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12
탁지연이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물었다.
“기소협. 괜찮으세요?”
기수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 네 덕분에 살았어.”
탁지연은 양손을 허리에 얹고 턱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역시 저 없으면 안 되겠죠?”
“하하! 그래…. 잠시만… 나한테 시간을 좀 줘.”
“알았어요. 제가 호법을 설 테니까 마음 놓고 운기조식 하세요.”
그녀는 검을 세우고 좌우를 경계했다.
기수는 운기조식보다 급한 게 있었다. 그는 신을 불렀다.
[봤죠?]
[봤다. 훌륭하다!]
[이제 5명. 앞으로 7명 남았습니다.]
[기대가 크다.]
[질문 있습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 꼭 질문을 하나만 받아주는 겁니까?]
[그게 질문인가?]
[아, 아닙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이곳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내 능력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곳에서 익힌…]
그것은 몹시 중요한 문제였다.
목숨까지 걸면서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미녀도 없이 쓸쓸히 돌아가서 다시 시급 곱하기 시간 계산이나 하는 삶을 사는 건 정말 싫었다.
[네가 여기서 죽으면 진짜로 죽는 것이다.]
[그럴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곳의 삶 역시 진정한 삶이고, 네가 얻은 능력과 기술은 모두 너의 것이다. 그건 나라고 해도 빼앗을 수 없다.]
[앗싸~!]
[네가 원한다면 이곳에서의 기억을 지워줄 수는 있다.]
[그건 왜요?]
[네가 살던 시대는 살육과 피가 난무하는 곳은 아니니까 적응하려면…]
[아! 싫습니다.]
이제까지 머릿속에 저장해 놓은 동영상이 몇 갠데 그걸 지운단 말인가.
그러자 신이 말했다.
[능력은 그대로 가지고 갈 수 있지만 그쪽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선 안 된다. 그러면 내가 가만 두지 않을 거야.]
[하핫! 걱정 마십시오.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꽤 확신하는 편이지.]
[하지만, 불의를 보고 응징하는 정도는 괜찮겠지요?]
[그거야 뭐…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어느 정도는…]
[예를 들어, 뇌물 받아먹은 고위직 공무원에게 염정구심술을 써서 돈은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기자회견 열어 자기 죄를 고백하도록 만드는 거라면…]
[기자회견은 안 된다.]
[흐음… 대충 가이드라인을 알겠습니다. 만약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자기 파워를 이용해 성추행이나 성폭행처럼 약한 여성의 인권을 짓밟았다면 죽여도 되죠?]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된다.]
[붉은 암경을 직경 5mm 크기로만 만들어도 심장마비로 죽일 수 있는데. 그건 아마 CSI에서 부검해도 자연사로 나올 겁니다.]
[그렇다면 무관하다.]
기수가 씩 웃은 후 말했다.
[이제 보니 당신은 선한 신은 아니군요.]
[선악은 인간의 기준일 뿐이다. 그리고 인간의 기준을 젂용한다고 해도 잡초를 뽑는 것은 악이 아니다.]
[잡초제거라…]
기수는 현대에 돌아가서 할 일이 엄청나게 많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적당히 돈 벌어 편하게 살아도 되겠지만, 뭔가 남다른 능력을 가졌다면 그에 걸맞게 남다른 일을 해야 하 것 같았다.
신이 말했다.
[다음도 잘 부탁한다!]
[잠깐만요! 뭘 그리 급하게 떠나려고 하십니까? 오랜만에 만났는데… 일월신교에 사도가 몇 명이나 있는지, 진유룡을 치료해 준 고수 사도는 누군지…]
[나도 아는 바가 없다.]
[그럼 당신의 이름이라도 가르쳐주십시오.]
[인간의 발음으로 어떻게 불리는지는 의미 없다.]
[그래도 내가 계약한 상대의 이름 정도는….]
[넌 제대로 발음도 못 할 것이다. 길기도 하고…. 자, 나는 간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아! 나 진짜 야박하네…. 존나 치사하기도 하고….]
[나 아직 안 갔다.]
[하하하! 위대하신 신님. 당신에게 모든 영광과 축복을 드립니다!]
[간다.]
기수는 그가 다시 짠! 하고 나타날까봐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판단되자 즐거운 상상에 빠졌다.
‘염정구심술 하나만 있어도 평생 돈 걱정은 안 하겠는데…’
남을 조종하는 기술은 쓰지 않기로 했으니까 제쳐 두더라도 그냥 속마음을 읽기만 해도 많은 일들이 가능할 것 같았다.
게다가 힘으로도 못 할 일이 없었다.
‘내가 총알을 피할 수 있을까?’
평생 무공을 익혀봤자 총알 한 방이면 꽥! 하는 허무한 세상이니까 그건 좀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총이 저절로 발사되는 게 아니고 사람이 쏘는 거니까, 그 사람이 총을 뽑아서 자기한테 겨냥하는 시간보다 빨리 접근해서 막을 자신은 있었다.
‘그럼 나 천하무적인 건가?’
빨리 현대로 돌아가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자! 우선 오늘 수거한 내공을 분리해볼까?’
기수는 자신의 단전에 10여개의 크고 작은 공들이 들어차 있는 느낌을 받았다.
유소진은 역시 북궁천의 분석대로 남의 내공을 뭉쳐서 보관하고 있었다.
기수는 그들 중 가장 덩치가 큰 것 하나를 골라 조심스럽게 중단전으로 옮겼다.
그리고 차분한 호흡으로 몇 차례 주천을 한 후 뭉친 진기를 풀었다.
그러자 공청석유의 향기가 코끝에 전해지는 느낌과 함께 태무신궁의 조민, 조현 자매의 아름다운 얼굴이 확! 떠올랐다. (얼굴 말고 다른 부분도)
‘이거다! 되찾았어!’
기수는 환희를 느꼈다. 그러나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예전엔 태을음양대법으로 만든 태무대력신공이 자신의 진원지기였지만, 지금은 사정이 바뀌어서 북궁천의 내공이 진원지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태무대력신공은 손님인 것이다.
유소진이 그동안 많이 빨아먹었겠지만 그래도 그 크기는 주인보다 오히려 크거나 맞먹을 정도. 흡수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기수는 세 단전으로 각각 따로 운기조식할 수 있는 북궁심법의 고마움과 위대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그 한계도 궁금했다. 그래서 중단전은 잠시 멈추고 두 번째로 덩치가 큰 내공을 상단전으로 끌어올려 풀어보았다.
“으음….”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사악한 기운이 느껴졌다.
동시에 혈천제의 얼굴과 나신이 마치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강렬하게 느껴졌다.
‘와! 내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거 섬찟한 마공이구나.’
태무대력신공과 섞이지 못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두 내공을 모두 풀어놓고 보니 운기하여 주천 한 바퀴 돌리는데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이거 뭔가 잘못 생각했는데…’
북궁심법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자신의 상단전과 중단전 수용 능력에 있었다.
하단전은 넉넉했지만 그 안엔 지금 자신의 진원지기와 다양할 크기의 진기 구슬들이 들어 있어서 그쪽으로 섞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진기의 크기로 봤을 때 즉시 주화입마였다.
기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두 진기를 녹이기 시작했다.
‘옛날엔 둘 나 내 거였는데…’
그래도 이젠 세 진기가 모두 동일한 성격으로 대통합을 이룬다는데 의의가 있었다.
한참 동안 운기를 하던 기수는 시간이 꽤 많이 흘렀을 거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하루에 다 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천천히 하자.’
호흡을 갈무리하고 눈을 뜨자 주변이 깜깜했다.
집중하는 사이에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것이다.
탁지연은 그때까지도 검을 든 채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기수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미안해. 너무 오래 걸렸지?”
“아! 끝나셨어요?”
“응. 일단은…. 완전히 복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아! 다행이예요. 정말…”
탁지연은 검을 넣고 기수의 품에 안겼다.
기수는 그녀를 꼭 안아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내공을 다 통합시키고 나면 너를 고수로 만들어주마.’
그 수혜를 가장 먼저 받아야 할 사람은 당연히 탁지연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목숨 걸고 나서준 덕분에 유소진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 누구보다 깊은 유대를 나누는 탁지연에게 그동안 음양대법을 시전해주지 못한 것은 자기 안에 혼합된 태무신궁의 진기와 혈천제의 마공이 그녀 몸에 들어가서 주화입마를 야기할까봐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이젠 그럴 걱정이 없어졌으니 당연히 아주 많은 음양대법을 그녀에게 베풀어주어야 했다.
탁지연이 물었다.
“일월신교에도 사도가 있나요?”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어. 아직 확인은 못했지만.”
탁지연은 또한 자신이 강호행 하는 진짜 목적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놈을 잡으러 갈 차례인가요?”
“그 전에 기념부터 하고.”
“무슨 기념이요?”
탁지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수는 기념을 핑계로 옷을 벗는 게 혈매궁 스타일이란 걸 떠올렸다.
“내 내공 되찾은 기념으로…”
그러면서 그의 손이 허리 아래로 내려가자 탁지연은 배시시 웃었다.
“아잉….별 걸 다 기념하네…”
전혀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몸을 밀착시켜왔다.
“좀 더 아늑한 곳으로 갈까?”
두 사람은 낙엽 잔뜩 쌓인 깊은 숲으로 장소를 옮겨 제대로 된 기념식을 치렀다.
날이 밝을 때까지 기념하고 난 기수가 옷을 입는 탁지연에게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초닷새죠.”
“아! 그럼 열흘이 지났네.”
“무슨 열흘이요?”
“동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거든.”
“아! 대장군부 사람들이요?”
“맞아. 그 사람들. 지금 백리세가 근처에 있어.”
“그럼 빨리 가요. 저도 만나보고 싶어요.”
“그래. 어서 가자.”
순간, 기수는 갑자기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을 받았다.
‘가, 가만있어 봐. 내가 지금 지연과 사매들을 소개시켜 줘야 하는 거야?’
엄청나게 불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탁지연과 재회한 게 반갑고, 벼르던 사도를 처치하고 내공 되찾은 게 기뻐서 잊고 있었는데 막상 합칠 때가 되고 보니까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지연과 둘이 단독행동 해버릴까?’
다섯 사매들이 사랑스럽긴 하지만, 그녀들은 이제 대장군부에 취업되었으니까 자기가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헤어지자니 마음이 또 짠했다.
‘내가 궁준데 사매들을 버린다는 게 말이 되나? 소서시의 복수도 해야 하고…’
하지만 그들과 합치기 위해 탁지연을 떼어 버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함께 가야 한다.’
원칙은 그렇게 정해졌지만 방법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탁지연이 기수의 고민도 모르고 물었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세요? 어서 가요.”
“으응? 그, 그래. 가자.”
탁지연은 새로운 동료를 만난다는 기분에 들떠서 발걸음이 가벼웠지만 기수는 몸 따로 머리 따로 놀았다.
‘어떻게 하지? 여섯 명이 알아서 하라고 한 방에 몰아넣고 기다릴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지금 탁지연의 무공은 사매 중 가장 약한 설매와 1대1로 붙어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예전이라면 비슷했겠지만 그 사이 사매들에게 열심히 음양대법을 베풀어주었기 때문에 지금은 다른 것이다.
그 다섯 암사자들 앞에 치타 쯤 되는 전투력의 탁지연을 턱! 하니 내놓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리고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기수는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세요? 기소협.”
“오해하지 말고 들어. 사실은 말야…”
그러자 탁지연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역시 여자 문제인가요?”
“으잉? 아, 아냐. 그런 건 아니고…. 사실은… 여자가 개입되어 있기는 한데…”
“내 그럴 줄 알았어! 알았다니까!”
탁지연은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
그러나 그녀가 기수를 깊이 이해하고 잘 아는 만큼 기수 역시 그녀를 잘 알았다.
찬스다 싶으니까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오버액션을 해서 자기를 길들여보려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당장은 자기가 죄인이니까 10분 정도 빌면서 용서를 구했다.
“동창 출신의 사부님이 나를 구해주셨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분에겐 이미 제자가 있었어. 6명인데… 이름이 춘매, 하매, 추매, 동매, 풍매, 설매야.”
탁지연의 눈썹이 다시 치켜 올라갔다.
“한 명도 아니고 여섯 명? 그들 중 누구하고 눈이 맞았어요?”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어쨌거나, 그들은 내 생명의 은인들이야.”
기수는 차분하게 북궁천이 황궁무고의 책들을 다 외웠다는 얘기, 그로 인해 여러 무공이 짬뽕되어 주화입마가 오고,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 동창에서 비밀유지를 위해 죽이려고 하자 사제 백문조가 화재를 위장하여 탈출한 얘기, 하매의 배신, 진유룡의 등장, 복수, 그리고 대장군부 백무영의 제안에 이르기까지 모든 얘기들을 여자 부문만 쏙 빼고 자세히 해주었다.
탁지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들이 있었군요. 그러니까 그들 중 누구냐고요.”
“집요하네. 우선 말해두겠는데… 난 그때 무공을 잃은 상태였어.”
“누군지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우리 예전부터 서로 솔직하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래. 맞아. 그런 약속 했었지. 사실은… 6명 전부야.”
탁지연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얼굴에 질투와 분노의 감정이 점점 강하게 떠오르더니 마침내 폭발했다.
“죽어! 이 색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