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6
자신의 거처를 가지게 된 기수는 방음상태부터 확인해보았다.
무림맹에서 여인을 품을 일은 없겠지만 습관상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됐다.
기수는 그날 밤 진짜로 운기조식을 했다.
강호의 고수들을 만나고 돌아오니까 갑자기 의욕이 살아난 것이다.
음양대법만큼 내공이 쑥쑥 증진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운기조식도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조식을 마친 후엔 분광권, 잔백지, 월영검법, 선풍비를 전부 다 한 차례씩 연공했다.
모든 초식이 처음 배울 때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펼쳐졌고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하나 남은 것은 염정구심술인데, 그건 상대가 없어서 연습이 불가능했다.
분명 거기에도 진전이 있을 거라 기대 되었다.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한 기수의 방으로 공손형제가 다시 찾아왔다.
“기소협. 우리와 함께 갑시다.”
“소개시켜 줄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수는 궁금했다.
“그게 누굽니까?”
“가보시면 압니다.”
두 사람을 따라간 곳은 커다란 팔각정이었다.
그곳에 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있다가 세 사람을 반겼다.
기수는 그들이 이른바 말하는 정도 무림의 후기지수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림의 현범, 무당의 진운도장, 아미파의 능소화, 화산파의 나도성, 곤륜파의 방옥 등은 이른바 신주오룡(新走五龍)이라 불리는 구파일방의 자랑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사천당문의 당운영이었다.
기수는 강호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젊은 고수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속한 문파의 이름만 들어도 무게감이 느껴졌다.
소림의 현범은 외공으로 단련된 당당한 체격과는 달리 표정과 말투가 모두 차분해서 20세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무당의 진운도장 역시 진중하고 무게 있는 성격이었다.
아미파의 능소화는 눈이 번쩍 뜨이는 미녀였다.
턱선이 V-라인을 그리고 눈이 커서 텔레비전 CF에서 본 여배우가 생각났는데,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났다. 능소화는 키도 컸다. 그래서 긴 치마에 감춰진 다리도 참 늘씬하고 예쁠 것 같았다.
화산파의 나도성은 눈썹이 몹시 짙고 사람을 노려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곤륜파의 방옥은 검정색 승복을 입고 있었는데 소림의 현범과는 달리 수다스러웠다.
마지막으로 당문의 당운영.
사천당가는 독과 암기의 문파로 알려져 있는데 정도무림 편에 섰다는 게 살짝 이해가 안 되긴 했지만 같은 물을 마셔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암기와 독이라도 좋은 쪽에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운영은 키도 제일 작고 나이도 제일 어렸다.
그러나 깜찍한 마스크가 아주 예뻤고 곤륜의 방옥과 함께 대화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기수는 그들 여섯 명과 비록 합석은 했지만 대화에 끼기는 어려웠다.
약초 자르는 일에 대해서라면 할 얘기가 많지만 강호무림의 일에 대해선 공손 형제에게 들은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그들의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특히 미녀가 둘이나 끼어 있다 보니 자리는 화기애애했다.
공손탁과 공손추는 제갈세가 얘기를 하면서 기수의 활약에 대해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러자 기수를 보는 신주오룡의 시선도 바뀌었다.
특히 능소화와 당운영의 표정에 호감이 드러났다.
그러나 기수가 기대하는 만큼의 반응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들이 신주오룡에 꼽히는 고수들이다 보니 저마다 자랑할 만한 무용담 한두 가지씩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인 듯 했다.
기수가 이 자리에 낄 자격은 있지만 감탄할 정도는 아니라는 정도의 반응이었다.
기수는 약간 섭섭했다.
제갈세가를 상대로 한 활약이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그들이 자기네 가문에 수치스러운 일이라 쉬쉬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너무 주목 받으면 그것도 귀찮을 것 같았다.
튀지는 않고, 신주오룡과 합석해도 크게 거부감이 없는 지금 상태가 딱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기수는 남자들의 무용담에 귀를 열어놓고, 눈으로는 능소화와 당운영을 감상했다.
여인에 대한 기준을 바꾸기로 했는데, 그 기준으로 보자면 능소화와 당운영은 상위 5% 안쪽의 절세미녀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옥수나찰, 공손설, 능소화, 당운영, 4명을 놓고 얼굴만 보고 고르라고 하면 누구를 선택하는 게 좋을까?’
혼자 그런 상상을 하는 게 재미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두 미녀에 대한 기수의 관심은 실망감으로 변했다.
그렇게 된 원인은 그녀들에게 있었다.
능소화와 당운영은 자기들이 예쁘다는 걸 잘 알았다.
신주오룡에 꼽힐 정도의 무공을 지닌 것만 해도 대단한데, 거기다가 절세 미모까지 겸비하고 보니 콧대가 높아지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당운영은 신주오룡에 속하지는 못하지만 사천당가라는 무서운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도 그녀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았다.
게다가 나이까지 어려서 버르장머리 없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자가 예쁜 건 좋지만 자기가 예쁜 걸 아는 것만큼 피곤한 것도 없었다.
다른 사내들은 그녀들의 환심을 사려고 다들 애를 썼지만 기수는 거기에 함께 휩쓸리지 않았다.
‘얼굴만 예쁘면 뭐하냐. 개념이 탑재되어야지. 여신처럼 떠받들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잘들 해봐라. 난 너희들이 줘도 안 먹을 거니까.’
기수는 그녀들보다 더 예쁘면서도 상냥하고 겸손한 미녀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주면 일단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세상의 미녀들을 널리 사랑해주려면 성격이 좀 나쁘다고 해서 거부하면 안 되는 것이다.
‘편식은 나쁜 거야. 암… 그렇고말고…’
혼자 별 생각을 다 하면서 첫 날을 탐색전으로 보낸 기수는 모임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어제 무림명숙들을 봤을 때도 자극을 받았지만 낮에 만난 젊은 고수들도 그 기도가 만만치 않아서 또 다시 의욕을 불태우게 된 것이다.
무림맹 회의 소집까지는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이 남아 있었다.
전화로 통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통보를 받은 후에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올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한 달이면 상당히 서둘러 잡은 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삼황맹과 제갈세가의 연합이 그만큼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기수는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추어 운기조식을 마쳤다.
다시 곤손 형제가 찾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예상대로 공손탁과 공손추가 함께 저녁을 먹자며 왔다.
기수 입장에선 공손세가가 고마웠다.
딸을 구해줬다고 꽤 거액의 사례금을 주었는데, 기수는 그 돈을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의 여정 동안은 물론 무림맹에 온 이후에도 거처와 음식 모두 공손세가에서 부담했기 때문에 돈 쓸 일이 없었다.
게다가 공손탁, 공손추 형제와는 성격도 잘 맞는 것 같았다.
“기소협. 이번엔 좀 더 재미있는 곳으로 갑시다.”
그들이 기수를 데려간 곳은 팔각정이 아닌 전각이었다.
건물의 현판에 적힌 글자는 기린각.
그곳 역시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저마다 한 가닥 하게 생긴 20대, 30대 정파 무림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는 모습이 보였고 여자 무림인도 많이 있었다.
기수는 그곳에서도 공손형제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안면을 텄다.
기수는 기린각이야말로 자기에게 맞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팔각정과는 달리 잘난 척 하는 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기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시장조사를 마쳤다.
결과는 대만족. 수질이 상당히 좋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공을 익힐수록 미녀가 되는 게 분명했다.
무공연마를 하면 팔다리가 길게 자라고 몸에 탄력과 유연함이 붙고, 혈행이 좋아져서 피부가 고와지니까 타고난 바탕 안에서 최고 상태로 튜닝 된다고 할 수 있었다.
여인들 중에는 기수에게 관심을 가지고 호감을 드러내는 이도 많이 있었다.
제갈세가가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에 기수에겐 아직 명성이랄 게 없었다.
그녀들은 단순히 기수의 외모가 마음에 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기수도 그들 중 마음에 드는 미녀를 발견했다.
항주 유가장의 유향경.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일단 그녀는 키가 컸다.
그리고 몹시 마른데다가 눈과 입도 커서 옛날의 기준으로 보면 미녀라고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기수가 보는 관점에선 분명히 미녀였다. 모델 몸매에 서구적인 마스크. 함박웃음을 지을 때면 역삼각형으로 벌어지는 입이 귀여웠다.
“항주에서 오셨다고요?”
기수가 먼저 접근하여 말을 걸자 유향경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무림맹에 와서 지낸지 오래 되었지만 남자가 먼저 와서 말을 거는 것은 기수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예…기공자님.”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유소저.”
유향경은 생긋 웃었는데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게 마음에 들었다.
“항주 얘기 좀 해주십시오. 그곳은 어떤 곳입니까?”
“항주에 안 가보셨나요?”
“전 태어나서 지금까지 대파산에서만 지냈습니다.”
“그러시군요. 항주하면 유명한 게 우선 서호예요.”
“서호라… 한 번 가보고 싶군요.”
그렇게 일단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자 유향경과 기수의 대화는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다음날은 기수가 그녀의 숙소로 찾아가 그녀의 오빠를 만나 담소도 나누었고, 그 다음날은 그들 남매를 자신의 거처로 초대하여 식사도 대접했다.
그리고 오빠는 빼고 단둘이 만나는 시간도 늘어났다.
기수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이제까지 만났던 여인들은 사실 뭔가 좀 바뀐 기분이었다.
데이트랄 것도 없이 일단 몸부터 섞고 봤던 것이다.
그들과 달리 유향경과는 기초부터 하나씩 쌓아나갔다.
그게 재미있고 좋아서 기수는 웬만하면 그녀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남녀간의 감정변화는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만난지 닷새 만에 기수는 유향경을 품에 안았다.
“아이… 공자님…”
유향경은 몸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바짝 밀착해 왔다.
기수는 단지 포옹만으로도 그렇게 기분 좋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유향경이 물었다.
“공자님은 내 키가 너무 커서 싫지 않으세요?”
“아니. 나보다 작으면서 뭘.”
“그래도요…”
그것이 그녀의 컴플렉스인 듯 했다.
기수가 괜찮다고 하니까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기수는 좋은 향기가 나는 그녀를 좀 더 꼭 끌어안으며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으음…”
유향경은 흠칫 놀라서 피했다가 조금씩 입술을 받아들여 주었다.
기수는 그녀가 당황하지 않도록 혀를 천천히 사용했다.
유향경은 조금씩 적응했고, 한참만에야 혀를 내밀어 기수와 타액을 교환했다.
그것은 튕겼다기 보다는 키스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기수는 사랑스런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유향경이 정색을 하며 그를 밀어냈다.
“이, 이러시면 안 돼요.”
입맞춤까지는 허락한다 해도 그 이상은 결혼하기 전엔 절대로 안 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기수는 서두르지 않았다.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만.”
“아뇨. 제가 너무 과민반응 한 것 같아요. 죄송해요.”
기수는 열기를 식히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산책이나 하는 게 어때?”
“좋아요.”
두 사람은 거처를 나와 무림맹 곳곳에 만들어진 정원 중 하나로 갔다.
함께 꽃구경을 하는 사이에 방금 전의 어색함은 사라지고 예전 상태가 되었다.
기수는 그녀를 숙소까지 바래다주고 자기 거처로 갔다.
유향경이 객사로 들어가려고 할 때 한 사람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너 이름이 뭐야?”
유향경이 돌아보니 그녀는 사천당문의 당운영이었다.
“나, 난 유향경이라고 하는데.”
“유향경? 항주 유가장인가?”
“그, 그래.”
유향경은 당운영이 왜 자기를 찾아와서 말을 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유가장은 사천당가와 아무런 관련도 없기 때문이다.
당운영이 유향경을 위아래로 훑어본 후 물었다.
“무슨 수법으로 기소협의 환심을 산 거지?”
“그게 무슨…”
당운영은 첫 만남 이후 몇 차례 더 공손가 형제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그때마다 기수도 동석했는데,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기수가 자신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이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래서 기수의 뒤를 밟다가 그의 연인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당운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유향경은 미모와 가문 모두에서 자신에 한참 못 미쳤기 때문이다.
도대체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또한 동시에 유향경의 존재에 대해 화가 났다.
어려서부터 오냐오냐 해주는 환경에서 자란 당운영은 무엇이건 자기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앞뒤 가릴 것 없이 그녀는 손부터 썼다.
찰싹! 소리와 함께 뺨을 얻어맞은 유향경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어멋!….”
유향경은 자기가 맞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때리는 거야?”
당운영은 대답 대신 또 손을 뻗었다.
왜 때리는지 이유는 자기도 몰랐다. 그냥 화가 났다.
그녀의 두 번째 손찌검은 유향경이 막아냈다.
그녀도 4살 때부터 무공을 연마한 몸이었다.
명가의 자제들만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맹탕도 아니었다.
두 여인은 순식간에 10여 초를 겨루었다.
그리고 무공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당운영이 더 고수였던 것이다.
“감히 내게 대들어? 오늘 죽어봐라!”
당운영의 일 장이 유향경의 얼굴로 향했다.
맞았다가는 코뼈가 부러질 위급한 순간.
한 남자의 손이 날아와 그 장을 막아냈다.
바로 기수였다. 자기 숙소로 가던 중 언뜻 유향경의 비명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돌아왔다가 그 상황을 보게 된 것이다.
기수는 호통을 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당운영은 유향경으로 향하던 분노를 기수에게 돌렸다.
“너희 두 년놈을 오늘 내 손으로 죽이고야 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