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75
기수는 일부러 접근 속도를 늦추었다.
적이 동료를 있는 대로 전부 다 부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숨어 있던 자들은 폭죽 2개를 더 하늘로 올린 후 뚜껑을 열고 나와 기수를 향해 활과 석궁을 쏘았다. 차림새로 보아 중원인이 아니었다.
기수는 검을 휘둘러 화살들을 모두 쳐내며 천천히 걸어 그들에게 접근했다.
삼황맹 무사 5명은 화살이 통하지 않자 창과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와아!….”
“죽어라!…..”
기수는 코웃음을 친 후 비룡검법으로 놈들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뒤따라오던 순우광과 조치성,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그 광경을 보고 탄성을 토했다.
기수의 움직임은 화려하지 않았다.
비룡검법의 기초에 해당하는 초식들로 그토록 쉽게, 악귀처럼 달려드는 적 5명을 동시에 제압하는 모습은 실로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었다.
자기들 역시 익힌 초식들이기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타 문파 사람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비룡검법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움직임 자체가 지극히 간결하면서 효율적이라 고수의 풍모가 드러났던 것이다.
기수는 검을 늘어뜨린 채 황량한 산맥을 둘러보며 접근하는 기도를 셌다.
‘좋아. 충분히 몰려드는군.’
그는 자신의 검술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지금 관건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보여주느냐였다.
만약 본래의 모습으로 혼자 싸우는 거였다면 삼황맹 놈들이 수천 명 한꺼번에 덤빈다 해도 겁날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비룡검문의 호법은 문주보다 강하면 안 되었다.
그 선을 지키면서 싸우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흙먼지가 일고 함성이 들려오자 비룡문 제자들은 기수가 지시하지 않았는데도 장소를 이동하여 검진을 펼쳤다.
기수도 그 검진에 자리를 잡았다.
5명씩 좌우로 나뉘어 60도 각도의 V자형 직선 형태를 만든 뒤 뒤쪽 두 개의 끝은 각각 순우광과 조치성이 담당하고, 두 직선이 만나는 앞쪽 끝엔 기수가 섰다.
“당신들은 진 안쪽에서 우리를 도와주시오!”
기수의 말에 타 문파 사람들은 두 직선 안쪽으로 이동했다.
말은 도와달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비룡검문의 검진이 그들을 보호하는 형태였다.
먼저 도착한 삼황맹 무사들은 40여명.
그들은 자기네 숫자가 많다는 점에 자신감을 가지고 곧장 몰아붙였다.
“감히 우리 동료를 해치다니!”
“모조리 죽여라!…..”
기수는 검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제자들에게 말했다.
“정신 집중하고! 간격을 유지해라!”
그리고 앞선 자들과 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삼황맹 무사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러나 검진의 형태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기수는 자신이 맡은 범위뿐만 아니라 수시로 뒤를 확인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굳건하게 버텨주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흐뭇했다.
그동안 자기도 열심히 가르쳤지만, 제자들도 성심껏, 최선을 다해 수련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백중세가 유지되자 V자 안에 있던 타 문파 무사들도 차츰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순우광과 조치성 사이의 빈틈을 채워주었다.
그렇게 하니까 V자는 자연히 정삼각형을 이루게 되었다.
비록 한 면이 오늘 처음 맞춰보는 사람들이지만 나머지 두 면이 워낙 단단하고, 또 세 개의 꼭지점이 막강하니까 형태 유지에 문제가 없었다.
그들도 곧 오프사이드 트랩 연습하는 4백처럼 직선을 만들게 되었다.
삼황맹 무리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고작 20명의 적을 상대하면서 자기네편만 사상자가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문제는, 무림맹 측 인원이 증가한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계획은 사해문의 중군이 전력의 핵심이고, 좌우익이 돕는 것으로 전술을 짰지만 기수가 싸움을 시작하고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음으로 해서 중군과 우익이 경로를 돌려 도와주러 온 것이다.
그들은 10배 가까이 많은 적에게 둘러싸였음에도 끄떡없이 버티는 비룡검문의 삼각형 검진을 고지대에서 훤히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것은 대단히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원래 빙 둘러 포위되어서 협공을 당하면 위험해 보여야 정상인데, 놀랍게도 둘러싼 삼황맹 병력이 더 위태해 보이는 희한한 광경이었다.
그것은 검진의 공격적인 운용 때문이었다.
각각의 변이 쑥 튀어나갔다가 복귀하는가 하면 세 개의 꼭지점이 적진으로 돌진했다가 귀환하는 등, 몹시 공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호문평과 호운혜 남매는 서로를 바라봤다.
“오빠. 비룡문 제자들이 전부 저 정도 수준일까?”
“저들이 비룡문 최고의 실력자들이겠지. 그래도 굉장한데? 저 13명이라면 삼황맹 아니라 천마교와 붙어도 절대 밀리지 않을 것 같아.”
“남궁세가가 빠져나가 병력이 줄어들었지만 전력은 큰 손실이 없을 수도 있겠어.”
그들 남매뿐만 아니라 수색대의 다른 구성원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들의 표정에 기쁨이 드러났다.
같은 편에 고수가 있다는 사실보다 마음 든든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중군과 우군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자 삼황맹 무사들은 결국 퇴각을 시작했다.
기수는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나를 따르라!”
그가 애당초 신호 폭죽을 올리게 한 것은 한 판 제대로 싸워보기 위함이었다.
늘어난 적을 쫓아버리는 것 정도로 만족할 이유가 없었다.
적은 무림맹이 계속 따라오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결국 더 많은 병력이 있는 자기네 거점 쪽으로 도망쳤다.
30분 정도 추격 후 도착한 곳은 협곡에 숨겨진 삼황맹의 근거지 중 한 곳이었다.
군막의 수만 봐도 병력의 규모가 7, 8백 명은 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순우광과 조치성, 그리고 제자들은 자신들의 호법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적이 아무리 많아도 호법과 함께라면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비룡검문 제자들이 모두 적진으로 돌진하자 삼각형 진법 안에서 함께 싸웠던 사람들이 가세했고, 용기를 얻은 사해문과 다른 문파들도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삼황맹 측은 절대적인 수적 우위에 있었지만 겁을 먹었다.
장기간에 걸친 대치상태 중 이번처럼 적극적인 공격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자신 있게 쳐들어오니까 당연히 후속 병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패닉에 빠지면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는 일. 오히려 더 많은 숫자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기수는 적진을 누비면서 적정수준의 비룡검법을 최대한 발휘하여 고수부터 찾아 닥치는 대로 쓰러트렸다.
2시간 정도의 전투 끝에, 마침내 적을 모두 물리친 기수는 삼황맹의 군량과 천막을 모두 태워버리고 군기는 전부 풀어서 전리품으로 챙긴 뒤 보무도 당당히 귀환했다.
고수진 군영에선 대대적인 축하연이 벌어졌다.
종남파 장문인 장해량은 즉시 본진에 보고를 했다.
가능하면 자기네 문파 자랑을 집어넣고 싶었지만, 이번 승전은 비룡검문의 단독작전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기 때문에 사실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소문은 금방 퍼졌다. 3개 주요 문파가 빠져나간 뒤 의기소침해 있던 무림맹 전체에 희소식이었고, 다들 기뻐했다.
고수진 안에서 비룡검문의 위상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동안 수색대를 중심으로 한 적극적 소장파들은 사해문의 호문평, 호운혜 남매가 이끌고 있었는데, 이번 승전을 계기로 비룡검문의 세 사람인 양호법, 순우광, 조치성도 그들 못지않은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호문평은 거기에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마음 맞는 동지가 생겼다는 점에서 더 기뻐했다. 자신의 군막으로 세 사람을 초청하여 술을 대접할 정도였다.
그는 전투 내내 세 사람의 솜씨를 봤기 때문에 설령 자기가 수색대를 주도하지 못한다고 해도 기꺼이 수용할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기수는 호문평을 수색대장으로 대접했다.
그의 능력이 자기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귀찮은 일에 매이기 싫어서였다.
호문평은 노획해 온 삼황맹의 깃발들을 전부 다 장대에 매달아서 강변 모래사장 앞에 일렬로 꽂아두도록 했다.
강 건너의 적을 약 올리는 의미였다.
그리고 두 번째 수색대를 모집했는데, 이번엔 지원자가 훨씬 많았다.
비룡검문의 승전보가 타성에 젖어있던 무림맹 영웅들의 피를 다시 끓어오르게 만든 것이다.
비룡검문 내에서도 수색대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기수는 지난 번 10명을 모두 빼고 다른 10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진백과 함께 검진 훈련에 집중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를 만나고자 한다는 전갈이 왔다.
전령을 따라가 보니 한 군막 안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비룡검문의 양호법을 뵙습니다!”
미소 가득한 얼굴로 인사하는 사람은 십절금왕문의 소문주 백무련이었다.
기수는 속으로 웃었다.
예전에 무림맹에 있던 시절, 자기한테 까불다가 따끔한 맛을 보고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한 일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때에 비해 살이 좀 더 찐 것 같았고, 수염도 길어져서 제법 연륜이 있어 보였다.
기수는 초면인 체 하면서 그와 인사를 나눈 후 물었다.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는지요?”
“하하!…. 지난번 금랑대 대장으로부터 보고는 들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제 누이의 일이다보니 직접 확인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기수는 그의 눈가에 살기가 어린 것을 감지했다.
여차하면 죽여서 입을 막으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거기에 당할 기수는 아니었다.
“남아일언중천금. 한 번 하겠다고 한 일은 반드시 지킵니다.”
당당한 어조로 얘기하자 소문주의 표정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벌써 만만치 않은 기도를 읽은 데다 기수의 태도와 말투가 워낙 굳건해 보여서 믿음이 갔던 것이다.
이제까지 강호에 들려온 소문들을 종합해 봐도 그렇고, 직접 만나 본 결과도 그렇고, 비밀이 새어나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기수는 속으로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네 누나와 여동생이 전부 나하고…. 아! 미안해. 처남.’
둘 다 여자 쪽에서 아주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죄책감은 없었다.
‘그나저나 백서옥도 대단하네. 나하고 있었던 일을 남동생이 알도록 했단 말인가?’
자기 나름의 버전으로 말을 꾸몄을 테니까 자신이 악역, 그것도 아주 치사하고 간악한 역할을 맡았을 것 같긴 했다.
기수는 그냥 씩 웃고 말았다.
그녀가 어떤 소설을 썼건, 어차피 자기완 상관없는 일인 것이다.
“십절금왕문은 지금 어디를 지키고 있습니까?”
“그건 왜 물으십니까?”
“혹시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물론, 그의 여동생을 보고 싶어서였다.
난주 회의장에서 본 양여옥처럼 백서린도 성숙하고 아름다워졌을 것 같았다.
“우리는 이곳 고수진에서 북쪽으로 80리쯤 떨어진 홍성진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위치는 알았지만 그 정도 거리라면 당장 찾아가기는 어려웠다.
구실이 없었다. 또 간다고 해도 백서린이 자기를 만나준다는 보장이 없었다.
‘아! 이놈의 피부 반점!…’
독에 당하지만 않았다면 밤중에 슬쩍 본래 모습으로 바꾼 후 경공으로 달려가서 옛 일을 기억하고 있는지 물어볼 텐데… 지금의 피부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문주 백무련은 기수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그머니 비단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뭡니까?”
척 보는 순간 견적이 나오기는 했다.
만약 전부 금이라면 일전에 금랑대 대장한테서 받은 것과 비슷한 액수일 것 같았다.
소문주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성의를 보이는 겁니다. 부디 사양하지 말고 받아주십시오.”
기수는 그가 살인멸구 대신 입막음 돈 쪽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를 위해서 좋은 일이었다. 만약 전자를 선택했다면 죽는 쪽은 그였을 테니까.
“고맙습니다만, 전 말의 무게를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그건 넣어두십시오.”
소문주는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제가 양호법님과 친해지고 싶어서 드리는 겁니다. 인사치레라 생각하고 받아주십시오.”
“저와 친해지고 싶다고요?”
“그렇습니다. 비룡검문과 양호법님은 누가 뭐래도 지금 무림맹 최고의 영웅입니다. 그런 분과 교분을 쌓을 기회가 왔는데 어찌 그냥 흘려버리겠습니까? 하하하!… 우리가 비록 첫 시작은 좋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다를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수는 십절금왕문의 스타일에 미소 지었다.
적은 가까이 둘수록 좋다는 원칙에 충실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문파에 이익이 될 수 있다면 지난 과오는 얼마든지 묻어둘 수 있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좋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고 봅시다.”
기수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돈주머니를 받았다.
묵직한 중량감이 십절금왕문의 재력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살펴 가십시오.”
그렇게 소문주를 배웅하고 자신의 군막으로 돌아온 기수는 간이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큰돈이 생겼지만 주머니는 열어보지 않았다.
지금 그에겐 돈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아!…. 하고 싶다.’
하남에서 이곳까지 그 머나먼 길을 경공 없이 터덜터덜 걸어서 왔는데, 그동안 단 한 번도 여자를 안지 못했다.
사하와 아주 친하게 지냈지만, 그 아름다운 미녀와 자신과의 관계는 플라토닉 혹은 프렌드십 이상을 넘지 못했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기수는 이성으로 정욕을 제어할 수 있는 자제력의 소유자.
그러나 비자발적으로 금욕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몸도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쏟아내지 않고 고이기만 한 그 액체의 무게 때문이다.
‘건강한 심신 유지를 위해서 손으로라도 뺄까?’
백서린의 그 폭발적인 몸매를 떠올린 게 방아쇠를 당긴 느낌이었다.
그러나 기수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홍익미녀의 사명을 완수해가는 자신이 셀프 추출을 한다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럴 수는 없어! 절대로….’
그러나 기둥에 걸어두었던 구리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니 한숨만 나왔다.
‘아!…. 이 얼굴로는 안 돼.’
결국 자존심을 버리고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옛 추억을 회상해볼까 하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컴퓨터가 없는데… 어떻게 하지?’
그동안 뇌에 저장한 그림들을 꺼내야 할 상황이었다.
소재는 얼마든지 있었다.
기수는 우선 숨을 죽이고 군막 주변의 인기척을 살폈다.
가슴이 막 두근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