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18
탁지연은 귀원방 방주 장소의 기습에 당황하지 않았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과 검이 부딪히고 불꽃이 튀자 두 사람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장소의 반월도는 길고 무거워서 체중 실은 일격으로 단번에 끝장내겠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에 반해 탁지연은 체격이 큰 편도 아니고 팔 힘도 남자만큼 강하지 않아서 막는 검이 휘청거리는 등 위태로워 보였다.
대신 민첩하고 날카로운 움직임으로 상대의 빈틈을 찔러 들어갔다.
뒤에서 구경하는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래도 내가 나설 걸 그랬나?’
슬그머니 새로 만든 유성추를 꺼내서 손에 잡았다.
탁지연이 위험해진다 싶으면 그냥 두고 보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탁지연은 위험해 보이기만 할 뿐, 실제로 위험에 처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검은 반월도의 빈틈을 예리하게 파고들었고 마침내 피보라를 일으켰다.
“으윽!…..”
장소는 이마에 횡으로 검상을 입고 비틀거렸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였지만 다행히 치명상은 아니었다.
“이, 이년이 감히!”
장소는 이를 갈며 다시 칼을 휘둘렀다.
탁지연은 그 공격을 막고 피하면서 다시 한 번 장소의 얼굴에 검상을 입혔다.
이번엔 비스듬히 사선으로 그어진 상처였다.
“끄아악! 네 년을 절대로 살려두지 않겠다!”
장소는 더욱 흥분했지만 싸움을 구경하던 기수는 쥐고 있던 유성추를 놨다.
탁지연이 질 일은 없다고 결론이 나온 것이다.
장소가 기를 쓰고 덤비는 동안 탁지연의 검은 두 번 더 그의 얼굴을 베고 찔렀다.
그 모양을 보고 풍매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보니 넌 개로구나! 호호호!…..”
사매들 모두 그 말을 듣고 함께 웃었다.
탁지연의 검이 네 번에 걸쳐 남긴 검상은 바로 견(犬)자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사자인 장소만 모를 뿐, 그 부하들도 다들 상황을 알아차렸다.
방주 얼굴에 개라고 씌어졌으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자칭 혈매궁의 막내라는 여인의 무공이 자기네 방주를 능가한다는 사실이었다.
눈치 빠른 놈들은 슬슬 도망치기 시작했다.
장소는 흘러 내려 눈을 가리는 피를 소매로 씻어내고 다시 덤볐지만 탁지연의 검을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
“네놈 입으로 한 몹쓸 소리 때문에 죽는 것이니 날 원망 마라!”
탁지연은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고 목을 찔러 숨을 끊어주었다.
장소는 왼손으로 구멍 난 목을 움켜잡고 오른손으로 계속 칼을 휘둘렀지만 탁지연에겐 어림도 없는 수작이었다.
결국 그는 바닥에 쓰러져 경련하다 죽어갔다.
탁지연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겼다는 기쁨이 전신을 휘감아 왔다.
사실, 장소의 무공은 만만치 않은 수준이었다.
혈매궁에 합류하기 전 5일간의 특별 음양대법을 시전 받지 않았다면 힘에서 밀렸기 때문에 상당히 고전했을 것이 분명했다.
이번 승리는 내공의 우위 덕에 이루어낸 것이었다.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기수의 얼굴이 절반 이상 가려져 있었지만 입 모양은 웃는 게 보였다.
그리고 다른 사매들의 표정도 보였다.
그녀들도 모두 웃고 있었다.
주둥아리 험악하게 놀린 흑도 방파의 우두머리 얼굴에 개 견자를 쓰고 죽인 것은 자기가 하지 않았다 해도 몹시 통쾌한 일이었던 것이다.
탁지연은 남아 있는 귀원방 방도들에게 말했다.
“또 덤빌 놈 있느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탁지연은 검을 휘두르며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자 모두들 도망치기 바빴다.
최고 고수인 방주가 쓰러지고 나니까 오합지졸이 되어버린 것이다.
춘매가 말했다.
“금고나 털어 가지고 떠나자.”
일행은 안으로 들어가서 금은이나 보석들을 있는 대로 찾아가지고 나왔다.
남은 방도들을 죽이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소문을 퍼뜨려 줄 목격자이기 때문에 굳이 쫓아 다니면서 검에 피를 묻힐 이유가 없었다.
금고를 모두 턴 일행은 건물에는 불을 지르고 유유히 그곳을 벗어났다.
배에 올라 기념으로 술 한 잔씩을 마시고 소항산으로 가면서, 탁지연은 자신을 향한 사매들의 표정이 많이 누그러졌다는 사실에 기뻤다.
기수는 탁지연의 그런 모습을 보고 살짝 마음이 짠했다. 똘똘 뭉친 5명 앞에 굴러 들어온 한 명이 고군분투 하는 모습이 안쓰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자기 도움 없이 스스로 입지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대견했다.
하긴 자기가 나서면 나설수록 방해가 되긴 할 것이었다.
‘지연은 머리가 좋은데다가 심리적으로도 저렇게 굳건하니까 어디다 떨어트려 놔도 살아남을 거야.’
나이도 어린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였다면 아직도 부모님한테 용돈 타 쓸 나이인데, 여기선 경제적으로나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서나 완전한 성인이었다.
소항산에 도착하자 산적들이 산 중턱까지 달려 내려와 일행을 영접했다.
“어서 오십시오!”
“궁주님! 기다렸습니다!”
기수는 그들을 둘러보고 물었다.
“다들 그대로인 것 같네?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은 없나?”
“없습니다. 고향이라고 해봤자 여기만큼 마음 편히 지낼 수야 있나요. 어디….”
기수는 인상을 굳히며 물었다.
“혹시 인근 마을을 턴 건 아니겠지?”
“절대로 아닙니다!”
기수는 앞에 나선 산적을 살펴보았다.
그동안 우두머리 역할을 대신한 모양인데, 40대 나이에 힘깨나 쓸 것으로 보이고 무엇보다 웃는 인상이 산적 답지 않게 선해 보이는 남자였다.
“너. 이름이 뭐지?”
“왕사동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네가 우리 혈매궁의 총관이다.”
“감사합니다! 목숨바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우리 거처는 잘 치워놓았겠지?”
“물론입니다. 깨끗이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목욕물 좀 준비해 줘.”
“즉시 대령하겠습니다!”
기수는 주머니에서 금원보 하나를 꺼내주며 말했다.
“그리고 이 돈으로 너희들 먹을 술과 고기를 양껏 사 와.”
“어이쿠! 뭘 이렇게 많이 주십니까? 지난번에 받은 것도 아직 한참 남았는데요.”
“있을 때 받아 둬.”
“알겠습니다! 아껴 쓰고 출납도 꼼꼼히 기록해놓겠습니다.”
기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믿고 일을 맡길만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숙소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산적소굴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아늑하고 편안했다.
탁지연은 역시 춘매와 같은 방을 쓰기로 했는데, 궁주 방에 놓인 큰 침상을 보는 순간부터 가슴이 콩닥거려서 잘 진정되지 않았다.
귀원방에서 한 건 하고 왔으니까 이제 남은 일은 휴식을 취하면서 내실을 다지는, 다시 말해서 열심히 음양대법을 실시하는 일만 남았다고 봐야 했다.
그게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이미 몸으로 체득했으니까 한 시라도 빨리, 한 번이라도 더 많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문제는 대법 시행 대상자가 자기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정말로 5명이 한꺼번에 침상에 올라가는 걸까? 그럼 한 명이 하는 동안 나머지 4명은 뭘 하지? 구경?’
상상만 해도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 남자를 다른 여인과 공유한다는 게 사실, 아직도 이해되지 않았다.
춘매가 갈아입을 옷을 들고 그녀에게 말했다.
“밥 먹기 전에 목욕부터 하자.”
“먼저 하세요.”
“무슨 소리야? 같이 해야 손 안 닿는 곳을 서로 닦아줄 수 있잖아. 따라와.”
거절하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서 탁지연은 순순히 따라갔다.
목욕통이 놓인 욕실은 생각보다 넓고 수증기가 가득했다.
춘매는 거침없이 옷을 벗어젖혔다.
탁지연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같은 여자끼리라고 해도 벗은 몸을 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는 왜 안 벗어?”
“사저 등을 닦아드리고 전 나중에 따로 할게요.”
“한가한 소리 하고 있네. 차례 기다리는 사람이 넷이나 있는데 나중에 언제 한다고 그래? 당장 벗지 못해?”
탁지연은 벗은 뒤에도 수건으로 몸을 가렸다.
그리고 당당하게 벗고 활보하는 춘매의 몸을 힐끔거렸다.
농익은 곡선이 어찌나 고혹적인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어서 들어와. 둘이면 딱 맞아. 셋은 너무 좁고.”
목욕통에 들어가 마주 앉으니까 더 더욱 시선 둘 데가 없었다.
춘매가 눈웃음 지으며 물었다.
“너. 진짜로 궁주와 혼자만 할 거야?”
탁지연은 뭐 그런 걸 다 물어보나 싶었지만 숨길 일도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이번 기회에 확실히 밝혔다.
“예. 궁주님도 그건 보장해주겠다고 했어요.”
“그야 뭐 네 자유지만… 다른 사람 하는 거 보는 게 얼마나 흥분되는지 알아?”
“아, 알고 싶지 않아요.”
사실 탁지연은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당운영이 강제로 보게 한 일 때문이었다.
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본 것 때문에 빠른 적응과 기술 확보가 가능하긴 했지만, 당시엔 정말 불쾌한 경험이었다.
그런 걸 또 겪고 싶지는 않았다.
“아! 뭐, 뭐 하시는 거예요?”
탁지연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물속에서 춘매가 자신의 몸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호호!… 민감하기는… 여자끼린데 뭐 어때?”
사실 춘매는 추매와 동매가 친하게(?) 지내는 것에 대해 상당히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풍매나 설매를 붙잡고 그런 식으로 놀아보자고 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동안 자기가 그녀들을 대한 방식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탁지연이라면 처음부터 잘 대해줬으니까 가능할 수 있었다.
탁지연의 얼굴이 깜찍하게 예쁜 것도 한 몫 했다.
“하, 하지 마세요.”
“긴장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봐.”
춘매의 손이 가슴을 더듬자 탁지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목욕통 밖으로 나갔다.
“아, 안 되겠어요. 전 나중에 따로 목욕할게요.”
그녀가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나가자 춘매는 입맛을 다셨다. 뭔가 서툰 시도였고, 뜻대로 잘 안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끄럽거나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싫으면 관두라지 뭐.”
그러면서 그녀는 혼자 목욕을 했다.
그 시간. 기수는 따로 몸을 씻고 운기조식으로 상태를 조절했다.
사매들, 그리고 탁지연이 자신을 기다린다는 사실에 설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음양대법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다.
상중하단전으로 충실히 조식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게 되었는데, 설매의 목소리가 들렸다.
“궁주! 준비 다 됐어.”
기수는 호흡을 갈무리하고 일어섰다.
설매가 이끄는 방으로 가 봤더니 사매 다섯이 반라의 모습으로 생글생글 미소 짓고 있었다. 기수는 좌우를 둘러보고 물었다.
“지연은?”
풍매가 못마땅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가 여기 있는데 걔는 왜 찾아?”
춘매가 말했다.
“자기 방에 있을 거야. 우리와 어울리기 싫다나 봐.”
설매는 기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우리 정말 오랜만이다. 그치?”
기수는 설매를 밀어낸 후 정색하고 말했다.
“야. 너희들 참 너무한다. 지연은 너희들 사이에 끼기 힘들어서 전전긍긍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나 몰라라 하냐?”
“너무하긴 뭘 너무해? 나중에 들어왔으면 당연히 순서도 나중이지!”
“자기가 싫다는데 우리더러 어쩌라고?”
기수는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일단 처음이니까 이런 식으로 대할 수는 없어. 내가 잘 얘기하고 올게.”
설매가 발끈했다.
“설마, 지연이부터 하려는 건 아니지?”
“양보할 줄도 알아라. 쫌!”
그렇게 한 마디 하고 탁지연의 방으로 가 보니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눈과 귀를 모두 차단하려는 의도인 듯 했다.
기수는 이불을 들추고 말했다.
“뭐 하고 있어? 혼자 여기서?”
“아! 기소협…. 왜 여기로 오셨어요? 사저들은….”
“네가 괜찮은지 걱정돼서.”
탁지연은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그러나 기수가 끌어안고 입을 맞추려고 하자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밀어냈다.
“안 돼요. 난 사저들 다음에 할게요.”
“그래도 되지만, 이왕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까….”
기수는 솔직히 탁지연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녀가 먼저여야 했다.
‘지연을 먼저 만났잖아? 함께 지낸 기간도 오래고, 솔직히 마음으로 통하는 것도 더 깊고…. 그러니까 대법도 당연히 지연이 먼저지.’
그래서 다시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오늘은 너와 지내고 싶어. 밤새도록 단둘이. 다른 사매들이 뭐라고 하건, 그게 지금의 내 마음이야.”
탁지연은 기수의 품에 안겨 눈물 한 방울을 똑 떨어뜨렸다.
그러나 잠시 안겨 있었을 뿐, 그를 또 밀어냈다.
“마음은 알았으니까 그만 가보세요. 설매의 내상부터 치료해주셔야죠. 전 진짜로 괜찮아요.”
기수는 그녀가 사매들 눈치를 너무 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어나서 팔을 잡아당기고 등을 떠밀면서까지 내쫓으니 결국 그녀의 방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