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55
기수가 백무영에게 물었다.
“이곳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자네가 일월신교의 세력을 거의 삼분지 일 정도로 꺾었다고 볼 수 있지.”
천하의 일월신교가 혈매궁이라는 작은 신흥문파에 그런 수모를 당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구마왕 중 다섯 명이 죽었고, 교주의 세 아들 중 두 명이 죽었다.
게다가 소항산 원정에서 도망치는 바람에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일월신교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것이다.
백무영이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놈들의 본거지라 일이 쉽지 않네. 양주, 남경, 소주, 항주는 엄청나게 넓은 지역이기도 하고 강과 호수가 많아서 숨기도 쉽지. 이번 기회에 놈들을 일망타진하면 강남의 치안을 확립하고 더 나아가 천하의 안정에도 큰 도움이 될 텐데…”
그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마교, 삼황맹, 녹림72채, 수로맹의 연합은 무림의 일로 간단히 생각하고 넘겨버리기엔 규모가 너무 커져 있는 상태였다.
일월신교만 제압해도 그들 연맹에 힘을 크게 덜 것인데, 강시 500마리와 함께 숨어 버렸으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기수가 백무영에게 말했다.
“제 사매들과 의논하면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개를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사매들 입을 통해 얘기하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백무영은 지푸라기라도 짚고 싶은 심정이기에 그리 하겠다고 했다.
기수는 그 자리에서 붓을 들어 사매들에게 편지를 썼다.
백시랑이 특별한 임무를 시켜서 가봐야 하니까 자기가 없는 동안에도 서로 힘을 모아 잘 지내라는 내용이었다.
편지 쓰는 내내 기수는 입맛이 떨떠름했다.
편지 쓰고 헤어지는 바람에 추살령이 내렸는데, 사매들과도 또 편지 이별이라니.
하지만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것은 아무래도 잘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녀들뿐만 아니라 기수 본인도 홍택호 옆 장원에서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낸 사매들과 헤어지기가 싫었다.
‘최대한 빨리 공주의 추살령과 남궁세가의 현성수배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면 용서해줄 거야.’
그렇게 결심을 굳힌 기수는 편지 전달을 백무영에게 부탁하고 일어섰다.
“잠깐만 기다리게.”
백무영은 기수에게 비단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 가지고 가게. 양구를 잡아오면 그 열 배를 주겠네.”
받아든 무게와 쩔렁거리는 소리로 추측하건데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기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기를 돈으로 움직여보려는 백무영의 의도가 읽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얼마나 절박하면 이렇게까지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걱정 마십시오! 형님. 제가 양구 문제를 최대한 빨리, 깔끔하게 해결하겠습니다.”
“자네만 믿겠네! 부탁하네!”
기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포권을 한 후 장원 담을 넘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사매들이 머물고 있는 건물 쪽을 돌아봤다.
‘다들 오늘밤을 기대하고 있을 텐데….’
하루만 있다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면 이별이 더 어려울 것 같았다.
‘지연만 불러내서 함께 갈까?’
그러나 기수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탁지연은 철산문의 멸문 이후 고아 신세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혈매궁의 일원이 되려고 노력한 것은 단지 자기를 따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처음엔 땍땍거렸지만 지금은 다섯 사매들과 친자매처럼 친해져 있었다.
침상에서뿐만이 아니었다. 머리가 좋고 내공도 심원하기 때문에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실질적으로 리더 역할까지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만 빼낸다면 나머지 다섯 사매들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고 다시는 탁지연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결국 기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장원을 벗어났다.
그리고 성 밖으로 나가자마자 인적 드문 곳을 찾아 경공을 시전했다.
목적지는 북경의 자금성.
기수가 백무영에게 양구 문제의 깔끔한 해결을 자신 있게 말했던 것은 주예림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추살령까지 내린 원인은 외로움 때문일 것이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갑갑한 궁중생활을 견디다가 자신을 만났는데 달랑 쪽지 한 장 남기고 사라졌으니 증오가 생기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찾아가서 만나면, 대화를 좀 나누다 보면 해결이 가능할 것 같았다.
떠날 당시엔 진짜 혈매궁이 위험에 처한 상태였으니까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대화로 안 된다면 꾸욱~ 눌러주는 옵션도 선택 가능했다.
동이 틀 무렵까지 신나게 달리던 기수는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런데 황궁비고엔 어떻게 들어가지?’
지난번엔 백무영이 위장가옥 지키는 부부에게 지시를 했으니까 가능했지만 자기 혼자 가도 문을 열어줄지는 의문이었다.
기수는 걸음을 멈추었다.
‘지난번에 못 읽은 게 있다고 졸라볼까?’
그러나 그렇게 하면 백무영에게 당연히 보고가 올라갈 것이고, 백무영은 자신에 대해 진짜 의심을 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비고에 들어가서 기다린다고 해도 주예림이 거기로 온다는 보장 역시 없었다.
‘아! 이거 골치 아프네…’
만나기만 하면 해결할 수 있는데 만날 방법이 없으니 답답했다.
한참을 궁리해도 좋은 생각이 나지 않자 기수는 황궁보다 자유롭게 접근이 가능한 남궁세가 문제부터 풀기로 마음먹고 서쪽으로 진로를 돌렸다.
‘모기떼만 없애도 일단 일 하나는 더는 거니까.’
해가 뜨자 기수는 객잔에 들어가 밥도 먹고 쉬면서 구체적인 계획을 생각해보았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남궁세가 담을 넘어 전부 다 죽여 버리는 것이었다.
뒤끝 없이 만사해결!
그러나 좀 잔인하다는 생각과 함께 춘매가 반대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내가 한 짓이란 걸 금방 알아차릴 거야.’
이쪽 역시 골치 아프기는 마찬가지라 기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죽이는 건 좀 심하니까 남궁세가의 창고에 불을 지르고 금은을 전부 털어버릴까? 그들이 망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우리 혈매궁이 풀려날 수 있잖아?’
그것도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일단 가서 상황을 보고 임기응변하자.’
요는 자기가 한 일인 줄 모르게 처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대장군부와 명문정파들과의 관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사매들도 불만이 없을 것이었다.
기수는 하남으로 달린 지 하루 만에 남궁세가의 근거지인 정주에 도착했다.
정주는 큰 도읍이라 상당히 번화했다.
기수는 사람들에게 물어 남궁세가의 장원을 찾았다.
성 밖 거대한 농지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역시 직접 와서 보고 결정을 내리는 게 맞았다.
홍택호에서 남궁인과 남궁현을 봤을 때는 만만했지만 이렇게 거대한 장원과 우글거리는 무사들을 보니까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인 줄 모르게…. 그러면서도 완전히 부숴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역시 그들 내부로 잠입하는 게 최선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 무사로 고용되어 약선문을 무너뜨린 것과 똑같다고 할 수 있었다.
기수는 성으로 가서 남궁세가와 관련된 정보들을 수집했다.
무림맹의 일원으로 마교과 싸우고, 동시에 혈매궁과도 알력이 생겼으니 당연히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할 것으로 보았다.
예상대로 남궁세가에선 사람을 고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사가 아닌 허드렛일꾼이었다.
그들은 검술에 유난히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 검법을 사용하지 않는 외부 무사는 고용하지 않았다.
어릴 때 자질 있는 지원자를 문도로 받아들여 오랜 세월에 걸쳐 수련시킨 뒤 무사로 충당하는 것이었다.
기수는 망설였다. 하인이 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선택은 없었다.
결국 그는 정주 성 밖의 산에 올라가 검과 유성추, 돈을 비 맞지 않을 만한 곳에 잘 숨기고 바위로 눌러두었다.
그리고 은전 하나만 달랑 들고 얼굴을 하인에 맞게 역용했다.
약간은 어수룩하고 좀 모자라는 듯한, 전형적인 마당쇠 내지는 돌쇠 얼굴이었다.
워낙 잘 단련된 체형이라서 얼굴이 보통만 되어도 상대가 위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하찮아 보이는 얼굴이 꼭 필요했다.
가지고 간 은전으로 헐렁하고 낡은 옷을 산 뒤 허름한 객잔에 투숙한 그는 다음날 아침부터 곧장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시급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하인에 지원하는 사람은 남궁세가를 찾아가도 정문이 아닌 서쪽의 작은 문을 두드려야 했다.
“무슨 일로 왔나?”
인상 더러운 30대 남자가 깔보는 눈빛으로 훑어본 후 툭 던져 물었다.
기수는 일부러 어눌하게 대답했다.
“하, 하인 일을 하고 싶습니다.”
“빈자리가 없어.”
“예? 하지만… 저자에서 듣기에는….”
“어제까지는 있었는데, 지금은 다 찼어.”
매몰찬 대답이었다.
기수는 주먹이 근질거리는 걸 억지로 참고 다시 어눌한 어조로 말했다.
“나리. 제 사정 좀 봐주십시오. 노자가 다 떨어져서 지금 당장 쫄쫄 굶으면서 한뎃잠을 자야하게 생겼습니다. 이슬을 피할 잠자리와 하루 세끼 밥만 먹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건 다 하겠습니다. 시켜 주십시오.”
30대 사내는 기수의 키와 체격을 대충 훑어본 후 물었다.
“1년 동안 하는 거 보고, 품삯은 3년째부터 받아도 좋은가?”
“물론입니다!”
“이름이 뭐고, 고향은 어딘가?”
“예. 저는 양십일이라고 합니다. 고향은 대파산 아래 산동네입니다.”
“깡촌 출신이군. 글은 깨쳤나?”
“제 이름은 쓸 줄 압니다.”
“젠장! 양(楊)자만 안다는 거잖아? 십일(十一)은 뭐 글자도 아니지.”
“헤헤헤….”
“셈은 할 줄 아나?”
“그, 글쎄요…. 조금은….”
“손가락, 발가락 숫자 벗어난 숫자를 셀 수는 있나?”
인수분해도 할 줄 안다. 씨발! 소리가 턱밑까지 올라왔지만 양십일 캐릭터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헤헤거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열두 달과 삼십 일은 셀 수 있습니다.”
“좋아. 앞으론 나를 강집사님이라고 불러. 알았지?”
기수는 자기가 캐릭터를 너무 바보 같이 잡은 건 아닌가 하고 후회했다.
‘아무리 얼굴이 다르다고 해도 기본 체면이 있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좀 모자라는 사람 역할도 한 번쯤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인 위장취업 아니면 언제 그럴 기회가 있겠는가.
그래서 사내에게 헤픈 웃음을 지어보였다.
“예. 강집사님.”
“흐흐… 그래. 자, 나를 따라와.”
기수는 그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면서 장원의 규모에 놀랐다.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넓었고 그 안에 건물도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곳곳에 기문진의 기운이 느껴졌다.
‘역시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게 정답이었어.’
낯선 사람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주치는 사람들 중 누구도 자신을 주의해서 보는 사람은 없었다. 어리숙해 보이는 캐릭터가 바른 선택이었던 것이다.
‘내가 나를 신고해도 은 500냥 주려나?’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커다란 식당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네놈 일할 곳이다.”
“저, 저는…. 요리 솜씨가 별로라서….”
“하하! 이놈 웃기네. 너처럼 근본도 모르는 놈한테 우리 소중한 문도들 먹을 음식에 손을 대게 할 줄 알았느냐? 네가 할 일은 저거다.”
강집사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장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저것들을 아궁이에 넣기 좋을 크기로 잘라라. 자! 당장 시작해.”
사는 사람이 많으니 하루 장작 소비량도 엄청날 것이었다.
그런데 도끼와 일거리가 팽개쳐져 있는 걸 보면 일손이 부족한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자리가 없다고 했지? 혹시 내 급여를 후려치려고?’
안 그래도 남궁세가가 주는 것 없이 미운데, 이 강집사란 놈은 타는 불에다 기름을 붓는 것 같았다.
기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일하고 정당한 대가 못 받는 건 기분 나쁘지만 조금만 참자. 나중에 박살낸 뒤 금고에서 원하는 만큼 집어가면 되잖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무보수도 상관없었다.
장작패기는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제법 일을 잘 한다는 평가는 받되, 너무 쉽게 도끼를 다루면 안 되는 것이다.
내공의 극히 일부만 써도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을 땀 흘리며 하려니까 고역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식당이 텅 비자 한 청년이 기수를 손짓으로 불렀다.
“어이! 와서 점심 먹어!”
기수는 도끼를 놓고 달려갔다.
식당 한쪽 구석에 밥상이 차려졌는데 의외로 반찬이 괜찮았다.
무사들에게 배식하고 남을 거라서 그들과 같은 레벨로 먹게 되는 것이었다.
밥그릇이 넘치도록 가득 푼 밥의 양도 인상적이었다.
10여명이 둘러앉자 그들 중 나이 지긋해 보이는 50대 사내가 물었다.
“오늘 처음 왔나?”
“예. 그렇습니다.”
“하하! 긴장 풀어. 어차피 우린 다 같은 처진데….. 자네 이름이 뭔가?”
“양십일이라고 합니다.”
“난 진송이라고 하네.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사람이 아주 성실하더군. 일 하는 양도 상당히 많고 말야. 앞으로 잘 해보세.”
“고맙습니다. 헤헤헤…..”
기수는 페이스를 더 늦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출근 첫날이라고 농땡이 피지 않고 너무 열심히 일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하인 일은 기수의 기대와 다르게 진행되었다.
원래는 내부에 침투해서 상황을 둘러보고 무너뜨릴 허점을 찾아내는 게 목적이었지만 그에게 허용된 곳은 장작 패는 공터와 식당 옆 숙소, 그리고 화장실뿐이었다.
그 외의 장소엔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식사 때와 일과 후에 식당에서 일하는 하인들과 수다라도 떨지 않았다면 아무리 침투 미션이라고 해도 지루해서 못 견뎠을 것이었다.
식당 근무자 사이에도 레벨이 있었다.
주방 안에서 일하는 숙수와 하인들은 남궁세가에서 10년, 20년씩 일한 경력의 보유자들이라 식당에서 식탁 치우고 설거지 하는 하인들과는 말도 잘 섞으려 하지 않았다.
식당 하인들은 처지가 비슷해서 그런지 다들 기수에게 잘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