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46
두 명의 일월신교 교도가 호중만을 앞서 갔다.
깜깜한 밤중이라 횃불을 들고 길 안내를 하는 것이었다.
기수는 그들을 조용히 따라갔다.
산을 다 벗어나 평지에 도착하기까지 1시간 반 정도.
일월신교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을 확인한 기수는 가볍게 몸을 날려 잔백지로 세 사람의 혈도를 점했다.
“으으….”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고꾸라졌다.
“후후… 실망인 걸.”
기수는 가볍게 웃었다. 적어도 호중만 정도는 뭔가 대응이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쉽게 끝나버린 것이다.
기수는 언제부터인가 상대를 잘 죽이지 않게 되었다.
정확히 얘기하자며 약자는 혈도만 짚어 제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도 아주 약하게 눌러서 각자의 내공에 따라 30분에서 한두 시간 뒤면 풀릴 정도로만 사용했다.
그것은 강호 경험이 늘어나고 무공이 높아지면서 생긴 변화였다.
9마왕 정도의 상대라면 기꺼이 죽였고, 그보다 아래 수준이라도 강호에서 고수 행세를 하는 자라면 죽이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한참 수준이 낮은 쫄따구들은 훨씬 더 쉽게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악행을 목격하지 않는 한 그냥 혈도만 짚었다.
이유는 너무 쉽기 때문이었다.
호랑이는 죽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나 할까.
무공이 약할 때는 상대가 나를 죽이지 못하도록 기회 있을 때 확실히 죽이는 선택을 했지만, UFC 선수와 태권도장 다니는 초등학생 수준으로 차이가 벌어지고 나니까 죽일 이유가 사라지고 말았다.
단순히 일월신교 소속이라고 해서 죽이는 것도 이상했다.
명문정파라고 해도 결국 무림인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횃불을 발로 차 준 기수는 축 늘어진 호중만을 일으켜 어깨에 들쳐 멨다.
단순히 공장장 처단을 결심했다면 기회가 많이 있었지만 굳이 산 아래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납치를 택한 것은 그에게 묻고 싶은 일들이 있어서였다.
공장의 위치를 알면 제조중인 강시도 다 없앨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중만을 들쳐 메고 산으로 오르려던 기수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둠 속에 뭔가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기수는 호중만을 내려놨다.
어둠 속에 있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온몸이 저릿저릿해 왔다.
그가 진기를 끌어 올리고 미동조차 하지 않자 어둠 속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누구냐?”
낮은 저음에 약간 허스키인 남자 목소리였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모습을 보여라.”
한 남자가 깃털처럼 부드럽고 조용한 신법으로 기수 앞에 나타났다.
바로 9마왕 중 한 명인 적근왕이었다.
“으으….”
기수 입장에선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호중만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뒤를 따른다면서 정작 자기가 뒤를 밟힐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적근왕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교주님 말씀이 옳았군. 쥐새끼가 머리를 드러냈어. 네가 혈매궁 궁주냐?”
기수는 피식 웃었다.
“일월신교에 바보만 있는 건 아니었군. 그렇다. 내가 궁주다.”
적근왕은 무서운 눈으로 기수를 노려보며 물었다.
“네가 첫째, 둘째 도련님을 죽였느냐?”
“그렇다.”
기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강적과 제대로 싸우고 싶어졌다.
황궁에서 보내 한 달은 주예림 공주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상당한 내공증진의 기간이었기 때문에 실전에서 제대로 검증해보고 싶었다.
방금 적근왕이 보인 신법은 자신의 상대로 부족함이 없음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적근왕은 싸움보다 다른 데 더 관심이 많았다.
“누구냐? 너의 배후가…”
“내 배후는….”
기수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대답했다.
“네가 날 이기면 말해주겠다. 들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라.”
적근왕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잔신만만하구나. 어린 놈이…”
“글쎄…. 그럴 만 하지 않을까?”
“흥! 우리 교에 둘째 도련님보다 더 한 고수가 없을 줄 아느냐?”
기수의 미간이 좁혀졌다.
‘설마 자기가 유지광보다 세다는 건가?’
그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갑자기 전기 충격에 대한 공포가 되살아났다.
바로 그 순간, 적근왕이 몸을 날렸다.
화살보다 빠른 스피드. 기수는 호신강기를 바짝 끌어 올리며 뒤로 피했다.
“흥! 네가 나한테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적근왕은 냉소를 지으며 더 빠른 속도로 재차 다가왔다.
기수는 또 뒤로 물러섰다.
상대의 경공이 선풍비를 추월할 정도로 빠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긴 했지만 전기충격에 한 번 당하면 절대로 회복할 시간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계속 도망만 칠 생각이냐?”
적근왕은 노갈을 터뜨렸다.
그러나 기수는 그 사이 수도로 나뭇가지를 잘랐다.
길이는 야구 배트 정도, 굵기는 배트 손잡이보다 좀 굵은 방망이를 손에 잡고 보니까 좀 안심이 되었다.
‘여기엔 전기가 안 통하겠지?’
상대의 실력을 모르면서 처음부터 파천강기로 내공을 낭비할 수도 없고, 손을 맞댈 수도 없기 때문에 선택한 방법이었다.
일단 무기가 생기니까 더 이상 뒷걸음질 칠 이유가 없었다.
기수는 나무 몽둥이에 진기를 주입한 후 칼처럼 휘두르기 시작했다.
맹렬한 파공음과 함께 공격이 이어지자 이번엔 적근왕이 뒤로 밀렸다.
그는 양손으로 각각 길이가 다른 검을 뽑았다.
길이는 별로 길지 않지만 몹시 굵고 무거워 보이는 특이한 검이었다.
두 자루 철검과 나무의 격돌!
그러나 기수가 진기를 가득 주입한 나무 몽둥이는 강철만큼이나 튼튼했다.
적근왕은 좀처럼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하핫! 이제 보니 별 거 아니었구나.”
기수는 완전히 자신감을 회복했다.
반대로 적근왕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수가 이 정도로 강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듯 했다.
기수는 도법 식으로 휘두르던 나무 몽둥이의 움직임을 바꿔서 검처럼 찔러 들어갔다.
초식에 변화가 가미되자 적근왕은 더욱 수세에 몰렸다.
기수는 그 과정에 상대의 반응을 면밀히 살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놈. 전기 충격을 쓸 줄 모른다.’
이 정도까지 밀리면 뭔가 상황반전을 모색하기 위해 자신의 필살기를 사용하기 마련인데, 적근왕은 맨살에 접촉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기수는 자신의 내공 증진을 확인한 게 기뻤고, 이 대결이 승리로 끝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더욱 기뻤다.
‘이제 보니 별 거 아니었잖아? 후후….널 죽이면 9마왕 중 셋만 남게 된다.’
기수는 적이 소리를 듣고 몰려오기 전에 끝장을 내리라 결심했다.
빠른 마무리엔 파천강기 혹은 단정홍이 최고였다.
계속 상대를 몰아붙이면서 한 방에 끝낼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갑자기 적근왕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뭔가 안개처럼 희미한 막 같은 게 그의 몸을 감싸는 게 보였다.
‘뭐지? 이건?’
기수는 적근왕의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뭔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시간 끌지 말고 당장 끝내야겠군.’
기수는 왼손 중지로 파천강기를 날렸다.
기습적인, 그리고 너무나 빠른 공격이기에 몽둥이 막기에 정신 없던 적근왕은 그걸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퍽! 하는 준탁한 파열음과 함께 이마 한 가운데를 적중 당한 적근왕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두 발이 땅에서 떨어져 뒤로 날아갔다.
그리고 와지끈! 소리를 내며 숲에 처박혀 버렸다.
“하하!…..”
기수는 통쾌하게 웃었다.
좀 싱겁게 끝난 감은 있지만, 적지이고 데려가야 할 포로도 있으니까 일찍 마무리한 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팽개쳐 두었던 호중만 쪽으로 걸어갔다.
그 때,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적근왕이 걸어나왔다.
“방금 그 수법은 무엇이냐?”
기수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적근왕을 감싼 안개 같은 것이 좀 더 짙어져 있었고, 당연히 뚫릴 거라고 생각했던 이마엔 불그레한 자국만 남아 있을 뿐 피 한 방울 나지 않고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와 기도 역시 몹시 안정적이었다.
‘이 새끼 뭐야? 호신강기인가?’
기수는 안색을 굳히고 다시 내공을 끌어 올렸다.
적근왕은 양 팔을 다 늘어뜨린 느긋한 자세로 쌍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기수는 그를 노려보다가 왼손 다섯 손가락으로 파천강기 수십 개를 연달아 날렸다.
어떻게 해서 막혔는지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다.
수십 발의 강기가 날아가 꽂히자 적근왕의 상체가 뒤로 젖혀졌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에는 어떠한 상처도 생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옷조차 찢어지지 않았다.
“흐흐흐…. 화끈하구나.”
자세를 바로잡은 적근왕은 쿵쿵거리며 기수를 향해 돌진해 왔다.
기수는 이를 악물었다.
이전에 대도왕도 이와 비슷한 호신강기로 사매들을 애먹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탁지연의 호신강기에 뚫렸고, 적근왕처럼 안개 형상을 띄지도 않았었다.
적근왕의 호신강기는 대도왕에 비해 적어도 두세 단계는 위임이 분명했다.
‘그래.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하지만 네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기수는 북궁심법으로 3개 단전을 동시에 가동했다.
그리고 풀 파워로 파천강기 수십 발을 연달아 발사했다.
파파파파팍!….
달려들던 적근왕의 스피드가 늦춰지고, 멈추고, 상체가 뒤로 밀리는가 싶더니 결국 그의 몸이 붕 떠서 뒤로 날아갔다.
쿵! 소리와 함께 거목에 부딪히자 나무가 힘을 견디지 못해 부러졌다.
“헉… 헉… 헉…!”
기수는 가쁜 호흡을 조절하며 적근왕의 반응을 살폈다.
놀랍게도 적근왕은 벌떡 일어섰다.
이번엔 옷이 걸레가 된 상태.
손에 들고 있던 두 자루 검도 부러져서 땅바닥에 버리고 맨손이었다.
그러나 몸 어디에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고 기식도 평탄했다.
적근왕이 목을 한 바퀴 돌리며 말했다.
“제법이구나. 과연 둘째 도련님이 당하실 만도 했어.”
기수는 그의 건재함에 두려움을 느꼈다.
“마, 말도 안 돼….”
대도왕에 비해 강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차원이 달랐다.
‘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사도인 유지광도 이 정도 레벨은 아니었다.
목을 푼 적근왕은 한 발을 들었다가 쿵! 소리를 내며 진각을 하더니 자세를 낮추고 코뿔소처럼 돌진해 왔다.
“으아아아…..!”
우렁찬 기합소리와 저돌적인 기세에 밀린 기수는 훌쩍 뛰어 뒤로 피했다.
적근왕은 마치 기동 시범 보이는 T-90 탱크처럼 날아와서 기수가 있던 부근의 나무들을 박살냈고, 곧장 방향을 바꾸어 다시 달려왔다.
기수는 파천강기 연타에도 끄덕없는 상대를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몰라 그냥 계속해서 피하기만 했다.
처음 싸움을 시작할 땐 적근왕을 빨리 해치우고 조용히 산채로 복귀하자는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과연 그를 이길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게다가 산 중턱에서 요란한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월신교 교도들이 몰려오는 게 분명했다.
깜깜한 시간, 험한 지형에 심리적으로 당황하기까지 하다 보니 평소였다면 절대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도 나왔다.
뒤로 피하다가 튀어나온 바위에 뒤꿈치가 걸린 것이다.
‘이런, 젠장!’
고수와의 싸움 도중 나온 실수는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승패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다.
돌진하던 적근왕의 눈이 기광을 발했고, 기수는 그의 스피드업에 대응하지 못하고 돌덩이 같은 몸에 정면으로 부딪혀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크윽!….”
기수는 그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고 몸의 회전과 바닥에의 착지 각도를 고려해서 균형을 잡았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또 다시 들려오는 파공음.
적근왕은 탱크처럼, 코뿔소처럼 달려와 들이받았다.
기수는 한 번 더 충격을 받으며 튕겨 나갔다.
2연타를 맞고 보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이런 둔탁한 공격만 반복하는 거지?’
부딪힌 자리가 골절이 의심될 정도로 아프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의 균형이 흐트러진 절호의 기회. 요혈을 타격하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몸으로만 부딪힌다는 게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만큼 몸통치기에 자신 있다는 건가? 아니면 검 없이 맨손으로는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기수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이놈은 지금 날 두려워하고 있다!’
거북이 등껍질 같은 딱딱한 호신강기 안에 숨어서 손가락 하나 내밀지 못할 정도로 겁을 먹은 게 분명했다.
기수는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상대의 눈을 노려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적근왕의 눈썹이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것은 아주 미약한 움직임이었지만 기수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게 해주었다.
“좋아! 어디 한 번 제대로 해볼까?”
기수는 한 번 크게 도약하여 10미터 정도 간격을 벌린 후 방금 전 적근왕이 했던 것처럼 목을 좌회전 한 번, 우회전 한 번 돌렸다.
그리고 추가로 어깨도 앞뒤로 한 번 돌려주었다.
적근왕이 냉소를 지었다.
“흐흐흐…. 네게 희망이 있을 것 같으냐?”
기수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양손 가드를 올린 후 이소룡 스텝으로 깡총깡총 뛰다가 손으로 개 부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내 주먹이 대답해줄 것이다. 덤벼라.”
“이 놈이….!”
적근왕의 신형이 포탄처럼 돌진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