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50
기수는 호중만을 죽이기 전에 염정구심술로 그의 마음과 동조하여 장소를 알아낸 바 있었다.
염정구심술의 기억은 메모장에 펜으로 그리는 약도보다는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어두는 것과 비슷해서 단번에 장원을 찾아갈 수 있었다.
장원은 절묘한 장소에 위치하고 있었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마치 성처럼 높은 담을 두르고 있어서 육로건, 호수 쪽으로건 접근이 쉽지 않았다.
석초가 기수에게 물었다.
“형님. 저곳에 병력이 어느 정도나 있을까요?”
“글쎄. 일월신교 입장에서는 몹시 중요한 장소니까 한 100명쯤 지키고 있겠지.”
“우리가 들어가면 저들이 증거를 다 없애려고 하지는 않을까요?”
석초의 임무는 강시제조법에 대한 단서를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와 사매들이 그 전에 놈들을 제압할 거야.”
“형님만 믿겠습니다.”
“이봐. 공연히 시간 낭비할 것 없이 일을 효율적으로 하자고.”
“어떻게 말입니까?”
“따로 움직이는 거지. 넌 지금 도지휘사사에 가서 병력을 끌고 와. 그거 서류 작업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리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그동안 우리 일곱 사람이 장원 안의 상황을 전부 정리해놓을게.”
“저 없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기수가 씩 웃었다.
석초는 그 웃음의 의미를 금세 알아차렸다.
사실, 자신의 무공은 혈매궁 여인들 중 가장 처지는 설매와 비교해도 우위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부끄럽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들은 만날 때마다 내공이 더 심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로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형님 말씀대로 하면 정말 이곳의 일을 금방 끝내고 시랑님과 합류할 수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즉시 다녀오겠습니다!”
석초는 일행과 헤어졌고 일곱 명은 장원을 향해 갔다.
호수는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장원으로 가는 길은 꽤 험하고, 좁고, 거칠었다.
기수 일행에게 그 정도 지형이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길이 아니라 다른 데 있었다.
선두에 섰던 기수는 손짓으로 사매들을 멈추게 한 후 함께 숲으로 몸을 숨겼다.
수십 명의 무사들이 장원 주변에 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누구지?”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있었나?”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포위진형이 장원 쪽을 향하고 있잖아. 침입자를 막으려는 게 아니라 저들이 침입자야.”
춘매가 그들을 자세히 살펴본 후 말했다.
“저들은 남궁세가 사람들 같은데?”
“확실해?”
“무복이 눈에 익어. 틀림없어. 이 지역은 좀 멀긴 하지만 남궁세가의 영향권이라고 볼 수도 있거든.”
“남궁세가라….”
기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림맹으로 대표되는 정도 무림.
그들은 9파, 1방, 4문, 5가를 중심으로 천하의 수백, 수천 문파가 연합한 거대 조직이었다. 평화로운 시절엔 천하 각지에 분산되어 저마다 자기 영역을 지킬 뿐이었지만, 일단 위기감을 공유하고 하나로 뭉친 이후에 보여주는 힘은 가공할 정도였다.
마교와 삼황맹, 녹림72채, 수로맹으로 이루어진 연합세력과 싸우면서도 끄덕 없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 중 5가는 제갈세가의 배신으로 인해 지금은 4가만 남았다고 할 수 있지만, 어쨌거나 무림맹 세력의 중요한 일부분이고 남궁세가도 그 안에 속해 있었다.
“무림맹은 마교와의 전쟁으로 바쁠 텐데 남궁세가는 왜 여기 와 있는 거지?”
탁지연이 말했다.
“남궁세가 전체 전력 중 저 정도 인원이면 일부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해도 왜 하필 여기에….”
“직접 부딪혀서 물어볼 수밖에 없죠.”
기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가기 전에…”
기수는 역용술로 얼굴을 슬쩍 바꾸었다.
무림맹에는 자신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많았다.
홍안산에서 제갈세가의 동굴 함정에 빠져 죽게 된 것을 구해준 기수와 혈매궁 궁주 양칠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동매가 기수의 순식간에 달라진 얼굴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궁주. 그건 어떻게 하는 거야? 우리한테도 가르쳐 줘.”
“탁매도 할 줄 아니까 그녀에게 배워.”
사매들은 탁지연에게 다짐을 받은 후 다들 면사로 얼굴을 가렸다.
기수가 얼굴 노출을 꺼리니까 자기들도 거기에 맞춘 것이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자 깜짝 놀란 남궁세가 무사들이 짧은 휘파람 신호를 주고받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일곱 명을 에워쌌다.
“너희들은 누구냐? 여기엔 뭐 하러 왔지?”
기수는 양손을 내저었다.
“다들 진정하라고. 우린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가서 너희들 우두머리를 좀 불러와. 할 얘기가 있어.”
그러자 그들 중 한 명이 기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네놈들이 뭔데 감히 우리 공자님을 불러오라 마라 하느냐!”
금나수로 기수의 완맥을 잡아 제압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기수도 아닌 풍매가 대신 나서서 검지로 그의 혈을 눌러 바닥에 쓰러트려 버렸다.
“궁주님에게 무례하기 굴지 마라!”
남궁세가 무사들은 그녀의 솜씨에 깜짝 놀라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다.
“너, 너희들은 누구냐!”
기수가 다시 손을 내저어 그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오늘 야습을 준비한 모양인데, 지금 여기서 소란 피워봤자 득 될 게 없잖아? 어서 너희들 우두머리를 불러와.”
잠시 후 화려한 비단 무복을 입은 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기수와 비슷한 또래였고 턱이 약간 튀어나왔으며, 눈썹이 짙고, 눈매가 날카로웠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부하들과는 달리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었다.
기수도 그에 맞춰 줄 생각으로 포권을 한 후 말했다.
“우리는 혈매궁 사람들이오.”
“혈매궁!”
남궁가의 공자는 몹시 놀라고 당황한 기색이었다.
기수는 속으로 웃었다.
‘후훗…. 우리가 벌써 그 정도로 유명해졌나?’
남궁가 공자는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가라앉힌 후 포권을 했다.
“나는 남궁세가의 3남 인(仁)이라고 합니다.”
“아! 남궁세가의 공자님이었군요.”
기수는 최대한 정중하게 대해줬다.
현재 자신과 사매들은 대장군부의 백무영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무림맹 사람들에게 적대적으로 대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남궁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혈매궁의 궁주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소문에 듣기로 혈매궁 궁주는 여섯 명의 선녀들과 늘 함께 다닌다고 하기에 한 번 넘겨짚어 보았습니다.”
실제 강호에 퍼진 소문은 여섯 명의 마녀지만 장본인들을 바로 앞에 두고 그 단어를 쓰기엔 겁이 났다.
남궁인은 부하들과 달리 여섯 여인의 무시무시한 기도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궁주라는 남자의 기도는 오히려 평범했는데, 설마 궁주가 부하들보다 무공이 떨어질 리는 없다고 봤을 때, 그의 무공은 한 단계 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남궁인 입장에선 진땀나는 순간이었다.
“매화궁에서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만약 적으로 돌변한다면 큰일이라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리고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혈(血)자를 빼고 매화궁이라고 바꿔 불렀다. 명문정파 이름엔 꺼리는 글자이기 때문이었다.
혈매궁이 적어도 정도에 적대적이지는 않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었다.
강호에 퍼진 소문만으로는 그들이 정과 사 중 어느 쪽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일월신교의 적이니까 같은 편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었다.
기수가 대답했다.
“우리는 이 장원에 볼일이 있습니다.”
“볼일이라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그들이 가진 것을 전부 압수할 것입니다.”
남궁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홍가장이 매화궁과 원한관계일 줄은 몰랐습니다.”
“딱히 이곳 사람들과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원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는데, 만약 저항한다면 모두 제압해버릴 생각입니다. 그뿐입니다.”
“일곱 명만으로 말입니까?”
기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우리는 상대가 백이건, 천이건 일곱 명으로 상대합니다. 그거면 충분하니까요.”
남궁인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여섯 여인과 한 명의 청년.
얼핏 보기엔 호숫가로 산책이라도 나온 유유자적한 모습이지만 가까이에서 기도를 느껴보니 일곱 명으로 충분하다는 게 절대 농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기수가 그에게 물었다.
“남궁세가에서는 무슨 일로 여기에 왔습니까?”
남궁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실은, 최근 홍택호 인근에 해괴한 일들이 벌어져서 조사를 나왔습니다.”
“해괴한 일이라면….”
“사람들이 실종되고, 무덤이 도굴되는 일들이 자꾸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각도로 알아봤더니 모든 단서가 이곳으로 이어지더군요.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암기를 던지며 도발해오기에 다른 방법을 쓰려고 하는 중입니다.”
기수는 일이 꼬이는 게 싫었다.
‘아! 호중만 이 멍청한 놈. 조심 좀 하지.’
갑자기 수백 구의 시신을 조달하려니까 무리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 남궁세가의 이목을 끌게 된 게 분명했다.
강시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는 일은 막을 수 없었다.
소항산 전투에 참가했던 일월신교 교도들의 수많은 입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처리에 혈매궁과 관군이 개입했다는 소문은 막고 싶었다.
무림의 일에 관이 간여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금기시 되었다.
그리고 혈매궁이 관의 끄나풀이라는 식으로 알려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수가 남궁인에게 말했다.
“이곳의 일을 저희들에게 양보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남궁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저희들의 일입니다. 오랜 기간 조사해오기도 했고요.”
의외로 강경한 태도와 말투였다.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사실, 그들의 세력권 안에 들어와 그들이 조사 중인 일에서 빠져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상당히 무례한 요구이기는 했다.
‘확! 이것들을 전부 다 점혈해버릴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남궁인이 약간 까다로울 뿐 나머지 50여명은 고만고만한 무공의 소유자였다.
자신과 사매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을 몰살시키는 일도 가능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명분이 없었다.
오래지 않아 석초가 관군을 이끌고 나타날 텐데 그들 앞에 남궁세가 사람들의 시체 혹은 제압당해 쓰러진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아~! 신경 써야 할 동업자가 있다는 건 역시 귀찮은 일이야.’
그러나 애당초 사매들을 위해 선택했을 때부터 각오한 일 아니겠는가.
대장군부 백무영과 끈이 이어져 있는 한, 사마외도라면 몰라도 무림맹 소속 사람들과는 싸울 수 없었다.
‘그나마 얼굴 바꾸기를 잘 했군.’
생각을 정리한 기수가 남궁인에게 제안했다.
“양측의 목적이 같은 것으로 보이는데 함께 공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무림맹 소속인 남궁세가도 관과의 마찰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어쩌면 관에 점수 따기를 바랄 수도 있었다.
무림맹은 온갖 문파가 총 집결한 만큼, 안에 여러 부류가 있었다.
전통적인 9대문파는 불교 혹은 도교 수행의 일부로 무공을 익히는 식이라 전통과 명예를 중시한다고 볼 수 있고, 세가는 그들에 비해 훨씬 개방적이고 권력 친화적인 성향이었다. 그리고 십절금왕문 같은 상단 기반 문파들은 무림맹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남궁세가라면 석초가 알아서 잘 처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남궁인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이것은 저희들의 일입니다. 외지에서 오신 손님들에게 수고를 끼쳐드릴 수야 없지요. 압수할 물건이 무엇인지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저희들이 모두 챙겨드리겠습니다.”
그건 안 될 말이었다.
“내가 직접 확인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남궁인의 어조가 더욱 단호해졌다.
“외인이 우리의 일에 개입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엔 손님에게 수고를 끼치지 않겠다고 하더니 이젠 외부인은 꺼지라는 식이었다.
‘개입?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이러지?’
기수는 그의 태도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 슬쩍 염정구심술을 써보았다.
남궁인은 장원 안에 뭔가 큰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의심하는 중이었다.
처음엔 괴사건을 조사한다는 정도의 의도였지만, 혈매궁이 여기까지 직접 찾아와 압수할 물건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뭔가 낌새를 느낀 것이다.
‘눈치가 빠른 놈이군.’
자기가 빌미를 제공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남궁세가만 들어가게 할 수는 없었다.
백무영도 그걸 바라지는 않을 것이었다.
기수는 눈에 힘을 주어 남궁인을 노려보며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자들을 추적해왔소. 남궁세가라면 근거지가 하남인 것으로 아는데, 이 먼 곳까지 와서 우리한테 외인이라고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소만…”
새로 만든 얼굴은 본래의 완벽한 조각 미남 바탕 위에 UFC 선수 같은 약간의 야성미를 더했기 때문에 상대를 충분히 쫄게 만들 수 있을 거라 보았다.
남궁인은 확실히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심호흡도 했다.
하지만 기수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우리 남궁세가는 백성들이 위험에 처하면 천하의 어디든 달려가서 도움을 주고 있소. 이곳 홍가장은 우리가 먼저 찾아냈고, 우리가 먼저 왔으니까,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오. 당신들은 물러가시오.”
기수는 어이가 없었다.
‘이게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기수는 진기를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