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39
기수는 날이 새기 전에 소항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산을 가득 메운 적의 병력에 놀랐다.
걱정했던 대로 일월신교가 전부 다 몰려오다시피 한 것이다.
‘기문진이 뚫렸나?’
기수는 일단 숲 위로 보이는 깃발, 느껴지는 기감 등을 종합하여 적의 배치 형태부터 살펴보았다.
산 아래라 위쪽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겹겹이 포위망을 구축한 것으로 보아 무극환혼진이 버텨주는 게 분명했다. 일월신교는 장기 농성전을 각오한 대형이었다.
“됐어! 늦지 않게 왔다.‘
오는 도중에도 공주의 얼굴이 자꾸 생각나서 뒷덜미를 잡아끌었지만 그래도 역시 이곳의 일이 더 중요했다.
기수는 그들 사이를 뚫고 산 위로 올라가려 했다.
자신의 경공술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산 초입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된다 싶더니 기문진이 앞길을 막았다.
“이런 씨발!….”
욕이 저절로 나왔다.
기문진법에 대한 공부가 어느 정도 되다 보니까 대충 알아보는 눈이 생겼는데, 산 진입을 막는 진법은 바로 전에 탈각왕이 만들었던 그 진법이었다.
‘도대체 왜 자기네 후방에 진을 펼친 거지?’
그 이유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 출정에서 끝장을 볼 생각으로 장기전을 계획하고 왔는데 관군이 출동하거나 무림맹에서 원군이 오면 귀찮아지니까 자기네만 싸울 수 있도록 외부와 차단을 한 것 같았다. 그들의 각오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기수는 자신의 늘어난 내공으로 나뭇가지 위를 도약하여 기문진 안에서 헤매는 게 아니라 위를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사매들이 날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까.’
일월신교가 언제부터 포위를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없는 상태에서 두려움과 초조함에 떨었을 그녀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기수는 도약을 준비하면서 산채까지의 최단경로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자꾸만 불안감이 엄습했다.
‘탈각왕의 진법이 무극환혼진과 비슷한 수준이면 어떻게 하지?’
그렇다면 공중으로 넘어가는 것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중간에 실제와 다른 환영이 보일 테니까.
자기는 다음 나뭇가지를 밟는다고 점프했는데, 함정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일단 진에 갇히면 그 진법이 무극환혼진보다 레벨이 심하게 떨어지지 않는 이상, 자신의 능력으로 생문을 찾아서 나올 자신이 없었다.
‘안 돼지. 조급하게 서두르다가 내가 갇히기라도 하면 사매들을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짐만 될 수도 있어.’
기수는 탈각왕의 실력을 인정해주기로 했다.
그래도 구마왕 중 하나인데 얕보고 덤비다가 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아! 미치겠네….’
공주와의 이별까지 감수하고 달려왔는데 정작 소항산에 도착해놓고 올라가지를 못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내가 펼친 진 밖에 나른 놈이 진을 쳐서 못 들어가다니… 젠장!’
기수는 일단 나무와 나무 사이로 은밀히 이동하며 산을 한 바퀴 빙 둘러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허점은 보이지 않았다.
‘공을 진짜 많이 들였네.’
무모하게 진입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 같았다.
헛되이 하루를 보내고 오후가 되어 시장기를 느낄 무렵.
기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100명쯤 되어 보였는데, 저마다 등에 쌀가마를 지고 개미처럼 일렬로 행군하고 있었다.
‘식량을 나르는 중이구나!’
남의 영토에 들어와서 아예 눌러 앉는 모습이 보기 좋을 리 없었다.
‘싹 다 제압해서 굶겨버릴까?’
그것도 한 방법일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100명을 제압한다고 해서 적이 대책 없이 굶을 것 같지는 않았다.
기수는 다른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저들을 따라가면 길을 알 수 있겠네!’
길만 알면 사매들과 합류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수는 은밀하게 그들을 뒤따랐다.
사람이 100명이 넘는다 해도 다들 무거운 짐을 지고 산길을 오르느라 숨이 턱까지 차서 주변을 경계할 정신은 없었다.
그리고 무공수준도 떨어져서 기수의 존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수에게 쌀자루 나르는 일을 시키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들을 따르던 기수는 100명의 옷차림이 전부 제각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 맞다. 일월신교는 원래 잡탕 조직이었지.’
그렇다면 단지 먼발치에서 길안내만 받을 게 아니라 뭔가 다른 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 기수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선두에 있던 자가 외쳤다.
“여기서 잠시 쉬어간다!”
그러자 모두들 죽겠다고 앓는 소리를 내며 지고 있던 쌀가마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저마다 불만을 터뜨렸다.
“평생 칼 밥 먹고 살았는데 웬 짐꾼 노릇이람!”
“조용해. 듣겠어.”
“들으면 어때? 저 자는 우리 문파도 아닌데.”
“기문진 통과방법을 외부에 알리지 않기 위해서라잖아.”
“아! 젠장…. 짐꾼 사서 부리도록 한 뒤에 다 죽여 버리면 되잖아? 그게 뭐 어렵다고.”
험악한 말로 불만을 떠들어대던 사내가 일어나서 숲으로 들어갔다.
“어이! 이충. 어딜 가나?”
“오줌 누러!”
기수는 이충이라는 사내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가 소피를 다 보기까지 기다렸다가 몸을 부르르 떨고 옷을 추켜올리려고 할 때 잔백지를 날렸다.
“으윽…..!”
사내는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젠장! 너무 셌구나.’
증진된 내공을 운용하는 게 약간 익숙하지 않아서 잔백지가 파천강기 수준으로 날아가 버렸다. 기수는 잽싸게 몸을 날려 쓰러지는 이충의 몸을 잡아 넘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짐꾼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한 후 그의 옷을 벗겨 갈아입고, 소지품도 옮긴 후 역용술로 그의 얼굴과 똑같이 만들었다.
이충이 가지고 있던 물건은 유엽도 한 자루와 ‘군룡 41’이라고 새겨진 신용카드 크기의 나무 패찰, 그리고 은전과 동전이 든 돈주머니가 전부였다.
“어이! 이충! 똥 싸나? 어서 오게. 곧 출발할 거야!”
길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기수는 이충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막 일어서려는데 보니까 이충의 왼쪽 가슴엔 나비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이놈 웃기네. 혼자 센 척은 다 하더니 나비 문신이라니…’
기수는 그를 비웃으며 숲 너머로 차 넣고 일행에 합류하여 쌀마가를 졌다.
그러자 아까 이충과 대화하던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이 친구 아직도 힘이 철철 남아도네.”
기수는 무거운 걸 너무 쉽게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장 허리에 힘을 빼서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고 숨도 거칠게 쉬기 시작했다.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군.’
기수는 힘 안 들어도 힘 드는 척하며 일행과 속도 맞춰 걸었다.
그러면서 선두가 어떻게 길을 찾는지 눈여겨보았다.
자기도 산채 부하들에게 길 찾기 쉽도록 힌트를 주었기 때문에 잘 보면 어떤 규칙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번 반복해서 보니까 뭔가 알 듯 모를 듯 했다.
‘바위, 나무, 바위 조합으로 삼각형을 그리는 식인가? 그런데 저놈은 뭘 중얼거리는 거지? 따로 외워야 할 공식이 있다면 골치 아픈데…’
그러는 사이 행렬은 일월신교 본진에 도착하고 말았다.
“어이! 이충. 어딜 가나? 우린 이쪽이야.”
동료가 불렀다.
“아! 그, 그렇지…”
기수는 당황했다.
길 찾는 법을 배우려다가 엉겁결에 적진 한 가운데 들어와 버린 것이다.
동료를 따라가면서 보니 일월신교의 병력 동원 규모가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잘 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길 찾아서 사매들 만나러 갈 필요 없이 그냥 여기 있는 놈들 전부 다 죽여 버리면 되는 거잖아?’
아주 간단한 해결책을 찾게 된 셈이었다.
기수는 일단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대가리부터 찾아야 돼.’
일이 수월해진 만큼 실수 없이 한 번에 잘 할 필요가 있었다.
얼굴을 아는 탈각왕과 풍도왕, 특히 기문진을 만들고 잔머리 깨나 쓰는 탈각왕이 제 1순위 제거 대상이었다.
그들을 찾아내다 보면 부수적으로 구마왕 중 나머지 2명의 소재, 그리고 교주나 그 아들들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었다.
기수는 동료를 따라가면서 윗사람으로 보이는 자들에게 눈치껏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자기한테 하는 다른 자들의 인사를 받아주면서 군룡 41의 의미를 대충 알아차렸다. 이충이 속한 곳은 군룡방. 그리고 그는 서열 혹은 입문 순서로 따졌을 때 41번째에 해당되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고강한 무공, 황궁에 가서 업그레이드시켜 왔는데 고작 일월신교 소속 일개 방파인 군룡방. 그 중에서도 서열 41위라니 한심했다.
그래도 고수들. 최소한 탈각왕을 찾기까지는 이충이란 인물 역할을 하면서 섞여 지낼 필요가 있었다.
“자넨 저쪽 군막이잖아? 왜 날 따라오나?”
“아! 그냥…. 무거운 걸 지고 오래 걸었더니 정신이 없네. 하핫!”
동료는 고개를 한 번 갸웃했을 뿐 별 의심 없이 자기 군막으로 들어갔다.
기수는 맞은편 군막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안에 있던 너댓 명이 바짝 쫀 표정으로 그에게 인사를 했다.
“조장님. 오셨습니까?”
“수고하셨습니다!”
기수는 대충 감을 잡고 그들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뭐야. 그놈 조장이었어? 그런데 그런 힘든 일을 왜 부하 안 시키고 직접 했지?’
기감을 끌어 올려 부하들의 기도를 살펴보니까 내공이랄 게 거의 없었다.
식량을 대량으로, 빨리 운반해야 하기 때문에 일정 수준의 능력을 지닌 사람을 차출했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기수는 부하 중 한 명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며 분위기를 파악했다.
이충은 군룡방 소속. 5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조장. 입문 순서가 41위고, 방내 서열을 그보다 약간 높은 것 같았다.
그리고 평상시 부하들을 몹시 괴롭히는 스타일이 분명했다.
그가 앉아 있자 다들 부동자세로 눈치만 보는 게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기수가 그들에게 물었다.
“오늘 근무시간은 어떻게 되지?”
“예! 저녁 먹고 술시부터 해시까지 담당구역 순찰 및 경계근무를 하고 내일 새벽 근무는 인시부터 묘시까지입니다.”
기합이 바짝 들어간 모습이었다.
“술시면 아직 많이 남았군. 난 나가서 좀 둘러보고 올 테니까 너희들은 쉬어라.”
“예? 쉬라는 말씀은…..”
힘든 일 하고 돌아온 조장이 자기네들한테 화풀이할 것이 분명해서 바짝 쫄아 있는데, 평소와 달리 아무 일 없이 넘어가니까 다들 놀라는 표정이었다.
기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빠져 자란 말이다!”
“예! 알겠습니다!”
부하들은 후다닥! 저마다의 자리에 누워 취침자세를 취했다.
기수는 씩 웃었다. 부하들과 친하게 지내던 사람보다 이 편이 나은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간 기수는 자신의 군막을 중심으로 우선 군룡방의 영역을 확인하고 조금씩 정찰의 범위를 넓혀 나갔다.
하지만 자꾸 사람들이 아는 척을 하니까 좀 곤란했다.
‘이따가 전방으로 배치된 뒤에 탈각왕을 찾아보는 게 더 나을 것 같군.’
기수는 군막으로 돌아가서 벌떡 일어서는 부하들을 손짓으로 누인 후 자기도 간이침상에 벌렁 누워 잠을 청하는 척 했다.
차분하게 호흡을 고르면서 휴식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눈을 감자 곧바로 주예림의 예쁘게 웃는 미소가 눈앞에 어른거렸고, 거기서 시선을 살짝 내리니까 탐스런 가슴, 좀 더 내리니까… 므흐흐~
‘아! 일월신교 놈들 처리한 다음엔 바로 달려가서 만나야지…’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번 한 번에 제대로 상황을 마무리해야 했다.
기수는 공주의 영상을 쫓아버리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 운기조식에 준하는 기식조절로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시간이 되자 기수의 조는 다른 조들과 함께 산 위로 올라갔다.
기수는 조장이지만 슬쩍 뒤로 빠졌다.
“오늘은 많이 걸었더니 피곤하군. 누가 대신 좀 앞장 서.”
“예! 조장님. 제가 하겠습니다.”
기수는 앞선 자의 생각을 염정구심술로 읽어서 기문진 안에서 길 찾는 비법을 알아내는데 성공했다. 그가 이전에 본 게 대충 맞았다. 바위와 나무가 일정 간격으로 정삼각형을 이루는 곳에서 그 거리 간격에 따라 횡으로 이동하는 발자국 수를 달리 하는 방식인데, 숫자 조합 한 줄만 외우면 되었다.
그 숫자 조합을 아는 사람은 쉽게 사문(死門)을 피할 수 있지만, 모르는 외부인 입장에선 고생깨나 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 좋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근무지에 도착해 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휑하니 빈 공간에 밤바람만 휭 휭 불 뿐이었다.
‘전방으로 배치되면 탈각왕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뭐….’
기수는 갈등했다. 이제 기문진 통과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소항산 산채로 올라가 사매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모처럼 적 진영에 성공적으로 잠입한 지금의 상황을 그냥 버리긴 아까웠다.
‘아! 기왕이면 더 고수를 잡아서 역용할 걸.’
그랬으면 이렇게 한적한 곳에서 보초나 서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따가 근무 끝나고 내려가서 적당한 놈을 찾아봐야겠군.’
몸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다. 시체 처리만 깔끔하게 하면….
그런 생각으로 지루한 근무시간을 보낸 기수는 부하들과 함께 산을 내려왔다.
막사에 도착하니까 부하들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술을 갖다 주었다.
“오늘은 별로 안 땡긴다. 이건 너희들이 마셔.”
부하들은 별일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쭈뼛거리며 술병을 받았다.
기수는 그들을 놔두고 밖으로 나갔다.
깜깜한 밤이라 오후보다 활동이 좀 더 자유로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간부로 보이는 40대 사내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좌우를 둘러보며 뭔가를 찾는 기색이었는데 기수를 보자마자 반가운 표정으로 웃더니 곧장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충! 마침 잘 만났네. 자네 가슴에 나비 문신 있지?”
“예? 아! 예….”
기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용술로 그걸 만들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게 신분을 확인하는 징표였단 말인가?’
기수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여차하면 플랜-B로 바꿔서 한바탕 뒤집어엎어야 할 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