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72
조치성의 검로는 금세 안정되었다.
조급함을 버리는 순간 장중한 비룡검의 위력이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반대로 백화방 방주 여철상의 안색은 점점 굳어갔다.
조치성은 양호법의 조언이 시의적절했음을 확인했고, 곧 자신의 문제점도 발견했다.
‘적의 암기가 다 떨어지기를 기다리겠다는 생각 자체가 약한 마음의 소산이다.’
그는 한 걸음씩. 느리지만 멈춤 없이 여철상을 향해 다가갔다.
그럴수록 여철상의 단검 던지는 간격이 빨라졌지만, 더 이상 조치성의 눈을 혼란스럽게 하지는 못했다.
궁지에 몰린 여철상은 식은땀을 흘리며 오로지 조치성의 검을 피하는 데만 온 정신을 집중했다.
바로 그 때!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피가 튀었다.
“커어!…. 커어…..”
목에 암기가 박힌 여철상은 두 눈을 부릅뜨고 허공에 손짓을 하다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의 목에 박힌 암기는 자루에 매화가 새겨진 표창이었다.
조치성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싸움을 방해한 게 누구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화산파의 장개심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뒤통수를 만지며 멋적게 웃었다.
“하하! 이, 이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방해하면 안 되는데, 너무 위험해 보여서 저도 모르게 그만… 죄송하게 됐습니다.”
조치성은 기가 막혔다.
단검이 난무하긴 했지만 위험한 건 자신이 아니라 여철상이었다.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되는데 난데없이 장개심이 끼어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진백과 기수 역시 장개심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감독관이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하는데 뭐라 하기도 어려웠다.
진백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누가 제압하면 어떻습니까? 괘념치 마십시오.”
조재학이 끼어들어서 말했다.
“이제 수괴를 제압했으니 남아서 방해하는 자들을 처단하고, 장원을 불태운 후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관에서 나오기라도 하면 골치 아프니까요.”
“불을 지를 필요까지 있을까요?”
진백의 물음에 조재학이 정색하고 대답했다.
“불을 지르지 않을 거라면 놈들을 전부 다 잡아 죽여야 합니다. 건물과 사람이 남아 있는 한 놈들은 언제라도 적의 전력이 될 테니까요.”
진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는 자들을 쫓아다니는 것보다는 그들의 근거지를 태우는 게 훨씬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 같았다.
적의 편에 힘이 보태질 가능성은 모두 차단하는 게 옳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백화방의 장원은 모든 건물이 불길에 휩싸였다.
비룡검문은 즉시 빠져나와 보타문과 합류하고 수레를 몰아 천수현을 벗어났다.
1시간 정도를 달려 충분히 안전한 거리를 확보한 뒤 돌아보니 연기가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장개심과 조재학이 진백 앞에 나란히 서서 말했다.
“감축드립니다!”
“임무를 완수하셨으니 이젠 입맹 의식만 남았습니다.”
진백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모두 두 분 감독관님 덕분입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저희들이야 구경만 한 걸요. 오늘 비룡검문의 실력이 명분허전임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정말 앞으로 기대가 큽니다.”
그 세 사람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기수는 백화방 쪽을 봤다.
‘방파 하나가 이렇게 사라지는구나.’
예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어찌되었건 무림맹 입맹에 필요한 요건을 충족시켰으니 성취감도 느낄 수 있었다.
가장 고무적인 사항은 인원점검 결과 사망자가 한 명도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부상자는 상당 수 나왔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것은 제자들이 자신의 명령에 잘 따라준 것이기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사마연합 놈들아. 기다려라.’
행렬은 잠시 휴식을 취했고, 기수는 부상 당한 제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사하에게서 산 보타문의 금창약을 발라주었다.
바세린 비슷한 색깔과 감촉에 약간 송진 냄새 같은 것이 났다.
피가 즉시 지혈되는 것으로 보아 효과는 뛰어난 것 같았다.
사하가 다가와서 물었다.
“어때? 약효가 대단하지?”
“그러네.”
“네 얼굴에도 발라보라니까.”
“찰과상과 피부병이 같냐?”
“둘 다 살가죽인데 뭐.”
“말을 말자.”
“호호!….이제 비룡검문는 무림맹의 일원이 되는 건가?”
“난주에 도착하면 바로 될 것 같아.”
“축하해. 미리…”
“고마워.”
무림맹에 합류하면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하남에서 감숙까지 머나먼 길을 지루하지 않게 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사하 덕분이었다.
사실, 그녀의 예쁜 얼굴, 다양한 표정, 스스럼없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 가무잡잡하면서 윤기와 탄력이 넘치는 피부, 늘씬한 몸매 등은 쉽게 만날 수 있는 레벨은 아니었다.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못 느꼈다면 거짓말일 것이었다.
그러나 기수는 끝내 자신을 억제했다.
지금은 자신의 본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양십일은 바보 하인 역할을 위해 만든 얼굴이고, 거기에 독에 의한 붉은 반점까지 잔뜩 생겨 표범이나 재규어처럼 얼룩덜룩했다.
그리고 비룡검문의 호법이란 역할 역시 자신의 본래 모습과는 달랐다.
정이건, 사건 구분 없이 나를 아는 사람하고만 친하게 지낸다는 게 기수의 모토였다. 선택의 기준에 있어서도 자기 마음을 따를 뿐, 그게 이 시대의 정의에 부합되느냐 하는 데엔 관심이 없었다.
양십일은 겉모습과 행동 모두 명문정파의 호법에 맞추고 있으니, 사하가 그런 양십일을 좋아한다면 진짜 자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성이지만 친구이자 동료.
딱 그 정도가 적당한 선이었다.
치료를 마친 일행은 발걸음도 경쾌하게 북서쪽으로 이동했고, 감숙성 경계를 넘어 객잔을 잡았다.
기수는 그날 저녁 장개심과 조재학을 은밀히 불러냈다.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두 사람은 기수가 내민 비단 주머니를 망설임 없이 넙죽 받았다.
그리고 나서야 기수에게 질문을 했다.
“이게 뭡니까?”
“이제 내일이면 무림맹 군웅들을 만나지 않습니까. 그동안 먼 길 동행하시느라 고생 많으셨는데 딱히 해드린 것도 없고 해서 약소합니다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하하!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두 사람 모두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것은 손바닥에 전해지는 감각 때문이었다.
돈이 분명했다.
그들은 기수가 떠난 뒤 곧장 주머니를 열어봤는데, 놀랍게도 은자가 아닌 금자가 들어 있었다.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거액이었다.
기수는 사실 그들에게 돈을 줄 필요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임무를 마치고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기분 좋아서 그냥 주머니를 풀고 말았다. ‘옛다! 먹고 떨어져랴.’ 하는 느낌이었다. 금액이 좀 크긴 하지만 십절금왕문에서 받은 금원보는 아직도 쓰려면 한참 남아 있었다.
무림맹 임시 총단이 자리한 화양문의 장원.
비룡검문 제자들은 객잔에서 갈아입은 화려한 예복을 뽐내며 보무도 당당하게 청석대로를 행진했다. 무림맹 사람들 모두가 나와 그들을 환영해주었다.
기수는 감회에 젖어 좌우를 둘러보았다.
이곳엔 두 번째로 오게 되는 셈이었다.
첫 방문 때는 붉은 머리카락, 붉은 눈썹, 붉은 아래쪽 숲을 지닌 양여옥에게 사과하기 위해 왔었는데,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우선 화양문 무사들의 차림새와 기세부터 심상치 않았다.
오랜 전쟁 때문인지 모두가 전포 차림이었고, 온몸에서 화약 냄새가 났으며, 눈빛은 하나같이 살기등등했다.
거대한 취의청으로 안내되어 들어가자 무림맹 영웅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문주 진백은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얼굴에선 잠시도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정도 무림의 진정한 실세라고 할 수 있는 9파, 1방, 4문, 그리고 제갈세가와 남궁세가를 제외한 3가의 수장 혹은 그에 준하는 간부들이 대부분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할 수 있었다.
소림방장이자 무림맹주인 항마대사는 진백에게 친히 자리를 권했다.
그는 의자에 앉았고 기수와 두 수제자 순우광, 조치성 등은 뒤에 시립했다.
기수는 항마대사와도 구면이었다.
홍안산에서 제갈세가의 함정에서 구해준 게 엊그제 같았다.
물론 항마대사는 기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항마대사뿐만 아니라 아는 얼굴들이 여럿 보였다.
특히 양여옥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예전보다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아름다움이 제대로 활짝 피어났다고나 할까. 난주는 중원의 서쪽으로 치우친 곳. 색목인과의 혼혈로 보이는 그녀의 오똑한 코와 깊은 눈, 풍만하면서도 다리가 유달리 긴 체형은 시선을 떼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눈매는 어딘가 모르게 독해진 느낌이었다.
기수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강호에 출도하고, 무림맹에서 미녀들을 만날 당시엔 사실 지금과 같은 자제력이랄까 정신수양이 부족했다. 그래서 염정구심술을 시험해본다는 핑계로 참 못된 짓을 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물론, 100% 자신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명문가의 여식들이 촌놈을 놓고 누가 먼저 꼬시나 내기를 했으니, 그녀들의 교만함과 남의 감정을 갖고 장난치는 못된 행실이 벌 받아 마땅하기는 했다.
백서린은 관계 이후에 달라붙었고, 호운혜는 관계를 가질 때부터 적극적이다 싶더니 결국 그 이후 수많은 사내들과 난잡하게 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잘못이 합리화될 수는 없었다.
뒤늦게나마 문제를 깨닫고 여기까지 와서 양여옥에게 사과를 하긴 했지만, 그것은 과거를 돌이켜볼 때 늘 남아 있는 오점이었다.
‘이제부터라도 원칙을 지켜야 돼. 염정구심술은 꼭 필요할 때 속마음을 읽는 데만 쓰는 거다. 남을 조종하는 건 안 돼.’
기수는 주먹까지 불끈 쥐고 굳게 결심했다. 사실, 남을 제어하는 수법은 약간의 정신적 부작용도 있기 때문에 안 쓰는 게 맞다고 봐야 했다.
차를 마시며 기나긴 인사 소개가 끝나자 기수는 여자가 아닌 각 문파의 수장들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들이 남궁세가를 끌어내린 비룡검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는지 궁금했다.
숭산에선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십절금왕문 금랑대 대장과 겨뤘기 때문에 능력을 입증할 수 있었지만, 이곳에선 다들 소문으로만 들었기 때문인지 숭산만큼 호의적이지는 않은 느낌이었다.
항마법사가 말했다.
“자! 비룡검문이 천수에서 어떻게 백화방을 혼내주었는지 들어봅시다.”
그러자 감독관으로 동행했던 화산파의 장개심이 앞으로 나섰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장개심은 정파 무림의 명숙들에게 좌우로 정중히 포권을 했다.
그리고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고른 후 얘기를 시작했다.
“저희들은 사흘 전에 천수현에 당도했습니다. 백화방의 방비상태는 대단히 뛰어난 편이었습니다. 특히나 장원 전체에 무시무시한 기문진과 함정이 설치되어 있어서 한 발도 들여놓기 힘들 정도였지요.”
“저런….!”
취의청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렇게 어려운 상대였다는 사실에 다들 놀란 것이다.
진백은 뒤를 돌아봤다.
장개심이 있지도 않은 말을 만들어내서 놀란 표정이었다.
순우광과 조치성도 어리둥절했다.
기수가 진백의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얘기를 과장하는 버릇이 있나봅니다. 그냥 들어주시지요.”
기수는 자기가 준 금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적의 존재감을 극대화시켜야 이쪽의 공적을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
뭐, 해줘도 상관은 없었다.
강호에선 명성이 많은 것을 좌우하니까 다소 과장이 섞여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항마법사가 장개심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기문진은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예. 맹주님. 외람되지만 저희 화산파에서는 검술뿐만 아니라 기문진법에 대해서도 집중적인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사부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얼마간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서서 백화방의 진법을 모두 파해 했습니다.”
“오오! 대단하군.”
기수는 어이가 없었다.
‘저 개새끼!….’
진백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건너편에 앉은 화산파 장문인은 진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뭐가 그리도 좋은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허허 웃었다.
기수가 주먹을 불끈 쥐고 나서려 하자 진백이 손을 저어 진정시켰다.
장개심의 수작이 얄밉긴 하지만 그래도 무림 명숙들 앞에서 비룡검문의 활약을 증언해 줄 감독관이니, 거짓말로 자기 자랑을 한 것쯤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항마법사가 다시 물었다.
“그 다음은 어찌되었는가?”
“예. 맹주님. 파진이 되자 적이 수도 없이 몰려나왔습니다. 그래서 저와 형산파의 조도장은 목숨을 걸고 그들과 싸웠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항마법사가 진백 쪽을 힐끔 본 후 장개심에게 물었다.
“그대 두 사람이 싸웠다면, 비룡문은 무얼 했단 말이오?”
“그들은 허둥지둥, 상하좌우를 모르고 헤매다가 저희 두 사람이 지휘를 하자 그제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싸움에 끼어들었습니다.”
비룡검문의 네 사람은 입을 쩍 벌리고 아무 말도 못했다.
기수는 머리가 멍했다. 너무 기가 차서 욕조차 나오지 않았다.
취의청 안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장개심이 양손을 내저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후 말을 이었다.
“결국 백화방의 방주 여철상은 제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조재학이 잽싸게 끼어들어 그 말을 확인해주었다.
“맞습니다! 제가 분명히 봤습니다. 여철상은 장도장이 죽였습니다!”
장개심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결론적으로 비룡문은 무림맹에 입맹하기엔 자격 미달입니다!”
진백이 벌떡 일어나 장개심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취의청 안은 시장골목처럼 소란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