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31
불로장생.
현대의 도서관이라면 그런 내용이 있을 리 없지만 황궁비고엔 그와 관련된 책들이 있었다. 그것도 상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많았다.
꼬박 하루를 훑어본 끝에, 기수는 대체적으로 두 가지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이른바 불로초로 대표되는, 먹어서 불로장생을 얻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도를 닦아서 우화등선 하는 길이었다.
우선 눈길이 가는 쪽은 단약 제조 쪽이었다.
기수는 상춘관 출신이기 때문에 약초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단약을 만드는 제조법 중엔 이상한 약재가 너무 많았다.
‘이런 재료가 정말 세상에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그냥 뭔가 신비한 효능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전설에 나오는 재료를 써넣은 것 같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리고 하나같이 수은이 들어간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고대 사람들은 수은이 고체도 아니고 액체도 아닌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뭔가 신비한 효능이 있을 거라고 기대한 모양이지만 현대에서 살았던 기수가 보기엔 아니었다.
따로 공부한 게 아니라도 수은이 중금속이고, 먹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수은 들어가는 처방을 다 빼고 나니까 몇 개 남지도 않았고, 그가 아는 재료 이름으로만 된 처방은 하나도 없었다.
기수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들은 대충 상상력으로 채워 넣은 거야. 믿을 수 없어.’
기수는 우화등선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쪽은 그나마 자기가 겪어온 과정이 기술되어 있어서 좀 더 신빙성이 있었다.
오기조원, 삼화취정, 적사투관, 천화난추 등은 모두 운기조식 중에 경험해 봤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엔 잘 모르고 넘어간 현상도 여러 책들에 공통적으로 적힌 내용을 통해 되짚어 보니까 어떤 과정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이상의 단계였다.
‘아! 놔…. 여기도 상상력들이 동원됐네.’
책 하나를 보면 그럴 듯 했다.
그러나 다른 책엔 또 다른 그럴듯한 얘기들이 적혀 있었다.
반박귀진, 반로환동, 등봉조극, 우화등선에 대해서 저마다 주장이 달랐다.
마치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를 보는 것 같았다.
셋 다 동일한 하느님을 믿는 종교이면서 저마다 방법이 다르고, 심지어는 서로를 이교도라 비난하고 전쟁까지 하는 것처럼, 신선이 되어 불로장생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책마다 서로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니 경험이 아닌 상상에 의한 기술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신선이 된 뒤에 자기 경험을 제자에게 전달해 준 사람은 없는 건가?’
어쩌면 이 많은 이론들 중에 진짜가 있을 수도 있었다.
‘내가 직접 해보기 전엔 확인할 방법이 없겠군.’
그래도 수은 들어간 약을 먹는 것보다는 자기 몸 안의 내공을 키워 양신을 만들고 그 양신이 자기 몸 정도로 커지면 껍질을 벗고 신선으로 태어난다는 쪽이 그나마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실패할 경우, 수은을 먹으면 중금속 중독으로 사망이지만, 양신 키우는 방법은 최소한 무림 고수라도 될 수 있으니 손해는 아니었다.
약 하나 먹고 불로불사가 되는 게 가장 쉽고 빠른 길이겠지만 좀 오래 걸리더라도 안전한 길이 나을 것이었다.
‘어차피 신도 기초과정에만 700년이 걸렸다고 했잖아. 길게 보자고.’
기수는 양생술 쪽으로 책 세 권을 골라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세 이론을 흡수한 후 자기한테 맞는 것만 받아들이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오후가 되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수는 책들을 조용히 원래 자리에 꽂고 건량 자루를 맨 후 서가 위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내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누가 안 갚는대?”
비고에 들어온 건 두 사람, 목소리로 듣기엔 젊은 남자들이었다.
기수는 그들의 발자국 소리를 통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이란 사실을 알고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았다.
그들은 환관이었다. 손에는 각각 먼지 털이와 빗자루를 들고 있었다.
청소를 하러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계속 잡담을 하면서 건성건성. 빗자루는 질질 끌고 지나가는 걸로 끝이었고, 먼지 털이는 좌우로 한 번씩, 책꽂이 아무 칸이나 닿는 데만 터는 걸로 끝이었다.
기수는 기가 막혔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라도 들어오고 싶어 할, 보고 중의 보고인 이곳을 저 두 환관은 그냥 귀찮은 일거리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사부님과 사숙 때문에 무공에 관심 없는 화관을 골라 일을 맡겼나?’
어쨌거나 그들의 방해 때문에 책을 못 읽게 된 기수는 운기조식으로 휴식을 취했다.
두 환관은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가 밖으로 나가 문을 잠갔다.
대충 하는 것으로 봐서 청소 상태 검사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애당초 이곳에 관심 가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좋아! 내가 마음껏 이용해주지.’
기수는 다시 책을 뽑아 공부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일부 암기가 필요한 내용은 종이에 적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또 다른 사람이 문을 따고 들어왔다.
‘누구지? 공무원 근무시간은 지났을 텐데…’
기수의 귓바퀴가 슬쩍 움직였다. 이번에 들어온 자는 스텝이 민첩했다.
분명히 무공을 익힌 자의 움직임이었다.
기수는 좀 더 신중하게 책을 원래 자리에 꽂고 서가 위로 숨었다.
인기척은 그 넓은 비고 중에서 하필이면 기수 쪽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수준 높은 무공비급과 불로장생 관련 책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기수는 서가 모서리로 슬쩍 얼굴 반쪽을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봤다.
환관 복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손에 빗자루나 먼지 털이가 아닌 작은 등을 들고 있었다.
그는 그 등에 불을 붙여 서가 귀퉁이에 놓더니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책 한 권을 뽑았다. 자주 왔는지 몹시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책장을 빨리 넘겨 특정 페이지를 찾은 후 손동작을 하기 시작했다.
비급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는 게 분명했다.
기수는 고개를 돌려 서가 위에 누웠다.
‘역시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군. 동창 소속이려나?’
기수는 호흡을 더욱 가라앉히고 그가 떠나기를 기다렸다. 발각되어서 좋을 일 없기도 하거니와 특히 천호 진유룡을 죽인 자신은 동창과 원수지간이었다.
10분, 30분. 기수는 차분히 기다렸지만 환관은 도무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번 날 골라서 찾아온 건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없던 일이라 그가 도대체 언제 돌아갈지 예측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지?’
어디선가 난초 향기 같은 것이 은은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책 냄새뿐이던 공간에 희한한 일이었다.
기수는 궁금증에 다시 슬그머니 아래를 내려다 봤다.
환관은 손동작뿐만 아니라 퇴법과 각법도 차례로 연공 중이었다.
‘헉! 저 라인은….’
기수는 그의 헐렁한 바지 속에 숨은 각선미를 한눈에 알아봤다.
‘남장한 여자였구나! 어쩐지….’
향기의 근원을 찾은 것이다.
남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복장도 있지만 여자치고는 큰 키 때문이기도 했다.
‘추매 정도 되려나? 얼굴도 좀 봤으면 좋겠는데… 후후…’
그러나 각도 상 정수리만 보일 뿐이었다.
그냥 원래대로 고개를 돌리고 누웠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도대체 여자의 얼굴을 왜 그렇게도 보고 싶던지, 기수는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다가 그만 상체를 비틀게 되었다.
그의 품안엔 여러 고서에서 참고하기 위해 적어둔 종이들이 접혀 있었다.
그것들이 비틀리면서 종이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작은 소리였지만 남장 여인은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웬 놈이냐!”
그녀가 도약하며 기수에게 일 장을 날렸다.
기수는 깜짝 놀라 반대편으로 몸을 회전시켜 겨우 피했다.
그녀의 무공은 예상보다 고강했다.
기수의 발이 바닥에 닿기 무섭게 서가를 뛰어 넘은 여인의 공격이 곧바로 이어졌다.
기수는 그녀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잽싸게 얼굴만 확인하고는 선풍비를 시전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완전 예쁘잖아!’
남장한 얼굴인데도 눈에 확 들어오는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기수는 힐끔 뒤를 돌아본 후 깜짝 놀랐다.
선풍비를 제대로 시전하고 있는데도 간격이 좀처럼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강렬한 호기심이 일었다.
‘동창에 이 정도의 고수가 남아 있었나?’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남장여인은 달려들던 기세를 멈추지 않고 기수의 가슴에 일 장을 날렸다.
기수는 분광권의 초식을 사용하여 그 공격을 무산시켰다.
“아아!…..”
여인은 자신의 공세가 허무할 정도로 쉽게 파해 당하자 크게 당황하여 뒤로 물러선 후 방어 자세를 취했다.
“너, 너는 누구냐!”
기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황궁 비고에 몰래 들어온 걸 들켜버렸으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그녀의 미모에 정신이 팔려서 귀에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얘. 왜 이렇게 예쁘냐?’
그동안 여섯 명의 미녀들에 둘러싸여 지내다 보니 웬만한 미색은 눈에 차지도 않게 된 기수였다. 하지만 남장여인은 여섯 사매들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눈은 크고 맑아서 순수함과 청초함을 담고 있었고 오똑한 코 아래 붉고 도톰한 입술은 관능미와 귀여움을 겸비하고 있었으며 갸름한 뺨과 턱의 선이 이목구비를 환상적 라인으로 감싸고 있었다.
여인의 아름다움이라는 게 위아래를 나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은 다른 여자 얼굴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왜 대답을 하지 못하느냐!”
화내는 모습이 예뻐 보일 정도니 미소를 지으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지 궁금했다.
기수가 아무 말도 않고 멍하니 있자 여인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야!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응? 아!…. 그래… 넌 소속이 어디냐?”
그러자 그녀가 기수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환관 복장이라 일단 적은 아니라고 판단한 듯 약간 경계를 늦추는 모습이었다.
“내 소속은 비밀이다. 넌 어디 소속이냐?”
기수는 환관의 조직 중 대충 아무 거나 갖다 댔다.
“난 직전감 소속이다.”
이 책 저 책 뒤적일 때 황궁 내 환관 조직에 대해 기록된 부분을 읽은 게 기억나서 둘러댄 것이다. 궁 내 청소 담당이니 그럭저럭 앞뒤가 맞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인은 의문을 거두지 않았다.
“직전감의 환관이 이 시간에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이냐? 이름을 대라. 근무자인지 확인해보겠다.”
“흥!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너야말로 누구 허락을 받고 여기 들어왔느냐?”
기수는 오히려 공세를 취했다. 그러자 여인이 당황하는 표정을 드러냈다.
‘그래! 제대로 짚었어!’
기수는 여인이 사매들과 같은 신분일 거라고 추측했다.
이 정도 미모에 무공까지 갖췄다면 동창에서 비밀리에 키우는 여성 요원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이곳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것이다.
쌓인 먼지로 봐서 이곳 비고는 사부님과 사숙 사건 이후 동창 내에서도 출입금지 장소가 된 게 분명했다.
그런데 동창 소속이라고 해도 환관은 아닌 여인이 옷을 바꿔 입고 몰래 들어왔으니 범법자 두 명이 사건 현장에서 마주친 거라고 볼 수 있었다.
둘 다 떳떳하지 못한 처지인 것이다.
“나, 나는….”
“후후…. 지어내려고 애쓸 필요 없어. 너와 난 어차피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니까 괜히 큰소리 내서 주의 끌 필요 없이 그냥 각자 자기 볼일 보자고. 어때?”
여인은 입술을 깨물며 기수를 노려봤다.
그러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소란을 피워봤자 너와 나 모두 득 될 게 없지.”
“현명하군.”
그녀는 경계 자세를 풀고 물었다.
“방금 그 초식은 이름이 뭐지?”
자신의 장법이 와해된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기수는 자신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봐. 우리 각자 자기 일이나 하자고. 서로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무공 이름 정도는 가르쳐줄 수 있잖아?”
“네가 직접 찾아봐.”
아무리 찾아봐도 분광권이 나올 리는 없지만 일단 그녀의 주의를 돌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흥! 재주 좀 있다고 되게 잘난 척 하네.”
“잘난 척이 아냐. 네가 방금 전에 쓴 장법도 상당히 고명한 수법이였어.”
“그런데 왜 와해된 거지?”
“초식이 아니라 다른 데 문제가 있기 때문이지.”
여인이 골똘히 집중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내 내공에 문제가 있었던 거야?”
기수는 잠시 멍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은은한 등불 빛에 그녀의 집중하는 얼굴이 정말 예뻐 보였기 때문이다.
여인이 물었다.
“야!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응? 아, 아니…. 네가 하도 예뻐서.”
“호호호!… 하긴 나도 거울 보면서 그런 생각 하곤 해.”
“윽!….”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뭐 이런 여자가 있나 싶은 생각과 함께 얼굴 점수를 방금의 발언으로 절반쯤 깎아 먹었다는 채점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미모 점수가 워낙 높다 보니까 감점을 해도 순위권이었다.
그녀는 한술 더 떴다.
“야! 너 궁내에서 비빈과 궁녀들 많이 봤지? 내가 그중에서도 좀 예쁜 편에 속하냐? 어떠냐? 솔직하게 사실대로 얘기해 봐.”
기수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살수를 펼치던 그녀가 순식간에 돌변해서 자신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질문하는 내용도 너무 노골적이었다.
“너. 내가 두렵지 않냐?”
“왜? 우리 서로 비밀을 지켜주기로 했잖아.”
“아무리 그래도….”
“네가 무공 좀 고강하다고 해봤자 날 해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보다 아까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나 해 봐. 어서!”
기수는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 말처럼 신사협정을 맺은 판에 서로를 경계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같은 처지니까 나도 편하게 대해주마.’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기습에 대해서는 방비하기로 했다.
동창 소속 여자 요원들이 필요할 땐 얼마나 독해질 수 있는지 늘 가까이에서 봐 왔기 때문에 웃는 얼굴이라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