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64
한동안 주저앉아 망연자실 하던 백서옥은 벌떡 일어나 이향에게 말했다.
“당장 길 떠날 준비를 해라!”
“예? 지금요?”
“그래. 지금 당장!”
“어디로 가시게요?”
“친정으로 갈 것이다. 가서 아버님께 부탁하여 비룡검문을 찾아내고 양십일을 잡아 죽일 추격대를 편성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남궁세가 봉문의 원인 제공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자기 개인적으로는 남편에게 맞아 죽을 일인 동시에 가문의 수치이기도 했다.
한 때 욕정을 참지 못한 자기로 인해 가문이 수치를 당하고 십절금왕문과 남궁세가 사이의 연합이 깨진다면 그건 정말 못 견딜 일이었다.
‘그 놈을 죽여서 입을 봉해야 해!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백서옥은 즉시 시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을 지키고 있는 남궁현이 그녀에게 말했다.
“아버님은 지금 운기조식 중이십니다.”
백서옥은 방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서 남궁현에게 물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면목 없습니다. 형수님.”
남궁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비룡검문 호법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검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호의로 겨우 목숨을 구한 처지라 부하 무사들 앞에서조차 떳떳하지 못했다.
“비룡검문이 어떤 자들입니까?”
남궁현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얘기해주었다.
백서옥이 다시 물었다.
“그들의 근거지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부끄럽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습니다.”
백서옥은 실망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저는 잠시 친정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니 아버님이나 나중에 돌아오시는 형님께 말씀 좀 대신 전해주십시오.”
“예? 거기엔 왜….”
백서옥이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시집 온 순간부터 남궁가의 사람입니다. 집안이 위기에 처했는데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습니까? 당장 친정에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아아!….감사합니다. 형수님…”
남궁현은 거듭 고개 숙였다.
형의 처가에 도움을 청하는 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봉문을 결정한 이상 남궁세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십절금왕문이 나서준다면 복수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남궁현은 형수가 이 정도로 의기 있고 배려 깊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처음 알았기에 감동을 금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지워버려야 할 비밀이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기수는 진백을 따라 비룡검문의 거점 중 한 곳에 당도했다.
겉보기엔 창고를 여러 개 가진 표국 정도로 보였고, 내부도 각종 화물들이 쌓여 있어서 상당히 협소한 편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서 대대적인 축하연을 열었다.
진백은 기수를 가까이 불러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 식구들을 제대로 소개해주겠네.”
기수는 그에게 부탁했다.
“문주님. 제 이름은 양십일로 해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진백은 기수가 혈매궁과 깊은 관계임을 알기에 쉽게 응해주었다.
기수는 비룡검문의 중간급 이상 간부들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건배를 했다.
그렇게 수십 잔을 마시다 보니 몹시 취하게 되었다.
땀구멍으로 주독을 배출할 정도의 내공이 되긴 하지만 밤늦게까지 기분 좋게 마시다 보니 취기가 잘 가시지 않았다.
중간 간부들에 이어 일반 제자들과도 잔을 기울이다 보니 다음 날 어느 침상 이불 속에서 깨어나게 되었는데, 어떻게 해서 거기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무림에 온 이후 그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셔본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정신줄을 놓은 것이니, 고수로선 금기사항.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죽일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기수는 비룡검문과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다음날 멀쩡하게 깨어난 것이다.
“아!….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지.”
숙취 때문에 머리가 빠개지는 것처럼 아프고 목은 탔다.
물 한 대접 마시고 운기조식부터 제대로 하고 싶었다.
“일었났나? 하하하!…”
진백이 웃으며 다가왔다.
좌우를 둘러보니 그의 침실인 듯 했다.
기수는 급히 일어나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문주님!”
“하하!… 괜찮네. 자네 집처럼 편히 여기는 건 좋은 일이지. 저 쪽으로 가세.”
그가 안내하는 곳으로 가니 상 위에 매화탕을 비롯한 국물 음식들이 몇 가지 차려져 있었다. 해장국 계열 요리들이었다.
진백과 마주앉아 그것들을 먹다가 기수가 물었다.
“문주님. 제가 가명을 쓰는 게 마음에 안 드시죠?”
“괜찮네. 강호행을 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 사정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자네는 우리 문파에 입문한 사람도 아니니 다 이해하네.”
“감사합니다. 사실, 이름뿐만 아니라 얼굴도 제 본래의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문주님께는 보여드리는 게 도리일 것 같군요.”
“본래 얼굴이 아니라니? 인피면구를 썼단 말인가? 대단히 정교하군….”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바꾸는 겁니다.”
기수는 본래 얼굴을 보여주었다.
“하하! 그것 참 신묘한 재주로군. 대단하네…”
진백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기수는 내친 김에 정체도 말해버렸다.
“그리고 사실은… 제가 혈매궁의 궁주입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진백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미 무공수준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백이 슬쩍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이제 혈매궁으로 돌아갈 생각인가?”
“아닙니다. 동굴로 가서 석벽에 새겨진 말씀과 구결을 보여드려야죠.”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하하!…”
진백은 유쾌하게 웃었다. 기수가 떠날 마음이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진백은 3일 연속으로 축하연을 하도록 한 뒤 나흘째 되는 날 제자들을 모두 본래의 자리로 복귀시키고 닷새째 되는 날 기수, 그리고 10명의 제자들과 함께 사조의 유물을 찾으러 떠났다.
네비게이션 없이 길을 찾느라 약간 헤맸지만 기수는 나흘 만에 일행을 동굴까지 안내하는데 성공했다.
“여깁니다.”
“아!….. 사조님.”
진백은 일단 옷부터 갈아입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가서 상황을 확인한 후 제단을 만들어 의식을 행하고 가까운 마을로 가서 관을 하나 짜가지고 오도록 했다.
격식에 맞춰 사조의 시신을 모신 진백은 석벽에 새겨진 글자들을 정성껏 탁본하고 글자를 하나하나 대조했다.
모두 제대로 찍힌 것을 확인한 뒤에는 원본 위에 수 천 개의 깊은 검흔을 만들어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무공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막은 것이다.
그렇게 꼬박 이틀을 보낸 뒤 일행은 관을 들고 귀환길에 올랐다.
사조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를 계획이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은 오늘 길과 달랐다.
불청객의 기척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기수가 진백에게 말했다.
“문주님. 모두 다섯 무리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흐음… 역시 그렇군.”
“남궁세가 놈들. 신의가 없군요.”
“남궁천 그 사람. 이런 정도로는 보지 않았는데…”
실망하는 눈치였다.
“날이 어두워지면 우리 쪽이 더 불리해질 것입니다. 제가 가서 일부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그리 하도록 하게.”
“다녀오겠습니다.”
기수는 남궁현의 장검을 뽑아 들고 사람 수가 가장 많은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진백과 제자들은 탄성을 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수의 경공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기 때문이다.
기수는 자랑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적이 사방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한 놈이라도 더 잡으려면 최고 속도를 낼 필요가 있었다.
그가 숲으로 뛰어들자 숨어 있던 자들은 깜짝 놀라 무기를 뽑아들었다.
“막아라!”
“놈을 잡아라!”
그러나 그들의 대응은 그렇게 소리를 지른 게 전부였다.
기수는 검을 쓸 시간도 아까워 잔백지로 놈들을 모두 제압해버렸다.
막상 놈들이 모두 쓰러지자 기수는 뭔가 생각과 다름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무공수준도 떨어졌고 옷도 남궁세가의 무복과 달랐다.
기수는 멈추지 않고 숲으로 이동하여 다른 곳의 적들도 모두 잔백지로 제압했다.
그리고 그들 중 제일 지위가 높은 것으로 보이는 놈을 진백 앞으로 끌고 갔다.
“모두 제압했습니다. 문주님.”
진백은 기수가 놀라운 경공으로 사라진 후 그의 기도를 따라가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일행 반경 30장 이내의 이곳저곳에서 신음과 파공음이 들렸는데 고개 돌려 따라가기 바쁠 정도였으니 도대체 무공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이런 사람과 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기뻤다.
기수가 마혈을 풀자 사내가 겁먹은 어조로 말했다.
“저, 저희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진백이 그에게 물었다.
“누가 시켰는지 말하면 풀어주마.”
“저, 정말이십니까?”
뒤에서 기수가 말했다.
“셋 셀 동안 전부 얘기하면 살려주겠지만. 망설이거나 숨기는 게 있으면 곧바로 죽이고 다른 놈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하나!”
그러자 사내가 잽싸게 입을 놀렸다.
“저, 저희는 철랑대 소속입니다. 문주님의 명에 따라 비룡검문의 소재를 파악하려고 수색 중이었습니다.”
진백이 놀란 어조로 물었다.
“철랑대라면… 십절금왕문의 하부조직 아니냐?”
“맞습니다.”
“너희 문주가 왜 우리를 찾는단 말이냐?”
“그, 그건 저희들도 모릅니다.”
진백은 미간을 찌푸렸다.
철랑대는 십절금왕문 소속이긴 하지만 금랑대, 은랑대에 비하면 숫자만 많을 뿐 수준은 좀 떨어지는 조직이었다.
그들에게 묻는다고 해서 원하는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남궁세가를 봉문시켜 버렸으니 비룡검문의 이름이 온 천하에 알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십절금왕문이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지 모를 일이었다.
“혹시….”
진백과 기수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다.
십절금왕문과 남궁세가는 서로 사돈지간이라는 것 외에는 연결고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연결 고리의 구멍에 기수가 간여한 것이다.
기수는 미안해서 몸둘 바를 몰랐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자기 때문에 비룡검문이 십절금왕문과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이다.
“문주님. 아무래도 이 문제는 제가 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풀다니? 어떻게 말인가?”
기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십절금왕문에 찾아가서 해명하려고 해도 백서옥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양십일이 비룡검문과 관계없는 사이라고 잡아뗄 수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십절금왕문을 박살내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건 명분이 없었다.
진백이 기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우리 함께 방법을 찾아보세.”
비록 기수가 골칫거리라고 해도 끝까지 함께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기수는 고맙고 또 미안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문주님. 우리 비룡검문이 무림맹에 가입하는 건 어떨까요?”
“무림맹에?”
“예. 그동안은 남궁세가 때문에 정체를 드러낼 수 없었지만, 이젠 천하에 우리 문파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왕 세상에 드러났으니 명문정파로서 당당히 대로로 행보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흐음… 대로행이라…”
진백은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남궁세가를 이긴다는 목표가 워낙 쉽지 않은 일이다 보니 막상 그 목표를 이룬 이후의 계획은 공백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무림맹 입맹이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구성원인 남궁세가를 공격하여 봉문시켰는데 받아줄까?”
기수는 자신 있게 말했다.
“무림맹은 지금 마교, 삼황맹, 녹림72채, 수로맹의 연합세력과 싸우는 중입니다. 그러니 힘만 있다면 누구라도 받아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궁세가가 봉문으로 인해 병력을 철수하면 당장 그 공백을 무엇으로 메꾸겠습니까?”
“흐음…. 하긴, 전시엔 손 하나가 아쉬운 법이지.”
“맞습니다. 그리고 무림맹이라고 해서 모두가 서로를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십절금왕문이야 사돈지간이니 남궁세가의 체면을 봐주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들을 봉문시킨 우리 비룡검문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진백은 결정을 내렸다.
“좋아! 자네 말대로 하지.”
공연히 십절금왕문과 충돌을 계속하다 보면 최악의 경우 무림공적으로 몰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무림맹에 입맹하는 게 나을 것이었다.
문제는 과연 그들이 받아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