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51
강호의 정의는 힘.
기수는 쉽고 간단한 해결방법 놔두고 길게 말로 떠들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막 나서려 할 때 탁지연이 끼어들었다.
“궁주님. 이 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기수는 의아했지만 곧 그리 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탁지연이 남궁인에게 말했다.
“우리 혈매궁은 훼방꾼을 그냥 놔두지 않아요.”
“그건 우리 남궁세가도 마찬가지요.”
탁지연이 생긋 웃은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남궁세가와 굳이 원수지간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남궁인은 그 말에도 동의했다.
“우리도 혈매궁과의 충돌은 바라지 않소.”
“하지만 이 장원을 양보해주지는 않을 거죠?”
“물론이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제가 제안을 한 가지 하죠.”
“그게 뭐요?”
“남궁공자와 제가 일 대 일로 겨루는 거예요.”
남궁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건 무슨 뜻이오?”
“간단해요. 서로 상대를 용납하지 못하겠다면 불가불 적의 면전에서 우리끼리 싸울 수밖에 없는데, 여러 사람 목숨 위태롭게 할 필요 있나요?”
“그럼 내가 당신을 이기면 매화궁은 여길 떠나겠다고 약속할 수 있소?”
탁지연은 기수 쪽을 봤다.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소. 당신도 약속하시오.”
“좋소! 내가 진다면 우리는 이곳을 떠나겠소!”
기수는 씩 웃었다.
탁지연이 아주 적절하게 나섰다고 할 수 있었다.
남궁인이 혈매궁 사람과 일 대 일로 겨루어서 이기지 못한다면 어차피 누가 장원을 공격하느냐의 분쟁은 의미 없었다. 물러서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궁주에게 지는 것과 여인에게 지는 것은 달랐다.
지고 나서도 떠들어대기 창피한 일이 될 테니 나중에 문제가 될 소지도 훨씬 적다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탁지연이 남궁인을 이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모두 물러서라.”
남궁인이 손짓하자 무사들은 뒤로 간격을 벌려 둥그런 공간을 만들었다.
기수와 사매들도 탁지연만 남겨 놓고 뒤로 물러섰다.
춘매가 마지막까지 남아 탁지연에게 물었다.
“잘 할 수 있지?”
“물론이예요. 사저. 걱정하지 마세요.”
탁지연은 자신 있었다.
소항산에서 음양대법과 자체 대련으로 계속 무공을 연마했지만 그동안은 구마왕 중 대도왕 이외에 제대로 된 적과 싸워본 적이 없었다.
서로 기문진법을 펼쳐 대치했을 뿐이고, 강시도 기수가 다 처치했다.
이제 남궁세가의 세 째 아들이라는 어쩌면 만만한, 그리고 어쩌면 부담될 수도 있는 적과 맞서게 되니까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면서 꼭 이기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기수는 남궁인의 마음을 살짝 읽어보았다.
혹시라도 탁지연을 다치게 할 비책이라도 숨기고 있나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약간은 반칙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녀가 위험에 처하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의외로 남궁인은 겁을 잔뜩 먹고 있었다.
이미 탁지연이 만만치 않은 강자라는 사실을 감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대결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이른바 명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물러서서 굴욕을 당하느니 명예롭게 죽겠다는 뜻인가?’
사실, 기수는 현대에 살 때도 부모 잘 만난 덕에 아쉬운 줄 모르고 돈 펑펑 써대던 축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그 반대쪽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무림에 온 이후에도 이른바 명문세가의 자제들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반감 같은 것을 가진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수가 되어서인지는 몰라도, 그들이 잘난 척 해도 그저 같잖게 여겨질 뿐 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남궁인에 대해서도 건방지다는 생각보다는 약간의 동정심이 생겼다.
이길 자신이 없으면서도 명예를 위해 나선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기수는 탁지연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떨 것 같아?”
“자신 있어요.”
“여유가 있으면 굳이 죽이지는 마.”
탁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른 이유에서 살초를 자제할 생각이었다. 무림맹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애쓰지는 않더라도 일부러 적으로 만들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대결이지만 이기는 것과 죽이는 것은 차이가 컸다.
그녀가 검을 뽑아 들고 가볍게 포권을 하자 남궁인 역시 정중한 자세로 검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제왕검법과 창궁무애검법 중 남궁인이 익힌 것은 창궁무애검이었다. 그리고 검을 눈높이로 들어 올리는 기수식은 고수를 상대로 하는 일종의 존중 표시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양측 사람들 모두 대결 당사자보다 긴장하여 그들을 지켜봤다.
탁지연은 차분한 호흡으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상대를 노려보다가 먼저 선제공격을 시작했다. 남궁인도 즉시 거기에 맞섰다.
쨍! 쨍! 거리는 타격음과 함께 순식간에 20여초가 교환되었다.
기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탁지연이 위험할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백문조가 창안한 혈매궁 검술이 아닌 오래전부터 익혀 온 월영검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검의 명가로 손꼽히는 남궁세가이다 보니 아무래도 나중에 배운 것보다는 오랜 시간 몸에 익은 안정성을 택한 것이다.
월영검법과 창궁무애검은 각기 추구하는 바가 달랐다.
변(變)과 쾌(快).
그것은 딱히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요인이지만 탁지연의 검초가 보다 여유로웠고, 점점 더 정묘함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그녀의 내공이 더 심후하기 때문이었다.
한번 우위를 점한 탁지연은 안정적으로 우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다시 50여 초를 겨룬 끝에 마침내 남궁인의 검을 허공으로 날려버리는 데 성공했다.
사매들이 환호성으로 그녀의 승리를 축하해주었다.
기수도 박수를 쳤다.
탁지연의 성장이 정말 대견하게 느껴졌다.
그녀에게 월영검법을 가르쳐준 것도 자기고, 그녀의 내공을 키워준 것도 자신이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다섯 사매들보다 조금은 더 자부심이 강하게 느껴졌다.
남궁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탁지연과 기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역시 검의 고수이기 때문에 탁지연이 자기를 죽이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훨씬 더 일찍 끝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완벽한 패배였다.
“졌습니다.”
기죽은 목소리. 그러나 비굴한 모습은 없었다.
남궁인은 고개를 당당히 들고 말했다.
“이겼으니 매화궁 마음대로 하십시오. 원한다면 내 목을 내놓겠습니다.”
탁지연이 포권을 한 후 말했다.
“처음에 한 약속을 지켜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남궁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기수와 사매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탁지연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한 후 부하들을 인솔하여 즉시 숲을 빠져 나갔다.
기수는 남궁인의 매너가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것은 탁지연의 성장을 함께 기뻐해주는 것이었다.
“대단하던데? 많이 늘었어.”
그러면서 그녀 허리를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춰주자 옆에서 설매가 말했다.
“탁매는 너무 물러. 나같으면 죽여 버렸을 텐데.”
기수는 설매의 이마를 검지로 톡 친 후 말했다.
“그래서 네가 나서면 안 되는 거야.”
“하지만 앞으로 뭔가 죽여야 할 때는 날 앞장세워줄 거지?”
설매는 그동안 부상으로 인해 6명 중 자신의 무공이 가장 처진다는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열심히 연공했고, 이번 강호행에 자신의 능력을 검증 받고 싶어 했다.
“좋아. 약속하지.”
“고마워. 궁주.”
기수는 턱짓으로 장원을 가리켰다.
“자! 뭐가 있나 들어가 볼까?”
일곱 사람은 가벼운 경공으로 먼저 담 위에 올라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고함이 들리며 암기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날은 어두워지는데, 암기는 몹시 가늘고 작은, 거의 바늘 사이즈라 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독이라도 묻힌 것처럼 검붉은 빛이라 꽤 위협적이었다.
기수는 장검을 휘둘러 그것들을 쳐내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사매들을 둘러보았다.
걱정은 불필요했다. 다들 여유 있게 암기를 쳐내는 모습이었다.
5분 정도 집중 공격을 버텨내자 장원 안에 있던 자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들이 준비한 최선의 공격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막혔기 때문이다.
기수가 그들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혈매궁 사람들이다! 일월신교의 마왕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호중만도 우리 손에 죽었다! 목숨이 아깝다면 모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호중만이 죽었다는 말에 모두들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무기를 버리지는 않았다.
사매들은 일제히 그들을 향해 달려 들어가며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실전을 그리워했던 것은 설매만이 아니었다.
사매들 모두 연습 대련이 아닌 실전의 피 냄새를 만끽했다.
기수는 경공으로 그녀들을 앞서 가며 연속으로 잔백지를 날려 장원 식구들을 점혈해 쓰러트리며 외쳤다.
“다 죽이면 안 돼! 취조할 놈들도 남겨둬야 한다고!”
사매들은 더 죽이고 싶어도 기수가 먼저 치고 나가면서 전부 쓰러트리는 바람에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제대로 상대가 되는 고수가 없으니까 흥이 식기도 했다.
장원을 수비하는 자들은 저마다 복장도 다르고 쓰는 무공도 다른 것으로 보아 일월신교 내의 여러 방파에서 차출된 병력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 중 사매들을 긴장시킬 만한 고수는 없었다.
기수와 사매들이 장원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는 1시간 정도가 걸렸다.
적이 애를 먹여서라기보다는 장원이 넓어서 숨바꼭질 하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연무장에 모아놓고 보니 사망자 빼고 생포한 자만 30여명 정도 되었다.
“이 정도면 대장군부에서 취조하기엔 충분하겠군.”
기수는 건물마다 돌아다니며 강시 제조시설을 둘러보았다.
사람 한 명을 전부 넣을 수 있는 커다란 단지가 건물마다 수십 개씩 놓여 있고 모든 단지마다 시체와 약물이 들어 있었다.
뚜껑을 열 때마다 끔찍한 악취가 났지만 기수와 사매들은 저마다 구역을 나누어 강시의 수를 확인해 보았다. 빈 단지 없이 모두 꽉 차서 240구.
상태는 예전에 산에서 보았던 것들에 비해 뭔가 색이 옅고 피부도 단단해 보이지 않았다. 마치 계란 조림 할 때 삶은 계란을 막 넣어서 아직 간이 스며들기 직전인 것과 비슷했다.
춘매가 말했다.
“다행이네 이것들은 아직 미완성이라서…”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끔찍한 일을 막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기수는 호중만이 쓰던 방을 찾아 구석구석 뒤져보았다. 다른 건 없고 직접 그린 듯 한 대형 인체해부도 한 장과 약재 이름을 쓴 20여장의 종이들이 전부였다.
탁지연이 종이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혹시 여기 강시 제조법이 적힌 건 아닐까요?”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걸 남이 볼 수 있는데 적어놨을 리가 없어.”
기수는 호중만이 죽기 전까지 자기만 비밀로 간직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탁지연이 종이들을 자세히 살펴본 후 말했다.
“역시 그러네요. 중요한 자리마다 점이나 기호가 찍혀 있어요.”
탁지연은 붓을 들어 그 위에 다른 점과 기호들을 가필하기 시작했다.
기수는 깜짝 놀랐다.
“왜 그래?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누군가 머리 좋은 사람이 이 암호들의 의미를 찾아내면 강시 제조술을 복원해낼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혼란을 좀 주려고…”
그러자 춘매가 펄쩍 뛰었다.
“대장군부를 혼란에 빠트려서 어쩌려고? 잊었어? 우린 그들을 위해 일한다고!”
다른 사매들도 다들 한 마디씩 했다.
탁지연은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난 그저 이 마물들이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미 만들어진 500마리를 제거하려면 연구가 필요하다잖아. 그런데 그걸 이렇게 망쳐버리면 어떻게 해?”
“미, 미안해요. 사저.”
기수가 끼어들어서 말했다.
“싸울 필요 없어. 어차피 저 종이만 보고는 약물 조합을 유추해낼 수 없어. 암호가 한두 개 늘어났다고 해서 달라질 상황이 아냐.”
춘매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지만 탁지연이 들고 있던 종이들을 모두 빼앗아 잘 챙겨두었다.
기수는 풀죽은 탁지연을 보며 생각했다.
‘대장군부에 모든 자료를 넘기는 게 위험할 수도 있겠군.’
그는 백무영을 믿었다.
하지만 그가 대장군부의 수장은 아니었다. 대장군의 아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개인은 정의로울 수 있지만, 조직이 커지면 대개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대장군부는 군문 아닌가.
군대 입장에서 죽지 않는 병사에 대해 알게 되면 가만 놔둘 것 같지 않았다.
비어 있는 퍼즐 조각을 어떻게든 찾아내려 할 것이고, 뛰어난 인재들을 총동원할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해서 호중만의 방법을 찾아내는데 성공한다면 백무영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이 진행될 수도 있었다.
기수는 종이들을 달래서 모두 태워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다섯 사매들 입장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들은 동창의 표적이 되어 평생 쫓기는 삶 대신 대장군부를 택했다.
이제까지 굳이 행적을 숨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창의 압박이 없었던 것을 온전히 혈매궁 구성원의 무공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대장군부의 그늘에 들어간 것이 올바른 판단이었던 것이다.
다섯 사매는 조직에 속하는데 익숙하고, 충성심도 확고한, 말하자면 프로페셔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탁지연과는 출신성분부터 사고방식까지 약간 다른 것이다.
그런 그녀들 손에 들어간 종이를 빼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설매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궁주. 아까 보니까 저 쪽에 목욕통이 있던데…”
“그, 그래? 하핫… 혹시 시체 씻던 통이 아닐까?”
“아냐. 깨끗하던걸? 궁주 상처… 이젠 다 낫지 않았어?”
여섯 명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때는 탁지연도 다섯 명과 다르지 않았다.
기수는 침을 꿀꺽 삼킨 후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글쎄…. 하지만….”
“왜 그래? 궁주. 지금 이 장원엔 우리밖에 없어. 포로들은 모두 점혈하여 연무장에 몰아놓았고, 석통판은 아무리 빨라도 내일 저녁이나 되어야 올 거야.”
사매들이 한 걸음씩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