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22
탁지연은 타는 갈증 때문에 눈을 떴다.
“아!….”
머리가 깨지는 듯 아팠고, 속은 쓰렸다.
상체를 일으킨 그녀는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왜 옷을 벗고 있지?’
이상한 일이었다.
승전 축하연에서 술을 주는 대로 받아먹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자기 방에 알몸으로 누운 과정은 깜깜했다.
‘아! 기소협이 나 잠든 사이에 다녀갔구나.’
아래쪽과 입 주변에 뭔가 말라붙은 느낌이 남은 것을 보니 그게 분명했다.
‘아! 좀 깨우지… 자는 사람한테 그냥 하고 가나?’
탁지연은 옷을 챙겨 입고 씻기 위해 욕실로 갔다.
그곳엔 설매가 먼저 와서 세수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탁지연을 발견하자 곧바로 안쪽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깨어났다! 막내가 깨어났어!”
그러나 다른 사매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탁지연은 그녀들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
“왜들 그렇게 봐요?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추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장님.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안 나세요?”
“예? 왜 저한테 대장님이라고 하세요? 그리고 무슨 일이라니요?”
사매들이 서로 어깨와 팔을 치며 까르르 웃었다.
“어쩜 좋니. 전혀 기억 안 나나봐.”
“사실은 다 기억하면서 술 때문에 기억 안 나는 척 하는 거 아냐?”
“그럴 지도 모르겠다. 호호호!…. 웬 일이니…”
탁지연은 당황스럽고 동시에 불쾌했다.
“도대체 무슨 말씀들 하시는 거예요?”
추매가 자기 다리를 내밀며 말했다.
“내 다리 꼬집은 거 생각 안 나?”
“사저의 다리를 꼬집었다고요?”
“나뿐만이 아냐. 동매 엉덩이하고 춘매 가슴은 왜 꼬집은 거야?”
“제, 제가요?”
춘매가 나섰다.
“그래! 나 여기 멍 자국 남았어!”
“그, 그럴 리가 없는데…”
“보여줄까?”
춘매는 가슴을 열어젖혔다. 보라색 멍 자국이 보였다.
“제, 제가 그런 건가요? 제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
풍매가 나서서 따지듯 말했다.
“너 궁주 죽이려고 한 것도 기억 안 난다고 하겠구나?”
탁지연은 깜짝 놀랐다.
“내가 궁주를 죽이려 했다고요?”
그럴 리는 절대로 없었다.
“숨 막힌다고 밀어내도 마구 비벼댔잖아. 그렇게 코와 입을 한꺼번에 막으면 어떻게 숨을 쉬라는 거야?”
“내가요? 내가 왜요? 그리고 코와 입을 뭘로 막아요?”
풍매는 냉소를 지었다.
“잡아떼기로 작정했네. 그럼 나하고 내기 한 것도 잊었겠군.”
“무슨 내기를….”
탁지연은 이제 겁이 날 지경이었다.
사매들이 짜고 자기를 놀리는 건지, 아니면 정말 자기가 취중에 뭔가 끔찍한 실수를 저지른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누구 머리가 더 좋은가 대결해서 이긴 쪽의….. 어쨌거나 기억 안 나?”
“전혀요….”
그러자 사매들이 까르르 웃었다.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수야 없지. 우리가 가르쳐줄 테니까 내기는 그냥 하는 거야.”
탁지연은 알지도 못하는 내기를 하겠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 머리가 좋은가 내기라면 자기가 질 것 같지는 않았다.
주는 머리건, 쓰는 머리건….
그때 기수가 나타났다.
“왜 여기서 떠들고들 있어?”
풍매가 기수에게 말했다.
“궁주. 얘기 좀 해 줘. 지금 막내가 지난 밤 일을 전혀 기억 안 난다고 잡아떼는 중이야. 우리를 거짓말쟁이로 몰고 있다고.”
“키키킥….!”
기수는 웃기부터 했다. 탁지연은 볼이 붉어졌다.
“기소협, 아니 궁주!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대로 말해줘요!”
“어제? 네가 대장님이 되어서 우리 6명을 지휘했지. 아주 대단했어.”
“내, 내가 궁주를 죽이려고 했다는 건 무슨 말이죠?”
“진짜 죽을 뻔 했지. 좋아서 죽을 뻔 하고, 숨 막혀 죽을 뻔 하고….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크크크…. 그러고 보면 술은 참 위대한 거야.”
기수가 웃는 모습을 보면서 탁지연은 불현듯 뭔가를 떠올렸다.
‘꺅! 그, 그것들이 꿈이 아니었던 거야?’
그녀는 볼이 빨개져서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두통이 심해지면서 여러 장면들이 생각났다.
“악! 난 몰라.”
탁지연은 얼굴을 감싸며 욕실에서 뛰쳐나갔다.
그게 전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면 정말 엄청난 짓거리를 한 셈이 되는 것이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그로부터 탁지연은 밥도 따로 먹으면서 기수와 사매들을 피해 다녔다.
창피해서 도저히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탁지연이 숨바꼭질 하는 동안 산채는 평온하게 돌아갔다. 나머지 식구들은 연공도 하고 기문진 보강공사도 했다.
그리고 밤이 오자 사매들이 탁지연을 찾아 나섰다.
“막내! 어디 있어?”
“숨지 말고 나와. 네가 있어야 재미있단 말야.”
“어제처럼 우리를 지휘해줘.”
그러나 맨 정신인 탁지연은 끝내 숨어서 몸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수는 5명과 대법을 한 후 탁지연의 방으로 갔다.
그러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침상에 앉아 운기조식을 했는데 날이 꼬박 새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식사 이후에야 겨우 얼굴을 내민 탁지연은 기수의 얼굴도 제대로 마주보지 못했다.
“밤새 기다리셨어요?”
“하하! 평생 숨어 다니려고?”
“몰라요! 창피해 죽겠어요. 사매들을 어떻게 다시 보죠?”
“한 가지 좋은 해결방법이 있지.”
“그게 뭔데요?”
“술 한 잔 마셔. 하하하!…”
“놀리지 마세요!”
“하하! 자, 이리 와. 대법 해야지.”
기수가 손을 뻗었지만 탁지연은 몸을 뺐다.
“사매들 기다릴 텐데 가서 연공이나 하세요. 전 아프다고 해주시고.”
탁지연은 그렇게 이틀 내내 숨어 다녔다.
그리고 그날 밤.
기수와 다섯 사매가 막 대법 시행을 준비 중인데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탁지연이 들어와서 큰소리로 외쳤다.
“야! 다들 집합!”
술 냄새가 팍팍 풍겼고, 사매들은 까르르 웃으며 환영했다.
탁지연이 기수의 반응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설매도 기꺼이 주도권을 내어준 바 있었다.
기수는 살짝 긴장되었지만 그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오늘은 살살 부탁해. 후후…..”
“궁주는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 했!”
“아, 알았어. 하지만 내가 입을 다물면 섭섭할 텐데. 후후…”
그날부터 시작해서 탁지연이 혈매궁의 일원이 되기 위해 마셔야 하는 술의 양은 매일 조금씩 줄어들었다.
산채 주변 기문진 보강공사가 끝날 즈음 소웅이 찾아왔다.
그는 백무영의 말을 전했다.
“잠시 자중하시랍니다.”
“왜? 뭐가 잘못됐나?”
“일월신교에 대대적인 동원령이 내려졌답니다.”
“그건 우리가 바라던 일이잖아.”
“그런데, 유지상 패거리뿐만 아니라 유지광쪽 문파들도 모두 동원되었답니다.”
“그건 의외군.”
계산을 벗어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지상 계열과 유지광 계열의 반목과 싸움을 유도하기 위해 혈매궁이 유지광 쪽 청부를 받은 것처럼 행동했는데 둘이 함께 나섰다니 뜻밖이었다.
탁지연이 말했다.
“유지상이 교주에게 고자질을 하니까 유지광이 결백을 밝히겠다고 우리를 잡으러 나선 모양이네요.”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까 상황이 정리되었다.
“그러면 어쩌지? 오라는 강시는 안 오고 일월신교 전체가 몰려올 판이잖아?”
“백시랑님 말씀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곳이 발각되기 전에 우선 최대한 많은 식량을 사다 쌓아놓고, 기문진을 보강하고, 가능하다면 두 겹, 세 겹으로 늘려서 치고, 화살 같은 무기도 비축해두는 게 좋겠죠.”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놈들을 여기로 끌어들이면 차라리 일이 수월해질 수도 있어. 일망타진이 가능해지니까 말야.”
사매들과 탁지연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일망타진이라고요?”
“그래. 일월신교라고 해봤자 뭐 별 거 있어? 박피왕 같은 놈 열댓 명만 죽이면 다 무너지는 거잖아?”
이번 기회에 아예 일월신교 전체와 붙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진영으로 쳐들어가면 택도 없는 일이겠지만 이곳은 똥개도 50% 먹고 들어간다는 홈그라운드.
원정에서 득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다들 아닌 사실.
게다가 무극환혼진이라는 최상급 방어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오는 대로 한 놈씩 잡아 죽이면 강시도 올 것이고, 사도도 올 것이었다.
귀찮게 찾아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매들은 약간 겁을 먹었지만 그래도 기수가 하겠다니까 믿음이 가는 표정들이었다.
소웅이 말했다.
“시랑님께서 전서구와 그걸 부릴 사람을 보내주기로 하셨습니다.”
“그것도 필요하겠군.”
기수는 농성전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는 무극환혼진의 보강을 맡았고 산채 살림에 대한 것들은 전부 탁지연이 주도하고 사매들이 도와서 하기로 했다.
작업 중에 왕사동이 기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궁주님. 제가 아는 동생 중에 대장장이가 한 명 있는데 무기를 사다 나를 게 아니라 그를 데려오면 어떻겠습니까?”
“잘 살고 있는 사람 산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잖아?”
“저희는 행인이나 마을을 털지도 않는데 산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관에서도 우릴 잡으려 하지 않으니까 지금은 그냥 무림 문파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64초식 탈백도를 연마하고 있으니까 산적보다는 혈매궁이 어울리긴 했다.
“대장장이가 있으면 좋기는 하겠지.”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저쪽 구릉 뒤로 빈 땅이 굉장히 많잖습니까. 거기다가 집들을 더 지으면 안 될까요?”
“집은 왜?”
인원을 늘릴 계획은 없었다. 60명이면 충분했다.
“산채가 아니고 문파라면 저희들도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게 보기도 좋고….헤헤…”
기수는 왕사동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남자들만 모여 사는 것에 대해 신경 써주지 못한 게 미안하기도 했다.
“일월신교와의 문제가 끝나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기수는 돈에 별로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부하들과 함께 턴 흑사방과 칠성방의 전리품들은 모두 공동 재산으로 관리하도록 해놓고 있었다.
그걸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술 퍼마시는 것보다 집을 짓는 게 훨씬 나았다.
일월신교를 맞을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그러나 적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기수는 사매들을 모으고 말했다.
“지난번에 철수를 너무 깔끔하게 해서 우리의 종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것 같아. 한 번 더 내려갔다 오자고. 이번엔 들키도록.”
“떠들썩하게 하잔 말이죠? 제게 맡겨주세요.”
작전은 탁지연이 짰다.
목표는 서주 근처에 자리잡은 용천방.
그들 역시 일월신교 교주의 장남 유지상 계열이었다.
이번에도 왕사동과 부하들이 먼저 내려가 근처의 객잔에 나누어 묵으면서 지형을 익혔고, 약속한 날짜에 혈매궁 여섯 마녀와 궁주가 나타났다.
그러나 이번엔 전과 달리 밤이 아닌 아침이었다.
그리고 복장도 검은 무복이 아니었다. 기수는 흰 색 장포를 입었고 사매들은 붉은 빛 화려한 궁장을 차려입었다.
그들이 대로를 활보하자 행인들 모두 놀라서 길을 비켜주었다.
그리고 소매에 수놓인 매화문양을 본 무림인들은 그들이 요즘 떠들썩한 소문의 주인공 혈매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당당하게 용천방 장원으로 간 기수와 사매들은 문지기를 쓰러트리고 정문을 깨부순 후 난입했다.
용천방 입장에선 날벼락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방주를 비롯한 간부들이 몰려나와 어떻게든 막아보려 애썼지만, 혈매궁의 여섯 마녀는 그들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우두머리들이 쓰러지자 졸개들은 버틸 능력이 없었다.
혈매궁 부하들의 칼 쓰는 실력도 상당해서 결국 모두 도망치는 길을 택하고 말았다.
왕사동은 부하들을 지휘하여 건물마다 샅샅이 털었다.
그게 자기네 살림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 구석구석 이 잡듯이 뒤져서 값나가는 물건은 전부 다 찾아냈다.
“자! 이제 철수!”
탁지연의 명령에 따라 혈매궁은 용천방을 떠났다.
부하들 모두가 짐을 하나씩 지고 당당하게 대로를 걸어 북쪽으로 올라갔다.
워낙 아침 일찍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해가 지려면 아직 먼 시간.
그들이 느긋하게 도보로 이동하는 모습을 본 목격자는 수백, 수천 명도 넘었다.
그리고 용천방 방도 일부가 몰래 뒤를 밟았다.
혈매궁 식구들은 표행 중인 표사들처럼 뚜벅뚜벅 걸었고, 중간에 객잔이 있으면 들러서 밥을 사먹고 충분히 쉬었다가 다시 길을 떠나는 식으로 이동해서 소항산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사흘이나 걸렸다.
기수는 따라오는 자들의 기척이 매일 늘어나는 것을 확인했다.
자기네들끼리 연락을 해서 점점 인원이 증대되는 게 분명했다.
‘이렇게까지 해줘야 하나? 후후….’
그들이 산으로 올라간 지 이삼일 사이에 과연 소항산 주변에는 수백, 수천 명의 일월신교 무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