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54
기수와 사매들은 일부러 눈에 잘 띄는 흰 옷을 입은 상태였다.
소매엔 매화 문양이 화려하게 수놓여 있기까지 했다.
일곱 명은 그다지 빠르지 않은 경공으로 장원을 벗어나 30분 정도 달렸고 호수를 빙 돌아 장원 반대편 물가에 도착했다.
한밤중이지만 달빛 덕분에 시야는 어둡지 않았다.
넓은 갈대밭 한가운데 멈춰 선 기수와 사매들은 돌아섰다.
맞은편엔 100개는 넘음직한 시커먼 그림자들이 모여 있었다.
현상금을 탐내어 몰려든 자들이었다.
기수가 유성추를 꺼내어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너희들. 소문을 들었을지 모르겠다만, 일월신교도 감히 우리 혈매궁을 어쩌지 못했다. 지금부터 열을 셀 동안 너희들 목숨 구할 기회를 주겠다. 돈이 아무리 좋아도 목숨보다 귀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나!….둘!….”
검은 그림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움찔거렸다.
소항산에서 일월신교가 낭패를 보고 퇴각한 얘기는 이미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위치를 알려주기만 해도 돈을 벌 수 있는데 굳이 목숨을 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물러서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쪽의 숫자가 많기 때문에 누군가 죽는다 하더라도 혈매궁 사람들의 힘을 빼놓거나 부상을 입힌다면 자기가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기수는 잠시 카운트를 멈추고 다시 말했다.
“너희들 심각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일단 열까지 센 다음엔 단 한 명도 여길 빠져나갈 수 없을 거니까. 여섯!…. 일곱!…”
그러나 적은 계속 자리를 지켰다.
다들 자기에겐 죽음이 아닌 행운이 따를 거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무기를 뽑고 슬금슬금 뒤쪽으로 이동하는 자는 있어도 달아나는 자는 없었다.
“열!”
기수의 타운트가 끝난 것과 동시에 검을 뽑은 여섯 사매들이 좌측으로 3명, 우측으로 3명 동시에 부챗살처럼 산개하며 돌격했다.
기수도 정중앙으로 돌진했다.
“으아악!….”
“크윽!….”
좌우에서 온통 비명이 난무했다.
그리고 잘린 팔다리와 피가 우승팀 헹가레 치듯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결과는 너무나도 허망하고 참혹했다.
혈매궁 여인들의 무공에 놀라 뒤늦게 도주를 택한 자들도 있었지만 사매들은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았다.
걸린 시간은 고작 10여분.
갈대밭을 통틀어 두 발로 서있는 사람은 혈매궁의 7인밖에 없었다.
기수는 사매들에게 물었다.
“다들 괜찮아?”
어두운데서 암기라도 맞았을까봐 걱정이 된 것이다.
“우린 괜찮아요.”
달빛 아래 모여서 보니 일곱 명의 옷 색깔이 제각각이었다.
암기엔 맞지 않았지만 피가 튀는 것을 모두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흰 옷이라 그 흔적이 뚜렷이 남았는데, 기수는 그걸 보고 각자의 무공 성취를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가장 많이 묻은 사람은 설매였고, 가장 옷이 깨끗한 사람은 탁지연이었다.
‘벌써 무공으로도 수위에 오른 건가?’
사실, 그런 낌새는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사매들과 그동안 보름 넘게 지내면서 단체전으로는 파티, 개인전으로는 음양대법을 실시했는데, 교류되는 진기의 양과 질 양면에서 탁지연의 순도가 가장 높았다.
단순히 몸과 마음의 친밀도가 가장 높아서뿐만이 아니라 실제 내공도 가장 깊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수의 옷엔 피가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 하수는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따른 것이다.
그래도 쉬운 싸움은 아니었다.
기수가 이번에 연습한 것은 힘 조절이었다.
유성추를 던져 상대의 혈도를 찍되, 죽거나 뼈가 부러지지 않고 딱 점혈만 되도록 간격과 힘을 조절했다.
잔백지보다 훨씬 까다로운 방법이지만 나름 재미도 있었다.
춘매가 물었다.
“궁주는 왜 저놈들을 살려뒀어?”
“우리가 장원을 떠났다는 얘기를 강호에 퍼뜨릴 사람도 있어야지.”
“그건 그러네.”
일곱 명은 밤새 경공을 펼쳐 남동쪽으로 가다가 해가 뜰 무렵엔 객잔을 잡아 옷을 갈아입었다. 매화문양이 없는 평범한 무복이었고 사매들은 남장을 하기로 했다.
되도록 모기떼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낮엔 객잔에서 편안히 휴식을 취하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경공을 펼치는 식으로 이동한 일행은 닷새만에 양주에 도착했다.
기수는 석초가 적어준 객잔을 찾아갔다.
“어서 오십시오!”
점소이가 자리 안내를 하고 수건으로 탁자를 닦은 후 물었다.
“뭘 드시겠습니까?”
“노반을 좀 오라고 하지.”
“주인님은 무슨 일로 찾으십니까?”
“태산에 구름이 몰려와 폭우가 내리는 꿈을 꿨는데 해몽이 필요해서.”
그러자 점소이의 눈빛이 변했다. 그가 좌우를 둘러본 후 말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그는 2층의 한 방으로 일행을 안내하고 차를 따른 후 나갔다.
잠시 후 40대 후반의 뚱뚱한 남자가 나와서 인사를 한 후 기수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기수는 대답 대신 석초가 적고 도장 찍은 공문서를 보여주었다.
주인 남자는 얼굴빛이 변하더니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시랑님을 찾아오셨습니까?”
“그렇소.”
“저희가 가마로 안내하겠습니다. 해질 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는 시키지도 않은 고급 요리를 연달아 내왔다.
그것을 먹으며 춘매가 말했다.
“이전에 왔을 때와 달리 보안에 꽤 신경 쓰는 것을 보니까 일월신교 찾아내기가 만만치 않은 모양이네.”
그러자 동매가 말을 받았다.
“소항산과는 반대잖아. 강남은 그들이 오랜 세월 터를 닦은 곳이니까 숨을 곳도 많겠지. 휘하의 방파들을 하나씩 자르면서 조여 들어갈 수밖에 없을 거야.”
기수는 혈매궁이 이곳에서 할 일이 많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남은 강시 500마리를 찾아 없애는 게 최우선 목표였다.
‘그놈들을 어떻게 찾지?’
그러다가 기수는 갑자기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개다!”
“깜짝이야! 갑자기 그게 무슨 얘기야? 궁주.”
“개를 쓰면 돼. 그 강시 제조 약물 냄새는 사람 코에도 강한 자극을 남기는데 개라면 오죽하겠어? 놈들이 아무리 깊이 숨어도 강시 냄새는 숨기지 못할 거야.”
사매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시 숨겨 놓은 곳을 찾아내면 일월신교 토벌에도 한 걸음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궁주. 머리 좋은데?”
“하핫! 내가 원래 좀 그렇잖아. 알면서…”
해가 떨어지자 객잔 주인은 가마 일곱 채를 준비하여 일행을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어느 장원으로 데려다 주었다.
기수는 그곳에서 백무영을 만날 수 있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형님.”
“하하! 홍택호에서의 얘기는 들었네. 수고가 많았네.”
“수고는요….”
그런데 백무영의 표정이 상당히 어두워 보였다.
‘일월신교가 그 정도로 속을 썩이나?’
기수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백무영이 말했다.
“자네. 나와 단둘이 얘기 좀 할 수 있겠나?”
“물론이죠.”
두 사람은 장원의 안쪽 호위병들이 지키는 건물로 들어갔다.
벽마다 지도가 걸려 있고 탁자 위엔 첩지들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이번 작전을 총괄 지휘하는 백무영의 집무실인 듯 했다.
두 사람만 있게 되자 백무영이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네. 솔직히 대답해주게.”
기수는 그가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차도 권하지 않고 잔뜩 긴장한 것으로 보아 뭔가 심각한 문제인 게 분명했다.
“물어보십시오.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백무영이 기수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대파산 상춘관 출신의 양기수. 혹은 기수, 양구라고도 하는 사람을 아나?”
기수는 깜짝 놀랐다.
백무영이 자신의 출신 문파와 본명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양구라고? 설마…..’
그 가명을 쓴 곳은 딱 한 군데밖에 없었다.
백무영이 다시 물었다.
“자네. 황궁비고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기수는 가슴이 철렁했다. 주예림 공주와의 일이 발각된 것이다.
‘큰일이다! 도대체 어떻게 백무영이 그 일을 알게 된 거지?’
기수는 잠시 심호흡으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돼. 공주가 그 일에 대해 얘기했을 리가 없어.’
기수는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지 말입니다.”
“정말인가?”
기수는 자기의 말투가 갑자기 달라진 걸 깨닫고 즉시 고쳤다.
“형님의 호의 덕분에 원하는 책들을 마음껏 읽었습니다. 그뿐입니다.”
백무영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기수를 봤다.
기수는 표정 변화 없이 그 시선을 고스란히 받았다.
백무영이 다시 물었다.
“자네. 공주마마와 무슨 관계인가?”
직격탄이었다. 그러나 기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저 같은 평민이 지고하신 황족을 만나볼 기회가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공주마마라니요.”
“하긴, 그렇긴 하네만…”
이번엔 기수가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형님. 혼자만 고민하지 말고 제게도 말씀해주십시오.”
“사실은…. 공주마마께서 아까 말한 상춘관 출신 기수란 자에게 추살령을 내리셨네.”
기수는 깜짝 놀랐다.
“추살령이라고요? 잡아 죽이라고 했단 말입니까?”
“그렇다네.”
기수는 어이가 없었다.
사실, 이별과정이 매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죽이라고 했다니…
백무영이 말했다.
“알아보니 기수란 자는 무림맹의 무림대회 때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고, 한동안 모습을 감추었다가 홍안산에서는 제갈세가와 삼황맹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무림맹과 마교도를 동시에 구해준 적도 있더군. 그 후엔 수로맹과 싸우는 백리세가를 도와주기도 했고…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정의로운 인물로 여겨지는데 도대체 공주마마께 무슨 죄를 지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단 말야.”
기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주마마가 황족이라고 해도 여인에 불과한데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겁니까?”
백무영은 한숨을 내쉰 후 대답했다.
“사실, 공식적으로는 명령권이 없지. 하지만 황족은 한 분 한 분이 다 존귀하기 때문에 우리 대장군부 입장에선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네.”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밖에 못하는 대통령 재임기간에도 그 아래 권력기관들이 온갖 불법을 자행하는 판인데, 평생토록 해먹는 황제와 황족들 비위를 맞춰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형님. 고민이 많으시겠습니다. 일월신교를 상대하는 것만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러게나 말일세.”
백무영은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수는 더 갑갑했다. 이미 자신의 행적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진심으로 잡으려 하는 게 분명했다.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DNA나 지문 검색, 사진 대조 같은 방식이 없는 시대라 기수와 양칠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도 아직까지는 별 문제가 없지만, 무림맹이나 홍안산에서 자기를 본 적 있는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탄로 날 수도 있었다.
그러면 대장군부와의 협력은 끝이라고 봐야 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사실 자기는 별 상관이 없었다.
백무영에게 호감을 가지고 친분을 유지하긴 했지만 그는 황족, 어쩌면 황제보다 더 무서울 수도 있는 자기 마누라와 처제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입장이니까 그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사매들은 달랐다.
동창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던 든든한 보호막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녀들은 어려서부터 교육을 그렇게 받아 왔기 때문에 국가 조직에 속해서 움직이는 걸 좋아했다. 오랜 노력(?)으로 내공을 끌어 올려 줘서 이젠 자신들만의 문파를 만들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성향은 여전했다.
‘나 때문에 사매들까지 피해를 봐선 안 된다. 공주가 추살령을 내린 건 나지, 혈매궁이 아니지 않은가.’
자기 한 사람만 떠나면 혈매궁은 계속 대장군부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동창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나 혼자 떠나자!’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다른 선택이 없었다.
계속 대장군부와 가까이 지내다가는 기수가 바로 양칠이란 사실이 언제든 밝혀질 수 있었다. 그러면 자칫 사매들은 동창과 대장군부 양쪽으로부터 쫓길 수도 있는 것이다.
기수가 백무영에게 말했다.
“제가 형님을 대신해서 공주마마의 추살령을 책임지고 맡는 건 어떻겠습니까?”
“자네가 말인가?”
“기수라면 저도 홍안산에서 그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럼 그의 얼굴을 아나?”
“그렇습니다. 똑똑히 기억합니다. 헌앙한 기상과 의기를 지닌 영웅 대장부의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그를 잡아올 테니 형님은 일월신교에 집중해주십시오. 사매들도 이곳에 남아 돕도록 하겠습니다.”
“혼자 가겠단 말인가?”
“예. 사매들은 따라오고 싶어 하겠지만, 기수란 자는 워낙 무공이 절륜하고 행동이 신출귀몰하니까 저 혼자 행동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그녀들에겐 말하지 않고 떠날 것이니 형님도 제가 어디로 갔는지 비밀로 해주십시오.”
“자네가 나서준다니 정말 고맙네.”
백무영은 사실 양칠을 의심하고 있었다. 양칠과 양구라는 이름, 황궁비고 출입 등의 요건으로 봤을 때 그가 어떤 경로로든 처제를 만나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만나 얘기를 해보니 황궁비고에 들어갔다고 해서 공주를 만났을 거라는 생각은 좀 억측에 가까웠다. 대장군부에서는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동창 몰래 비밀 통로를 뚫었지만, 처제는 애시당초 그곳에 접근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기수를 잡아오겠다고 하니 불필요하게 인력을 낭비할 필요도 없었다.
양칠 한 사람이면 수하 100명보다 훨씬 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