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42
기수는 일월신교가 이번에 철저한 준비를 했음을 알게 되었다.
‘진짜 제대로 해 볼 작정으로 왔구나.’
만약 자기가 잠입을 택하지 않고 그냥 산으로 올라갔다면 화학무기에 대해선 꿈에도 모르고 있다가 당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는 한빙왕을 노려봤다.
제거 대상 1순위가 탈각왕에서 그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그 무슨 묵연인가 하는 것도 모두 없애야 했다.
미국은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계속 뭉개고 있지만, 지금 일월신교는 분명히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빙왕과 탈각왕뿐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8명을 모두 죽여도 절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정도의 힘에 각종 다양한 수단까지 보유한 적이라면 남겨두는 게 꺼림칙했다.
문제는 교주와 적근왕이었다.
그들과 자신 중 누가 센지는 붙어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조심스러웠다.
1:1이라면 몰라도 조력자들이 있는 상황에서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회의는 보유한 병력의 수와 배치 장소 등을 확인하는 약간은 지루한 보고 형식으로 이어졌다. 기수는 그동안 8명의 얼굴을 자세히 봐두고 목소리도 잘 기억했다.
언제 그들의 얼굴이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특히 수염이 없는 유지상은 옷만 좀 헐렁하게 입으면 확실하게 카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회의가 끝나고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교주는 훈시를 시작했다.
자식 잃은 부모의 한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하는 게 많아서 기수에겐 슬그머니 뒤로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숲으로 숨어 들어간 기수는 눈에 띄는 붉은 옷부터 벗어버리고 검도 함께 버렸다.
이제 더 이상 혈지왕에게 봉사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어둠 속 나무위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숨은 뒤 모두 해산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교주 훈시가 끝나자 먼저 혈지왕의 행동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기쁨 가득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드디어 아까 하다 만 진도를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검비가 보이지 않자 그녀의 눈이 홱 돌아가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그녀는 경공을 펼쳐 군룡방의 막사 쪽으로 달려갔다.
다른 마왕들은 그녀가 그런 행동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서로 몇 가지 소소한 잡담을 나누다가 저마다의 거처로 흩어졌다.
기수는 한빙왕의 뒤를 따랐다.
암살자가 된 기분으로 소음을 최소화하고 기도도 잘 숨겼다.
산 위의 사매와 부하들을 위해 이 암살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했다.
‘여자 죽이는 데도 익숙해지겠는데…’
기분이 약간 다운되기는 했다.
하지만 남녀를 떠나서 그녀는 구마왕 중 하나로 꼽히는 강자이고 혈매궁 말살하기 위해 화학무기를 운용하는 최악의 위협요소이기도 했다.
‘절대 망설이지 말고 최단시간에 확실하게 죽여야 한다.’
기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그녀를 따라가 십여 개의 군막이 원형으로 세워진 장소에 도착했다. 다른 군막들에 비해 넓고 평평한 자리를 독차지한 것만 봐도 뭔가 중요한 물건이 그 안에 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빙왕의 군막은 빙 둘러 있는 군막들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기수는 주변 지형과 군막 전체에 배치된 인원을 자세히 정찰했다.
한빙왕을 제거한 후 어디로 피신할지는 몹시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배치된 인원이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그 묵연이란 게 여기 있구나. 그걸 지키는 병력이야.’
한빙왕도 죽이고 묵연도 없애는 일을 혼자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쉽게 진입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한빙왕과 비슷한 옷을 입은 여자들 서너 명이 돌아다니며 순찰을 도는 게 보였다.
기수는 그녀들의 행동과 말에 집중했다.
가만히 보니까 등불이나 횃불을 상당히 민감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혹시 그 묵연이란 게 불에 약한 건가?’
화학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연기가 나는 물질이라면 불이 잘 붙을 것 같기는 했다.
‘지금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지?’
나무속에 숨어있다 보니 확실치 않았지만 최소한 산 위쪽으로 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전부 태워버리는 것으로 위협을 제거할 수 있었다.
‘우선 한빙왕을 죽이고….’
기수는 자신의 내공 상태를 점검한 후 얼굴을 바꿨다.
아까 보아 둔 유지상의 얼굴이었다.
교주의 아들이니까 경계병도, 한빙왕의 제자들도 특별히 의심하지 않고 통과시켜 줄 가능성이 컸다. 날이 어둡기까지 하니까 한빙왕도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용무가 있어서 만나러 왔다, 단둘이 조용히 얘기하자고 한 후 군막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죽이고 밖으로 나와 불을 지르면 화학무기의 위협은 말끔히 해소되는 것이다.
그렇게 작전을 짠 기수는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 역용 상태를 점검하고 머리도 잘 넘겨 두건으로 정리한 후 나무에서 내려갔다.
그가 다가가자 경비병 4명이 한꺼번에 튀어 나와 길을 막았다.
“웬 놈이냐!”
“멈추어라!”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보니까 같은 일월신교 교도들도 통행이 제한된 것 같았다.
기수는 유지상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다.
“수고들이 많군.”
“아! 소교주님!”
상대를 알아본 경비병들은 즉시 창과 칼을 거두고 차려 자세를 취했다.
기수는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그들 사이를 지났다.
그러자 순찰 돌던 여인들이 다가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기수는 그들에게도 손짓을 하면서 허허 웃었다.
살짝 긴장했는데 아주 순조롭게 중앙 천막까지 진입하게 되었다.
‘아! 거울 없이도 완벽한 역용 가능한 사람이 세상에 나 말고 또 있을까?’
중앙 천막으로 가자 한빙왕이 마중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몹시 사무적이고 경직된 어조였다.
‘이런 시간에 찾아온 게 실례일까? 아무리 교주 아들이라고 해도?’
한빙왕이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그건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예. 그러시지요.”
한빙왕은 앞장서서 자기 천막으로 들어갔다.
기수는 따라 들어가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케이! 미안하지만 이것으로 너의 생명은 끝났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니까 너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마.’
입구가 내려지고 군막 안에 단 둘만 있게 되자 한빙왕이 돌아서서 말했다.
“호호호!…. 아무래도 어제 너무 급하게 끝났지?”
기수는 당황했다.
‘뭐지? 이건….’
밖에선 공무원처럼 딱딱한 얼굴이었는데 밀폐된 공간에 둘만 있게 되니까 갑자기 미소와 애교가 가득 번졌다. 같은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서, 설마… 둘이 사귀는 사이인 건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서있으려니까 한빙왕이 곧바로 앞으로 다가와 무릎 꿇고 앉더니 바지를 잡았다.
기수는 자기도 몰래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한빙왕이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괜찮아. 어제는 너무 빨리 하느라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지만 지금은 누나가 처음부터 완벽하게 해줄게. 넌 가만히 내려다보면서 즐기기만 해. 알았지? 호호! 그런데 옷은 왜 이런 걸 입었어? 변장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기수는 그녀가 바지 벗기는 걸 막지 못했다.
못했다기보다는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아! 이 인간성 어쩔 거냐…’
한빙왕은 바지를 끌어내리면서 계속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까 그 혈지왕 할망구 년이 너한테 계속 추파를 던지는 거 보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아? 정말 말도 안 되지. 둘째 도련님 편에 붙었던 년이 이제 와서 무슨 낯으로 감히…. 너. 혹시 그 늙은 년한테 눈길 준 건 아니지?”
“아! 나, 나는….”
눈길을 준 게 아니라 다른 걸 줬는데,,,
할망구라니? 20대 초반으로 보인 게 설마 주안술이었단 말인가?
가만 생각해 보면 아래쪽은 확실히 외형상 오래 사용한 티가 나긴 했다.
‘헉! 나 설마….’
상당히 나이 많은 여자하고 한 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구마왕들의 나이가 최소 40에서 50대였던 걸 감안하면 여자들이라고 해서 딱히 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무슨 피부가 그렇게 매끈하고 살은 탱탱하단 말인가.
유지상의 나이도 20대 후반. 거의 서른 가까운 것 같던데, 그런 유지상을 보고 스스럼없이 누나라고 하는 이 한빙왕도 실제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것일 수 있었다.
“어, 엄마야! 워, 원래 이렇게 컸었나?”
기수는 화들짝 놀랐다.
‘아! 얘네들 어저께 한 번 했다고 했지? 그럼 들키는 거 아냐?“
그러나 한빙왕은 의심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몹시 기쁘고 반가워하는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더니 단숨에 절반 이상을 덥썩! 하고는 쪼오옥~ 흡입하기 시작했다.
기수는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며 참았다.
‘안 돼! 풀 사이즈가 되면 진짜로 들키고 말 거야.’
본 적 없었다고 하더라도 사이즈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면 곤란했다.
기수는 급히 몸을 뺐다. 그러나 한빙왕은 민첩하게 무릎걸음으로 따라 붙으며 입을 떼지 않으려고 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기수가 절대 사양할 리 없지만, 지금 가장 급한 일은 한빙왕을 죽이고 화학무기를 불태우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암살 대상자와 엮일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막지 못한 것은 잘못이지만, 이제라도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었다.
그때, 밖에서 여제자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부님! 처, 첫째 소교주님이 오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한빙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수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지금!….’
기수는 잽싸게 한빙왕의 혈도를 제압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 고수인지라 쉽게 당하지 않았다.
있는 힘껏 이빨에 힘을 주어 깨물면서 몸을 틀어 피했다.
“으아악!……”
“아악!…..”
기수는 괴성을 지르며 비틀거렸고, 혈도를 스쳐 맞아 몸의 절반이 마비된 한빙왕도 비명을 질렀다.
기수는 황급히 아래를 확인했다.
“으윽! 피!…..”
고통과 분노에 이성을 잃은 기수는 한빙왕을 향해 파천강기를 날렸다.
퍽! 소리와 함께 이마가 뚫린 그녀는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암살미션 성공! 하지만 피해가 극심했다.
기수는 살이 잘리거나 떨어져나가지 않았다는 사실만 확인한 후 황급히 속옷과 바지를 추켜올렸다. 밖에서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사부님! 무슨 일이세요!”
기수는 왼손으로 바지춤을 잡고 고통을 참으며 입구를 향해 파천강기를 연달아 날렸다. 한 손 공격이지만 그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천막이 걸레가 되다시피 한 뒤에 확인해 보니 천막 안으로 들어오려던 자들은 모두 시체로 변해 있었다. 파천강기가 워낙 파괴적인 데다가 시야까지 가려졌기 때문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당한 것이다.
“젠장!”
기수는 자신의 내공이 예상보다 훨씬 고강해진 것을 기뻐할 여유조차 없었다.
쓰러진 자들 중에 유지상이 보였기 때문이다.
동생 유지광은 상당한 고수였는데, 형은 싱거울 정도로 허무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일월신교 입장에선 나를 진짜 원수로 생각하겠군. 교주 아들 셋 중 둘을 죽였으니.’
기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어차피 그런 거 걱정해줄 거면 강호행을 할 자격이 없지. 여긴 무림이야.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나나 사매가 죽을 거라고.’
독하게 마음먹은 그는 달려드는 경비병들을 향해서도 무차별적인 파천강기를 날렸다. 내공 소모가 심해서 웬만하면 잘 안 쓰던 기술이지만, 지금은 최단시간 내에 목표를 제거해야 하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교주나 적근왕이 나타나서 방해하게 할 수는 없었다.
파천강기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본 경비병들은 겁을 먹고 더 이상 덤비지 않았다.
그러나 숨어서 종을 요란하게 치고 있었다.
주변 교도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기수는 근처에 꽂혀 있던 횃불을 들고 한 천막으로 들어가 보았다.
“윽!….”
기수는 급히 숨을 참았다.
뭔가 알싸하고 눈물 나오게 만드는 강력한 냄새가 천막 안에 가득했다.
안엔 마치 장독대를 연상시키는 수십 개의 항아리들이 있었는데 모두 입구를 밀봉시켜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독한 냄새를 숨기지 못했다.
“모든 천막마다 이만큼씩 있단 말인가?”
끔찍한 일이었다.
기수는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횃불을 던지고, 그것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항아리들에 파천강기를 날려 모조리 깨부쉈다.
그리고 냄새가 퍼지기 전에 선풍비로 천막을 빠져나왔다.
횃불이 깨진 항아리에 닿자 확! 하는 폭음과 함께 엄청난 화염이 생성되었다.
“으윽!….”
기수는 자신의 선풍비 시전이 조금만 늦었어도 그 화염에 휩싸였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인화성이 굉장히 강하네. 그렇다면…’
기수는 천막 안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면서 주변의 천막마다 파천강기를 연달아 날렸다.
천막에 구멍이 뻥뻥 뚫리면서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기수는 그 천막들을 향해 횃불을 잡히는 대로 뽑아 던진 후 황급히 현장을 벗어났다.
타는 연기를 마시면 죽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능선을 지나자마자 기문진이 길을 막았지만 기수는 통과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현장에서 벗어나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만큼 간격을 벌린 기수는 돌아서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화염이 계속해서 커지고 있었고, 사람들의 고함도 점점 크게 들려왔다.
비명을 지르는 자도 있는 것으로 보아 독연이 퍼지면서 피해자가 생기는 듯 했다.
‘흥! 화학무기를 만든 벌이다. 감히 우리를 상대로….’
처음 계획한 것보다 많은 피를 보긴 했지만 사매들을 구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그리고 적의 수뇌부 8명을 6명으로 줄인 것도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성취감과 함께 잠시 잊고 있었던 통증이 밀려왔다.
“으으….. 하필이면 그때 진짜가 나타나다니….”
아무리 그랬다고 해도 한빙왕의 대응이 너무나 무서웠다.
어떻게 그 상황에 깨물 생각을 했을까.
0.01초라도 늦어서 잘리기라도 했다면? 상상만 해도 온몸이 떨려 왔다.
기수는 조심스럽게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출혈 때문에 속옷과 바지가 다 젖을 정도니까 잘리지 않았다고 해서 안심할 상황은 아닌 듯 했다.
기수는 일단 조심, 조심 어기적거리면서 산 위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