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13
탁지연의 주먹이 기수의 복부에 작렬했다.
“윽!….”
기수는 그녀가 검을 뽑지 않는 한 맞아주기로 결심했지만 맞은 자리가 무지 아팠다.
그가 고통 때문에 상체를 숙이자 탁지연의 주먹이 눈두덩으로 날아왔다.
기수는 살짝 가드를 올렸다.
‘얼굴만은….’
팬더가 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탁지연은 가드가 허술한 가슴과 배, 겨드랑이를 집중 공격하다가 느닷없이 어퍼컷으로 턱을 가격했다.
“으으….!”
다행히 혀를 깨물거나 이빨이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뒤로 서너 걸음 밀려나야 했다.
“어딜 도망가!”
탁지연은 따라붙으며 계속 주먹을 날렸다. 기수는 그녀가 엄청나게 흥분하고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팔에 실린 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콤보를 조합해 내다니…’
더킹과 위빙으로 응수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고 맞았다.
한참 주먹을 휘두르던 탁지연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때리는 것도 지치고 손이 아팠던 것이다.
기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그 6명 중 한 명은 죽었어. 지금은 5명이야.”
“그래서!”
탁지연이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6대 때릴 거 5대만 때리라는 얘기였는데 뜻이 잘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았다.
기수는 그저 급소에 정타만 맞지 말자는 심정으로 참고 또 참았다.
어느 정도 분이 풀린 탁지연은 갑자기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기수는 난감했다. 주먹 휘두를 때가 차라리 편했다.
“이것만은 알아줘.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 당시의 내겐 무공이 없었어. 그리고 그녀들은 감옥처럼 밀폐된 환경에서 환관 두 명과 오랜 시간 숨어 지냈기 때문에 남자에 대해 뭐랄까, 굶주린 상황이었어. 그래서 그녀들이 나를 강제로 덮친 거야. 내 의지가 전혀 아니었다고.”
“거짓말 말아요! 흑!..흑!…”
“아냐. 내 마음 속엔 오로지 지연이 너밖에 없어.”
지금은 그렇다는 얘기니까 진심이었다.
“당가의 그 계집애도 그렇고, 이젠 동창의 여자를 여섯이나? 도대체 기소협은 사랑을, 여자를, 나를 뭘로 생각하는 거죠?”
“방금도 얘기했지만 내 사랑은 너밖에 없어. 그들 5명에겐 내가 당한 거야.”
“그럼 지금은요? 지금은 힘이 생겼잖아요. 그런데 왜 함께 다녀요?”
그야 당연한 일 아닌가.
5:1 파티. 그거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사부님의 유명이라 사매들을 지켜줄 수밖에 없어.”
“그럼 앞으로도 그들을 계속 만나겠다는 건가요?”
“아마도…. 어쩌면….”
그러자 탁지연이 독한 표정으로 뭔가 결심한 듯 하더니 말했다.
“전 그럴 수 없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선택하세요. 그들인지 저인지.”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탁지연에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자신에겐 기준이 있었다.
“네가 떠난다면 잡지는 않을게.”
탁지연은 너무나 쉽게 나온 기수의 대답에 어이가 없었다.
“제, 제가 기소협에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요? 이렇게 쉽게 이별을 선언할 정도에 불과한가요?”
그녀의 두 눈에서 흐느낌도 없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기수는 정말로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원칙을 꽉 움켜잡았다.
“난 너를 사랑해.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하지만 사매들을 버릴 수는 없어.”
그녀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일이었다.
탁지연은 주먹을 움켜쥐고 부르르 떨었다.
“기소협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나 하나를 사랑해달라는 그 요구를 이토록 매몰차게 거절하다니…”
기수는 탁지연의 뺨에 흐르는 눈물 때문에 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으로 스스로를 독려했다.
‘지연을 택하면 다섯이 운다. 그녀들은 버려도 좋단 말인가?’ 정신 차려!’
그리고 홍익미녀의 사명은 어찌한단 말인가.
기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탁지연은 홱! 돌아섰다.
“알았어요. 기소협의 뜻이 그렇다면 제가 떠날게요.”
기수는 깜짝 놀랐다.
“지, 지연….”
“잡지 마세요. 기소협 입으로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 사매들을 버릴 수 없다고.”
그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경공을 펼쳐 숲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기수는 풀썩 주저앉았다. 설마 그녀가 떠나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가슴 한 구석이 못 견디게 쓰리고 아파왔다.
‘아! 이게 이별의 고통이란 거구나.’
당장 경공술로 따라가서 그녀를 붙잡고 사정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그녀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거야.’
외적인 것, 즉 미모나 몸매만 놓고 보자면 최고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음으로 통하는 거나 오랜 시간 정든 걸로 따지자면 이곳에 와서 가장 깊은 관계를 맺은 상대는 바로 탁지연이었다.
결국 기수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경공을 펼쳤다.
그러나 아름드리나무를 뛰어넘어 맞바람을 맞으며 달릴수록 그의 속도는 느려졌다.
밤바람이 정신을 들게 만든 것이다.
‘대가 없이 자유를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겠지?’
자유롭기도 하고, 동시에 탁지연도 자기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건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한 나뭇가지 위에 멈춰서 마음을 정리했다.
‘지연을 택하면 자유를 잃게 된다. 그리고 나와 인연을 맺은 다른 여인들은 또 어쩌란 말인가?’
기수는 과감하고도 단호하게, 마치 김유신이 애마의 목을 치듯 결단을 내렸다.
‘홍익미녀의 사명을 위해 나 개인의 아픔을 견뎌내리라!’
주먹을 불끈 쥐고 결심하고 나니까 온몸에 전율이 왔다.
한 쪽에선 탁지연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우는 모습이, 그리고 반대쪽에선 수많은 미지의 미녀들이 환호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결단력에 스스로 감탄하면서 방향을 돌려 백리세가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경공을 펼치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탁지연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미련 때문에 평보로 걸었다.
중간에 다리가 아프지 않아도 쉬어 갔고, 주변에 인기척이 없으면 잠시 앉아서 북궁심법의 운기도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날이 새고, 다음날 오후가 되었다.
그래도 탁지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떠났구나.’
입맛이 썼다. 아쉬움과 후회도 일었다.
‘작별인사라도 제대로 할 걸.’
이별을 소재로 한 유행가 가사들이 갑자기 가슴에 꽂히기도 했다.
‘이제라도 돌아가서 찾아볼까?’
그건 아무래도 늦은 일 같았다.
기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덜터덜 걸어서 산을 넘었다.
그리고 꼬박 하루가 지나서 멀리 백리세가가 내려다보이는 고갯길에 도착했다.
기수는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탁지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끝나나.’
하지만 이 언덕을 내려가면 사매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돌아서면 콧노래도 부르고, 발걸음도 가볍게 해서 기분전환을 할 작정이었는데, 등 뒤에서 탁지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그렇게 한숨까지 내쉬고 있어요?”
놀랍게도 그녀가 먼저 와서 나무 위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수는 자기가 1초만 먼저 돌아섰어도 룰루랄라~! 하는 모습을 들켰을 거라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최대한 우울한, 그러면서도 동시에 반가움이 섞인 표정으로 돌아섰다.
“지연. 나를 용서해주는 거야?”
나무에서 내려온 탁지연은 냉소를 지었다.
“절대로 용서 못 해요. 계속 옆에 붙어 지내면서 기소협을 괴롭힐 거예요.”
“하핫! 고마워.”
“용서 못 한대도요!”
그녀의 자존심 보존 앙탈이 귀여워서 기수는 씩 웃었다.
“그래도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탁지연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 물었다.
“그 사매라는 여자들의 무공이 나보다 고강한가요?”
“응. 각각도 그렇고 합격진은 더 무섭지.”
“제가 기소협과 함께 간다면 그들이 저를 해코지하려 들지 않을까요?”
“내가 혈매궁의 궁주니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거야.”
탁지연이 약간 겁먹은 표정으로 숨을 몰아쉰 후 다시 물었다.
“기소협이 절 지켜주실 거죠?”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럼… 거기 가기 전에 하루만 우리끼리 시간을 가져요.”
기수는 씩 웃었다.
이왕 늦었는데, 그 정도 소원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기수는 고개를 넘지 않고 되돌아가 목욕통이 있는 객잔을 찾은 후 하루 세 끼 밥 먹는 시간만 빼고 탁지연과 침상에서 보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음양대법을 가르쳐주었다.
탁지연은 그 효과에 깜짝 놀랐다.
“굉장해요! 이런 비법이 있으면서 왜 이제야….”
기수는 그녀가 사매들을 조금이라도 덜 미워하기 바라는 심정으로 얘기했다.
“사매들에게 배운 거야.”
그러자 탁지연이 도끼눈을 떴다.
“잃어버린 내공을 회복할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이 한 거예욧!”
“아! 그, 그런 건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나도 그 횟수만큼 할 거야!”
그러더니 기수의 몸 한 부분을 꽉 쥐고 잡아당겼다.
결국 기수는 원래의 일정을 훨씬 벗어나서 꼬박 닷새 동안 탁지연과 음양대법을 펼쳐야 했다. 탁지연에겐 엄청난 득이 되는 시간이었다.
물론 기수도 몹시 즐거웠고, 상단전과 중단전의 내공도 빠르게 녹일 수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돌아와 준 탁지연이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러워서 5일 아니라 50일이라도 그녀를 위해 봉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6일째 되는 날 길을 나서 약속한 객잔에 도착하자 아래층 식당에 있던 석초와 위층 객실의 사매들이 한꺼번에 달려 나왔다.
“형님! 오셨군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궁주! 왜 이제야 왔어? 약속보다 12일이나 늦었잖아!”
“아! 미안. 만날 사람이 멀리 있는 바람에 그렇게 됐어.”
사매들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뒤쪽에 뻘쭘하게 서있는 탁지연을 발견하고는 곧 경계의 빛을 띠었다.
춘매가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저 여자는 누구야?”
“아! 내 사매야. 이번 일을 완수하는데 큰 도움을 줬어. 자, 이리 와서 인사해.”
탁지연은 조심스럽게 기수 옆으로 다가와 섰다.
얘기는 들었지만 다섯 여자들 모두 기도가 만만치 않았다.
특히 기수가 소개한 이후 자신에게 드러내는 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탁지연이라고 합니다.”
사매들은 하나 같이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우선 깜찍하고 예쁜 얼굴이 눈에 확 띄었고, 키는 아담하지만 몸매의 굴곡이 기수가 딱 좋아하게 생겼기 때문에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설매가 기수에게 물었다.
“어디로 붙은 사매야?”
“응. 사부님을 만나기 전에 내가 있던 예전 문파.”
“그런 얘기 안 했었잖아?”
“하지 않았나? 상춘관이라고 있었어. 지연은 그때의 사부님 딸이야.”
탁지연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우리 둘은 정혼한 사이에요.”
그 말에 다섯 사매는 물론 기수도 깜짝 놀랐다.
추매와 동매가 따졌다.
“궁주! 진짜야?”
기수는 사매들과 탁지연을 번갈아 보았다.
탁지연의 눈빛이 애절했다. 다섯 여자들과 싸울 힘을 달라고 애원하는 눈빛이었다.
“응. 그, 그래…. 사부님이 그렇게 명하셨지.”
다섯 사매가 강렬한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풍매가 기수에게 물었다.
“그래서… 궁주는 저 년하고 혼인할 거야?”
“당연히 아니지!”
무심코 진심이 나와 버렸다. 그러자 탁지연이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 앞에서 한 맹세를 저버릴 생각이세요?”
기수는 어이가 없었다. 있지도 않았던 일을 당당히 따지고 드는 탁지연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당장은 혼인할 여건이 안 된다는….”
사매들이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내자 탁지연은 풍매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너. 날 언제 봤다고 욕지거리야? 저 년이라니?”
숫자에서 1:5로 밀리는 마당에 기세에서까지 눌리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기수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5명은 무공뿐만 아니라 미모도 보통이 아니었다. 저마다 개성이 있고, 특히 키들이 크고 늘씬해서 열등감마저 느껴졌다.
탁지연의 도발에 풍매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뭐, 뭐라고? 지금 나한테 한 얘기야?”
“그래. 이년아. 사람이 호의를 보이면 거기에 맞춰주는 게 기본 예의잖아?”
“이 년이….”
풍매가 검을 뽑아 들자 탁지연도 지지 않고 검을 뽑았다.
기수는 황급히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었다.
“진정해! 진정하라고. 풍매 네가 먼저 욕했으니까 검까지 뽑을 필요는…”
“저리 비켜! 궁주. 일단 저 년 목을 딴 다음에 얘기하자고.”
기수는 그녀가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런 일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해낼 거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다른 4명도 현재는 구경꾼이지만 다들 풍매 편이었다.
기수는 자기가 아니면 탁지연을 보호할 사람이 없음을 알았다.
“궁주로서 선언한다! 지연은 이제부터 우리 혈매궁의 일원이다!”
그가 당당한 어조로 말하자 풍매는 즉각 반발했다.
“말도 안 돼! 저 년이 뭐라고 우리 사이에 끼어?”
그러자 다른 사매들도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기수는 난감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고, 석초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분위기는 험악하지만 자기가 낄 자리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