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68
황신은 마당까지 나와 있었다.
“무슨 일로 나를 보자는 거요?”
경계심 가득한 눈빛이었다.
“술 한 잔 마시고 싶을 뿐, 다른 뜻은 없소.”
기수의 대답에 함께 있는 금랑대와 은랑대 무사들 표정이 변했다. 사전에 언질도 없이 불쑥 찾아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모욕적이라고 느낀 것이다.
당사자인 황신은 기수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한 잔 합시다.”
그리고는 기수를 자기 방으로 안내하여 자리를 권했다.
간단한 안주와 젓가락, 술 한 병과 잔 두개가 놓이자 황신은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단둘만 남도록 했다.
기수는 죽립을 벗고 얼굴 절반을 가리던 붕대도 풀었다.
황신이 흠칫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기수는 순간적으로 염정구심술을 시전하여 상대의 속마음을 슬쩍 엿보았다.
황신은 채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백서옥이 자기 나름대로 살수를 추가 고용한 게 분명했다.
“업보를 받았을 뿐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황신은 신경이 쓰였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술을 따랐다.
“한 잔 합시다.”
“건배!”
단숨에 잔을 비우는 기수를 보며, 황신은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진 한 가운데 들어왔으니 독주를 권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믿어준다는 사실에 호감이 가기도 했다.
연거푸 석 잔을 나누어 마신 후 기수가 말했다.
“십절금왕문 문주님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소.”
“그게 무엇이오?”
“난 입이 무거운 사람이니 어떠한 비밀도 무덤까지 가져갈 것이오. 하지만 자꾸 건드리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소.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이오.”
황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는 비룡검문 양호법을 죽여 입을 막으라는 명령만 받았을 뿐,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아무리 금랑대 대장이라고 해도 해줄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만 전하면 될 것이오. 당신도 채정도 다 실패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굳게 다물기로 결심했으니까 건드리면 아주 안 좋은 꼴을 보게 될 거라고.”
여자의 비밀을 지켜주는 게 사나이의 기본 매너 아니겠는가.
사실, 마음 같아서는 백서옥과 채정 모두 가만 놔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행실에 문제가 있어서 초래된 일이라는 반성도 했고, 또 현재의 몸 상태로는 휴식과 정양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른바 작전상 후퇴가 아닌 작전상 용서를 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황신은 채정이 누구인지 묻고 싶었지만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았다.
“좋소. 그렇게 전하겠소.”
자신의 능력으로 양호법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문제는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뜻을 전하고 숙소로 돌아온 기수는 한 번 더 목욕을 한 후 밤새도록 운기조식으로 내상을 다스렸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제자들을 집합시켰다.
“모두 모였나?”
“예. 그렇습니다!”
“오늘부터 좀 더 집중적으로 검술 연마를 시작하겠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100명의 제자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짬밥수로 보면 기수는 이들 중 누구보다도 문도가 된 기간이 짧았다.
하지만 워낙 지대한 공헌을 했고, 또 실력도 엄청나기 때문에 제자들 모두가 기수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을 주었다.
기수가 모두를 둘러본 후 말했다.
“이제부터 무림맹에 속하게 되면 우리는 수많은 적들과 싸워야 한다. 천마교, 삼황맹, 녹림72채, 수로맹, 제갈세가, 일월신교까지. 그들과 싸울 자신이 있는가?”
“예! 있습니다.”
“목숨 바쳐 싸울 자신이 있는가?”
“예! 있습니다.”
기수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좋다! 너희들의 호법으로서 명령을 한 가지 내리겠다. 내 명에 따르겠는가?”
“따르겠습니다!”
“죽지 마라!”
“?……”
“명령이다. 너희들 100명 중 단 한 명도 죽지 마라.”
그동안 정사를 불문하고 인연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감정을 가졌었지만, 오랜 세월 음지에서 고생하다가 비로소 빛을 보게 된 이들 만큼은 특별히 더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제자들은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기수가 씩 웃은 후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연공을 시작하겠다. 힘들더라도 참아야 한다. 그래야 내 명령에 따를 수 있을 테니까. 견딜 수 있겠지?”
“예! 견딜 수 있습니다!”
우렁찬 대답에 기수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기초부터 하나하나 짚어가며 연공을 시작했다.
기수는 여러 사람에게 무공을 전수해준 바 있었다.
수로맹의 육대기나 소항산의 산적들은 기본이 너무 부실해서 탈백도 이상의 수준 높은 무공은 가르칠 수 없었다.
탁지연과 사매들은 훨씬 고난이도 무공을 가르칠 수 있었지만 사실, 무공초식보다는 내공 증진에 더 집중한 게 사실이었다.
비룡검문의 제자들의 경우엔 내공을 강화시켜줄 수 없었다.
그래서 초식 연마에 집중했다.
다행히 기본이 충실한 데다 자질까지 뛰어난 편이라 가르치는 맛이 났다.
문주 진백은 기수의 그런 노력이 고마웠다.
심각한 피부병 발생 이후, 두 사람은 대외적인 일과 대내적인 일을 완전히 구분해서 전담하게 되었는데, 구결이 아닌 살아 있는 초식으로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아무래도 자신보다 기수가 더 낫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기수는 정말 열심히 제자들을 가르쳤고, 그러면서 자신의 무학 공부에도 정진했다.
피부 때문이기도 하고, 여자를 선별해서 만나겠다는 결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일체 외출을 삼가하고 도 닦는 기분으로 틀어박혀 한 가지에만 몰두하는 것도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제자들 중엔 순우광과 조치성이 가장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두 사람 다 진백의 직전제자로, 순우광이 사형이었다.
기수 입장에선 두 사람 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일단 유격훈련장에 들어오면 계급이 아무리 높아도 조교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으로 막 굴렸다.
실력은 둘이 거의 비슷했다.
순우광은 큰 체격에 집중력이 좋았고, 조치성은 팔다리가 긴 체형에 이해력과 응용력이 뛰어나서 목검 대련을 하면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기수는 나중에 자기가 떠날 때를 대비하여 둘에게 최고의 경지를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계속 그들을 독려하고 이끌어주었다.
밤새 운공요상 하고 일어나 검술 연마와 식사를 반복하다보면 하루해가 금방 떨어졌다. 그러면 목욕을 하고 다시 밤새도록 운공요상을 하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망가졌던 내장의 상태도 조금씩 회복되고, 피부의 반점과 부스럼도 그럭저럭 차도를 보이던 어느 날.
철랑대 무사 한 명이 비룡검문 숙소로 찾아왔다.
“저희 대장님이 양호법을 찾으십니다.”
기수는 따라오겠다는 제자들을 남겨두고 혼자 십절금왕문의 거처로 갔다. 황신의 입가에 슬쩍 걸린 미소를 보는 순간 일이 잘 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동안 말이 없다가, 황신은 비단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뭡니까?”
“문주님이 보내신 성의입니다.”
기수는 그 자리에서 비단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안에 금원보가 가득했다. 크기와 갯수로 보아 어마어마한 거액이었다.
은원보라고 해도 그 정도 양이면 엄청난 액수일 텐데 전부 금으로 채웠으니 과연 강호 제일 갑부인 십절금왕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수는 가볍게 미소 지은 후 사양하지 않고 그 주머니를 챙겼다.
입막음 돈을 준 것은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그쪽도 약속을 지키라는 일종의 계약서를 쓴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거절하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황신은 주머니의 내용을 확인했었기에 눈썹 하나 깜빡이지 않고 받아 챙기는 기수를 보며 대단한 배포라고 생각했다.
기수는 황신에게 감사를 표했다.
“중간에서 일을 잘 처리해줘서 고맙소.”
“다음에 다시 만나 겨룰 날을 고대하겠소.”
기수는 패배에도 주눅 들지 않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좋소. 나 또한 기대하겠소.”
그렇게 마무리를 하고 밖으로 나온 기수는 십절금왕문 숙소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걸어가서 건물 모퉁이를 돌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며 깡총깡총 뛰었다.
“우와! 씨발… 이게 도대체 얼마야. 무거워서 뛰지도 못 하겠네. 이게 전부 금이란 말이지? 우와….”
역시 여자하고 얽혀도 재벌가 딸쯤 되니까 생기는 것도 엄청났다.
귀찮음에서 해방된 데다 돈까지 생겼으니 기쁨 두 배였다.
강남을 떠날 때 백무영에게 받은 돈만 해도 처치 곤란할 정도로 많은 데, 그것과 비교할 수도 없는 거액이 생기니까 기수는 돈을 좀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먼저 진백에게 상황보고를 하고, 허락까지 받은 후 제자 100명을 전부 다 산 아래 상가의 포목점으로 데리고 가서 무복, 비단 예복, 피풍, 가죽전포를 풀 세트로 각각 두 벌씩 맞춰주었다. 그리고 신발가게에서 가죽신도 2켤레씩 주문제작 했다.
문주를 위해서는 특별히 용을 수놓은 비단 장포를 맞췄고, 구름을 뚫고 날아가는 비룡의 깃발까지 오행의 색깔 별로 구비했다.
또한 무기가 시원치 않은 제자들은 대장간에 들러 원하는 무기를 얼마든지 사도록 하고 자기도 유성추를 하나 새로 맞췄다.
무림맹 아래 상가엔 무림인에 특화된 장인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소림사와 무림맹이 함께 터를 잡은 지 벌써 수십 년이라 워낙 까탈스런 소비자가 많은 시장이었다.
그래서 단검 한 자루도 예사롭지 않은 완성도를 보이고 있었다.
수만 명이 바글거리던 무림맹이 전쟁 때문에 인원이 많이 빠져나가자 마침 상가는 한산했고, 아낌없이 지출하는 비룡검문은 최고의 큰손 고객이었다.
속속 완성된 입성으로 싹 갈아입은 비룡검문은 일약 무림맹 최고의 패션 리더가 되었다. 포목점들이 수요 감소로 인한 불황 타개를 위해 저마다 최고의 실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진백은 자기의 새 옷보다 제자들의 차림새가 더 마음에 들었다.
“고맙네. 양호법.”
“별말씀을요.”
기수도 자기 제자나 마찬가지인 100명이 멋진 모습으로 변한 게 아주 기분 좋았다. 그러고도 금원보 하나를 채 다 못 썼으니 아깝지도 않았다.
기수는 뭘 또 사줄까 궁리하며 순우광, 조치성등과 함께 매일 산 아래 상가를 돌아다녔는데, 그러는 사이 그토록 기다리던 무림맹주의 서찰이 도착했다.
진백의 부름을 받은 기수는 무림맹 취의청으로 급히 올라갔다.
‘드디어 용이 날아오르게 되었구나!’
그러나 무림맹주의 결정은 기대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비룡검문이 입맹하고 싶으면 능력을 입증하라는 내용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기수는 분노를 터뜨렸다.
“도대체 말이 안 됩니다! 돕겠다고 왔는데 실력을 증명하라니…”
“진정하게 양호법.”
“아닙니다. 문주님. 우리가 이런 대접을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굳이 무림맹에 속하지 않더라도 정의를 위해, 강호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에 말씀드렸듯이 십절금왕문도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진백은 팔짱을 끼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한참 고민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처음엔 십절금왕문과 불필요한 충돌을 막기 위해 온 게 사실이지.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네. 여기서 지내는 동안 우리 문파가 진정으로 가야 할 길을 보게 되었지.”
기수는 그의 그런 심정을 이해했다.
사실, 무림맹이란 장소는 무림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그런 곳이었다.
그냥 걷기만 해도 마주치는 고수들로 인해 등줄기가 짜릿짜릿 해지는 곳.
무공에 일생을 건 친구, 대의를 굳건히 지키는 친구, 의리와 우정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친구. 그런 친구들이 어디에나 있었다.
그동안 상단을 경영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아오던 비룡검문. 특히 그 수장인 진백 입장에선 이곳의 공기와 분위기로 인해 가슴을 설레었을 것이었다.
게다가 소문으로만 듣던 명문정파의 사람들이 앞 다투어 찾아와 친교를 맺자고 하니 이제 와서 물러서고 싶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기수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문주님. 시험을 치르고 받아준다는 것은 우리 비룡검문의 위상에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두 세대 동안 강호에 알려진 바가 전혀 없던 문파이니 그런 정도 요구는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그동안 보여준 게 있는데….”
“그리고 지금 무림맹주님을 비롯한 주력은 대부분 감숙성에 있지 않는가. 그들은 우리의 실력을 볼 기회가 없었지.”
“어쩌면 그들은 남궁세가의 편을 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진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본가는 봉문을 선언했다고 해도 감숙성에 파견된 병력은 아직 철수를 안 했을 수도 있겠지.”
“그동안 함께 싸운 전우니까 남궁세가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 어떤가. 하루 이틀쯤이야 미룰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남궁세가는 모두 철수할 것이네. 가주를 욕되게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럼 우리는 능력을 입증하고 입맹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주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따르겠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그런 걸 다 알고도 입맹을 하겠다면 굳이 자존심을 내세워 일을 그르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백은 제자 순우광을 보내어 수락 의사를 밝혔다.
무림맹 간부들은 그 즉시 출정 준비 명령을 내렸다.
기수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최종 점검을 한 후 다음날 출정에 대비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