다가 무당파 도사들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빠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장검을 뽑았다.
“죽어랏! 으와아아!….”
수적답게 괴성을 지르면서 어색하고 서툰 동작으로 검을 칼처럼 휘둘렀다.
앞장선 무당파 도사 둘이 조소 머금은 얼굴로 기수의 허점투성이 검초 사이로 공격을 가해왔다.
기수는 더 큰 괴성을 지르며 팔에 힘을 주었다.
쨍! 소리와 함께 검 두 자루가 동시에 밀려났다.
당사자인 두 도사는 깜짝 놀랐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아 보였는데 자신들의 공격을 너무나도 정확하고 적절하게 방어해낸 것이다.
혹시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해봄직도 했지만 기수의 다음 행동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러니 방금의 방어는 우연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무당파 도사들은 맨 뒤에 처진 기수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그리고 바위와 언덕 사이의 좁은 길로 들어간 순간.
앞서 간 동료가 보이지 않았다.
경험 많은 진성도장은 곧바로 상황을 알아차렸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그의 명령에 진입이 늦었던 3명의 제자가 멈추어 서서 좌우를 경계했다.
진성은 먼저 간 제자들을 큰소리로 불렀다.
그러자 대답이 들려오긴 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방향도 이상했다.
진성이 큰소리로 말했다.
“모두 현재의 자리를 지켜라! 내가 구하러 가겠다.”
그는 좌우를 살피고 기문진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뭔가 알아내는 게 늘어갈수록 오히려 혼란이 더 가중되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진법이냐? 산적놈들 주제에 어찌 이리도 고명한 진법을 펼칠 수 있단 말이냐?’
그는 급격한 불안감과 공포를 느꼈다.
그때, 그들 앞에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기수와 탁지연, 그리고 육대기였다.
진성도장의 수염 가득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적이 나타났으니 그들을 제압한 후 진을 빠져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가 세 사람을 향해 물었다.
“너희들이 이 기문진을 펼쳤느냐?”
기수가 대답했다.
“그렇다.”
“진법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하느냐?”
“무당말살진.”
“뭣이라고?”
“하하! 이름이 대순가? 너와 내가 여기서 승부를 겨뤄야 한다는 게 중요하지.”
그리고는 바로 장검을 뽑았다.
기수는 진성도장이 상당히 고지식하고 원칙에 충실한 사람일 거라는 인상을 받았다. 완고한 턱과 꽉 다문 입술에 그렇게 씌어 있었다.
그런 사람을 놀려먹는 게 재미있을 수도 있지만, 그는 정도 무림의 일원으로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할 뿐이니까 굳이 모욕을 주고 싶지 않았다.
무당파 제자들은 자기 스승에게 덤비는 건방진 도전자를 가만 놔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성도장이 손짓으로 그들을 물러서게 하고 자신이 앞으로 나섰다.
기수의 기도를 읽고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가 검을 뽑자 주변 공기가 얼어붙는 듯 긴장감이 퍼졌다.
기수는 심호흡 후 내공을 끌어 올리며 장검을 서서히 세워 상대를 겨누었다.
그리고 진성도장이 준비를 마치자 곧장 선공을 취했다.
쨍! 쨍! 쨍! 두 자루 검이 수십 번 격돌하며 불꽃을 튕겼다.
잠시 간격이 벌어지자 진성도장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넌 누구냐?”
기수의 검술에서 제대로 배운 고수의 풍모를 느낀 것이다.
절대 산적 나부랑이의 솜씨가 아니었다.
“나를 이기면 가르쳐주겠다!”
그렇게 대답한 기수는 곧장 다시 공격을 했고, 진성도장도 더욱 힘을 내어 태극혜검의 초식들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기수는 검으로 유명한 무당파의 고수를 검으로 이기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동굴검법만 사용했다.
진성도장이 펼치는 무당의 태극혜검은 정묘하고도 심원한 깊이가 있어서 매번 격돌할 때마다 뭔가 하나씩 배우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상대와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싸우다 보니 차츰 희열 같은 게 느껴졌다.
‘이거 재미있는데…’
사도와 싸우는 게 아닌데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드레날린이 서울광장 바닥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사람을 들뜨게 만들었다.
탁지연과 육대기는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보았지만 싸우는 기수는 검술 대결이 재미있어서 다른 데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 겨루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수의 바람이고, 진성도장의 입장은 달랐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너무 오래 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검이 맞닿는 순간부터 상대의 강함은 충분히 알게 된 상태.
그는 승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약간의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