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17
기수는 탁지연을 따라잡고 물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탁지연은 홱 돌아서서 쏘아붙였다.
“저 여자들과 동시에 그 짓을 했다면서요!”
“그래서?”
탁지연은 기수의 뻔뻔한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라니요? 지금 잘했다는 건가요?”
“잘 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사랑이란 서로가 합의하면 남이 뭐라고 할 수 없는 영역이야. 우리도 이거 저거 안 해 본 거 없잖아? 안 그래?”
“하지만… 여럿이 동시에…”
“그래서?”
기수의 뻔뻔스러움 2연타에 탁지연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당신이란 사람은 도대체….”
“내가 원해서 한 일이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전에도 얘기했잖아. 난 무공을 모두 잃은 상태에서 저들에게 당했다고. 동시에 잠자리를 가진 것도 내 의사는 아니었어. 따지려면 사매들에게 따져야지. 내가 아니라.”
“그, 그건…..”
탁지연은 자기가 너무 과한 반응을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냥 꼬리를 내리기는 싫었다.
“어쨌거나 저는 싫으니까 빼주세요.”
“나한테 할 얘기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걱정하지 마. 강제로 시킬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기수는 탁지연이 6인조에 속하건 솔로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가 물었다.
“떠날 거야? 아니면 돌아갈 거야?”
탁지연이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 말했다.
“죄, 죄송해요….”
두 사람이 강변으로 돌아가자 춘매가 물었다.
“우리 놔두고 둘이 뭘 속삭이다가 오는 거야?”
기수가 대답했다.
“별 거 아냐. 그냥 옛날 얘기 좀 했어.”
“얘기는 그만 하고 마침 시간이 좀 생긴 것 같은데…. 설매 내상을 치료 좀 해주는 게 어때? 자리는 우리가 저 쪽에 만들어 놨거든?”
기수는 손을 내저었다.
“지금은 좀 곤란해. 방금 전 기혈이 얽혀서 운기조식으로 풀어야 할 것 같아.”
“아! 혹시 내상을 입은 거야?”
“그 정도는 아냐. 어쨌거나 미안해.”
기수가 자리 잡고 앉아 결가부좌를 틀자 사매들이 일제히 탁지연을 노려봤다.
그리고 춘매가 다가가서 그녀 팔을 꼬집었다.
“아야! 사저….”
“너 미쳤냐? 운기조식 중인 궁주의 뺨을 때리다니.”
탁지연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대꾸 할 말이 없었다.
흥분이 가라앉고 보니까 자신의 행동이 너무 위험한 짓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춘매뿐만 아니라 다른 사매들도 전부 달려들어서 한 마디씩 했다.
탁지연 때문에 모처럼 얻은 기회가 날아가 버렸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탁지연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모처럼 딴 점수를 전부 까먹은 셈이라 속이 상했다.
한 편으로는 기수가 자기를 위해, 충격을 덜 받고 적응할 시간을 가지도록 사매들과의 갈대밭 정사를 거부한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경공으로 따라온 걸 보면 내공엔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석초가 배를 끌고 나타났다.
“형님! 제가 돌아왔습니다!”
모두가 배에 올라타자 그는 자기가 들은 바를 기수에게 얘기했다.
“지금 강호엔 혈매궁에 대한 소문이 파다한 모양입니다.”
“그래? 어떤 식으로?”
“혈매궁이 패천방과 철마방을 친 것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형님이 구마왕 중 한 명인 박피왕을 죽였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 정말 굉장할 겁니다.”
기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 정도라면 일월신교에서 기를 쓰고 자기와 혈매궁을 찾으려 할 게 분명했다.
작전이 뜻대로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도 있었다.
그에겐 호중만을 죽이고 강시들을 없애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원초적인 임무가 있었다. 바로 사도들을 없애는 것이었다.
지금의 무공이라면 진유룡이나 유소진을 다시 만난다 해도 얼마든지 상대해 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저쪽 진영엔 내상 입은 진유룡을 단번에 회복시키고 내공 증진까지 시켜 준 미지의 고수가 한 명 있었다.
‘그놈의 정체는 알아내지 못했는데 내가 너무 나대는 거 아닐까?’
저쪽 사도들도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진유룡을 죽인 혈매궁이 일월신교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타도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당분간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저쪽 패는 모르면서 이쪽 패를 계속 까서 보여주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기수는 사매들을 선실에 소집했다.
석초도 끼려 했지만 혈매궁의 일이라고 하니까 밖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수는 사매들에게 물었다.
“진유룡의 사문에 대해 알고 있는 대로 얘기해 봐.”
“그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는데.”
“그럼 동창 안에서 최고 고수가 누구야?”
“사숙님과 우리 사부님, 그리고 진천호 정도였지.”
“동창의 우두머리는?”
“창주님은 글쎄…. 진유룡보다 고수일 거라고는….”
사매들 간에 의견이 갈렸다.
“그래도 진천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창주는 높은 사람들한테 잘 보이기만 하면 되는데 뭐 하러 무공까지 익혔겠어?”
기수가 다시 물었다.
“그럼 동창 말고 조정에서 가장 고수는 누구야?”
“글쎄… 문관 중엔 없을 거고…. 무관 중에선 대장군 정도가 아닐까?”
“그가 지금 북경에 살고 있어?”
“아니. 변경에 나가 있지.”
“그럼 지금 북경에서 근무하는 사람 중에 고수는?”
“실력이 있으면 다들 임지를 배정받아 나갔지. 북경에 남아 있는 무장 중에는 이렇다 할 고수가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거야.”
“역시 쉽게 찾을 수 있는 자는 아닐 것 같군.”
“누굴 찾는데?”
기수는 진유룡의 배후에 절정고수가 있고, 그가 혈매궁을 노릴 수도 있다는 자신의 우려에 대해 모두 얘기해주었다.
사매들은 의외로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동창 출신들답게 웬만한 위협엔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설매가 말했다.
“적이 강하다면 우리도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 같네…. 안 그래? 궁주.”
생글생글 웃는 표정을 보니까 결론이 결국 그 쪽으로 가는 거 같았다.
동매가 궁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 고수는 진천호를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단시간에 치료해주었을까?”
추매가 말을 받았다.
“그 쪽도 음양대법 쓰는 거 아냐?”
“하지만 진천호는 남자잖아?”
“남자끼리도 결합은 가능하잖아?”
“그런가? 호호호…..!”
사매들이 까르르 웃어댔다.
“진천호는 환관이었으니까 주도적인 역할은 못했겠네?”
“그러게 말야. 호호호!….”
화제는 곧 기수에게로 옮겨왔다.
“궁주. 우리도 해볼까? 그쪽으로도 대법이 되는지?”
“맞아! 궁금하다. 해보자.”
기수는 탁지연의 눈치를 본 후 손을 내저었다.
“다들 진정해. 여긴 배 안이야. 더구나 밖엔 석초와 사공들이 있다고.”
그리고 솔직히 뒷문은 별로였다.
자기가 황홀감에 충만하지 않은데 음양대법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기수는 탁지연의 안색을 살폈다. 여자들끼리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해대는 상황에 적응이 잘 되지 않는 눈치였다.
탁지연이 화제를 바꾸어 말했다.
“박피왕을 죽인 것까지는 이미 지난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는 싸움을 우리가 주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궁주의 실력을 적에게 노출시킬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럴듯한 얘기라 사매들도 모두 동의했다.
탁지연이 다시 말했다.
“아예 좀 더 나아가서 궁주는 얼굴을 가리고 뒤로 빠져서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편이 좀 더 신비감이 있을 테니까.”
기수는 그녀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신비감 하면 또 나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말 중에서 카리스마 다음으로 중요한 단어였다.
배는 꼬박 이틀만에 양주에 도착했다.
기수는 백무영을 만나 자신의 계획을 얘기했다.
백무영은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우가 그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네.”
“아닙니다. 강시들이 돌아다니는 꼴은 못 보겠습니다. 그리고 일월신교가 천하의 해악이라면 그들 안에 내분이 있을 때 그것을 이용하여 무너뜨리는 것도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아! 정말 고맙네.”
백무영은 감격한 표정으로 기수의 손을 꽉 잡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얘기하게. 지원을 아끼지 않겠네.”
“정보만 확실하게 파악해주시면 됩니다.”
“그건 걱정 말게. 그 방파에서 기르는 개까지 전부 다 감시해줄 테니까. 뭐 다른 건 필요한 것 없나.”
“형님. 사실은….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게 무언가?”
“조정에 진유룡보다 더 고강한 고수를 꼽으라면 누가 있겠습니까? 아는 대로 전부 다 말씀해주십시오.”
백무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진천호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몰라도, 그보다 뛰어난 고수라면 생각나는 사람이 없네. 사실 그의 무공은 무관들도 두려워 할 정도였으니까.”
부끄럽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무관이 환관을 두려워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단순한 환관이 아니라 동창의 천호였으니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동창에서도, 대장군부에서도 알지 못하는 고수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영 꺼림칙했다.
백무영은 기수와 헤어지기 전에 비단 주머니 하나를 주었다.
열어 보니 안에는 금원보가 잔뜩 들어 있었다.
기수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두었다.
첫 번째 공격목표는 쉽게 잡혔다.
바로 양주에 자리 잡고 각종 청부로 먹고 사는 귀원방이었다.
혈매궁 식구들은 습격 자체보다 사전 준비에 더 신경을 썼다.
매화 문양 수놓인 무복을 색깔 별로 여러 벌 맞춘 것이다.
기수도 아주 얇은 검정색 비단으로 얼굴을 가리도록 만든 챙 넓은 모자를 맞췄고, 손에 딱 맞는 유성추도 새로 장만했다.
그리고 날을 잡은 7명은 밤이 되자 귀원방 장원의 담을 넘었다.
“웬 놈들이냐!”
“크윽…..!”
“침입자다!”
귀원방은 돈만 주면 무슨 일이건 다 해주는 흑도 무리로, 일월신교 내에서는 유지상의 편에 속했다.
최근의 정세에 대해 듣고 나름대로 방비를 하고 있었지만 혈매궁의 사나운 여섯 여자들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기수는 천천히 따라가면서 사매들의 실력을 감상했다.
비록 상대가 약하다고 해도, 기수는 검을 쓰는 자세만 보고도 사매들의 검술 성취도를 판단할 수 있었다.
‘다들 제법인데? 난 나서지 않아도 되겠어.’
박피왕과의 대결을 통해 기수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판단을 끝낸 상태였다.
성취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도 잡았다.
사매들이 걱정이었는데, 이 정도로 초식 운용이 노련하다면 내공 강화를 통해 절정고수 반열에 들어설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기수는 뒤를 따라가면서 차츰 검술보다 엉덩이 라인 쪽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너무 오래 참았네. 다들 얼마나 고플까?’
어디까지나 사매들을 위해서 자신이 희생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의 일 끝나면 잠시 휴식을 가져야겠다.’
한 군데 생각나는 좋은 장소가 있었다.
소항산 산채라면 둘레에 무극환혼진이 펼쳐져 있으니 은신처로 딱이었다.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건물이 지어져 있고 목욕통에 뜨거운 물을 공급할 부하들도 수십 명이나 있었다.
그곳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상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취의청 앞이었다.
“멈추어라!”
호통을 치며 나타난 자는 귀원방의 방주인 장소였다. 그는 40대 중반으로 턱이 뾰족하고 눈이 쭉 찢어져서 몹시 잔인해 보이는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는 한밤중에 쳐들어 온 침입자에 분노하다가 사매들 옷자락의 매화 문양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너, 너희들은 혈매궁?”
탁지연이 웃으며 나섰다.
“호호호!… 뚫린 귀라고 우리 소문을 들었구나.”
“어, 어째서 혈매궁이 우리 방파를 공격하는 것이냐?”
“너희들이 못된 짓을 많이 한다는 소문을 들어서 특별히 멸문시켜주러 왔다.”
“뭣이라고?”
장소는 뒤쪽의 기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궁주냐? 앞으로 나서라!”
그러자 다시 탁지연이 나섰다.
“넌 감히 우리 궁주님과 맞설 자격이 없다. 난 우리 혈매궁 중에서도 막내인데 나를 이긴다면 한 번 기회를 주마.”
춘매는 처음에 자기 대신 탁지연이 나서는 것에 의문을 품었는데, 얘기를 듣고 보니 혈매궁 서열 최하위인 그녀가 나서는 게 모양새가 나은 것 같았다.
귀원방 방주 장소는 코웃음을 쳤다.
“흥! 반반하게 생긴 년이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좋다! 내가 네 년을 이겨주마.”
그는 등에 메고 있던 반월도를 뽑아 들고 말을 이었다.
“네 년을 제압한 후 겁탈하고, 내 부하들 모두가 돌아가며 범하도록 한 후 이 칼로 얼굴을 그어주마.”
말로 기를 꺾어보자는 수작이었다.
탁지연은 냉소를 지었다.
“흥! 네가 말한 그대로 돌려주마. 얼굴에 글씨를 써주겠다.”
장소는 잔인한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기습적으로 반월도를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