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80
기수는 답답하던 임시 귀마개를 빼고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닥치는 대로 쓰러트리며 징을 든 괴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호위병들은 필사적으로 기수를 막으려 했지만, 살심 품은 그에게 대항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명과 피가 난무하면서 결국 기수는 징 든 사내 앞에 이르렀다.
그는 몹시 당황하며 징 치던 자루를 휘둘러 대적했다.
기수는 살짝 긴장했지만, 괴상한 징소리와 달리 그의 무공은 의외로 평범했다.
기수는 막대기를 피하며 단번에 그의 징 든 손목을 잘라버렸다.
“아악!….”
비명과 함께 징이 땅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기수는 검으로 그의 목을 겨누며 물었다.
“넌 누구냐? 그리고 이건 도대체 뭐 하자는 수작이지?”
잘린 손목을 잡고 고통을 참던 사내는 기수를 노려볼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기수의 검이 목으로 바짝 다가가자 사내는 갑자기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가사는 없는 일종의 스캣송이었는데, 놀랍게도 귀에 몹시 익은 멜로디였다.
“이 음률은?….”
기수는 그게 바로 어젯밤 내내 들려오던 피리소리와 같은 곡조임을 알아차렸다.
다시 한 번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낌 기수는 급히 검을 찔러 상대를 죽여 버렸다. 그러자 마음은 곧 진정되었다.
기수는 상대의 수법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이제 보니, 어제의 그 소리는 치유와 휴식을 위한 게 아니라 일종의 최면술 같은 거였구나. 그리고 오늘 징소리로 그걸 끌어낸 거야.’
자기뿐만 아니라 어제 피리소리 들었던 모든 사람이 영향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수천 명의 전투력을 동시에 저하시키는 이런 술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사술이다! 이건 사술이야.’
자기의 염정구심술은 한 번에 한두 명만 제어 가능하지만, 이 피리와 징소리 조합 술법은 한 번에 수천 명을 의욕상실 상태로 만들 수 있으니 그 위력이 실로 무시무시하다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염정구심술은 상대의 내공이나 정신력이 강할 때 잘 먹히지 않고 부작용도 심한 경향이 있는데, 이 피리와 징소리는 자기한테도 통할 정도니까 위력이 훨씬 더 세다고 볼 수 있었다.
‘이거 위험한걸…’
비룡검문 제자들이 소리에 취해 당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기수는 검을 빙글빙글 회전시키면서 빠른 경공으로 다음 징 든 자를 찾아 나섰다.
최대한 빨리, 모든 적을 제거할 작정이었다.
적을 찾기는 쉬웠다.
소리를 따라가도 되고, 호위병이 밀집된 곳을 찾아가도 되었다.
두 명, 세 명, 쓰러트리는 자가 늘어갈수록 삼황맹의 저항도 격렬해졌지만, 기수는 그럴수록 더욱 힘을 냈다.
다섯 번째를 쓰러트렸을 때, 옆에 있던 삼황맹 무사가 떨어진 징을 황급히 집어 들고 기수를 향해 두드려 댔다.
그런데, 같은 징을 치는 데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뭔가를 익힌 자들만 그 술법을 펼칠 수 있는 것 같았다.
기수는 공격에 더욱 박차를 가해 마침내 징소리를 모두 멈추게 하는데 성공했다.
징을 든 자는 모두 여덟 명이었다.
그들을 모두 잃은 삼황맹 진형에는 변화가 생겼다.
퇴각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기수는 도망치는 놈들을 따라가기보다는 자신의 구역으로 복귀해 피해상황을 살피는 쪽을 택했다.
상황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죽고 다친 제자의 수가 십여 명을 넘는 것 같았다.
기수는 상태가 안 좋은 제자들을 우선 살핀 후 조치성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진백의 진영으로 가보았다.
다행히 진백은 무사했다.
그러나 턱수염에 피가 묻은 모습과 입술의 상태로 보건데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환각에서 겨우 빠져나온 것처럼 보였다.
사상자의 수는 자기 구역보다 적어 보였다.
여기저기 돌아다닌 자기와 달리 자리를 지키며 제자들을 보호한 것이다.
진백과 눈빛 교환으로 서로의 안전을 확인한 기수는 종남파와 사해문, 그리고 군소방파들의 피해상황을 둘러보았다.
비룡검문보다는 심하지만 그래도 치명타라고 할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호문평이 기수에게 말했다.
“양호법님 덕분에 적의 사술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의 팔엔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호운혜가 옆에서 금창약을 발라주며 말했다.
“고마워요. 양호법.”
그녀에게 생채기 하나도 없는 것은 오빠가 지켜주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기수는 진백과 함께 장해량에게 가서 물었다.
“진인님.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무래도 강호 경험도 많고 이곳에 주둔한 기간도 오래 되었으니까 그동안의 감정을 잊고 대책을 강구해야 할 시점이었다.
장해량도 진지한 표정이었다.
“놈들은 현현각이란 문파 소속입니다. 예전에 정사대전의 초창기에 한 번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이런 방식이 아니었지만….”
“현현각이라면….”
“음종(音宗)의 전인들입니다.”
기수는 깜짝 놀랐다.
“음종이라면 환우구종 중의 하나 아닙니까?”
“그렇소. 그들이 사마 연합과 손을 잡은 모양이오. 즉시 보고해야겠소.”
기수는 신음을 토했다.
그는 이제까지 강호행을 하면서 환우구종의 전인들을 많이 만나왔다.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자신을 치유해주고, 무공도 전수해 준 비종 태무신궁이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자신은 그곳의 전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부님을 만나 북궁심법을 익히기는 했지만 무공의 뿌리를 이루는 태무대력신공과 분광권, 그리고 태을음양대법등이 모두 태무신궁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 무림맹에서 화종의 전인인 화양문 사람을 만났고, 도종의 전인인 장백천문도 만났다.
그 다음에 만난 것은 마종.
직접 대면한 것은 아니지만 마종의 전인 천마교 교주가 기른 삼천제 중 한 명인 혈천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바 있었다.
독종 약선문의 경우엔 탁지연과 손잡고 멸문을 시켜버렸다.
그리고 사종의 전인인 일월신교.
마교와 갈라서게 된 원인이 교주가 사종의 진전을 이어받아서라고 하는데, 사실 마종에 비하면 일월신교는 그다지 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혈천제를 만난 이후 자신의 무공이 많은 성장을 이루어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껴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자신이 속한 비종과 혈천제가 속한 마종을 제외한 다른 사종, 화종, 독종, 도종의 4개 종은 뭔가 강렬한 카리스마가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 대에서 성세를 이루다가도 뛰어난 전인을 찾지 못하면 후손이 선대만 못할 수도 있다는 원칙이 그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음종은 달랐다.
전날 밤에 집단 최면을 걸고 다음날 전장에서 그걸 깨우는 이 술법은 정말 위협적이었고, 자칫하면 고수진의 무림맹을 전멸시킬 수도 있었다.
장해량이 살짝 자존심 굽힌 표정으로 기수와 진백에게 번갈아 포권하며 말했다.
“비룡문 덕분에 우리가 모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진백과 기수 모두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진백은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발언을 잊지 않았다.
“별말씀을요. 우리가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종남파의 방어진 덕분이었습니다.”
장해량의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이제까지는 그런 생각이 미미했지만, 갑자기 진백에게 깊은 동질감이 느껴졌다.
방금 함께 사선을 넘은 전우이기도 했고, 겪어보니 사람됨이 참 진실한 데다, 무공도 자기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이가 비슷했다.
사해문의 소문주나 이전에 있던 남궁세가의 공자들은 아들이나 조카뻘이라 뭔가 터놓고 얘기하기가 만만치 않았는데 진백이라면 잘 통할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우호적인 시선을 교환하고 있을 때, 남쪽 강가에 쪽배가 한 척 닿더니 한 남자가 경공을 시전하여 군영까지 올라왔다.
검문을 받고 장해량 앞에 이른 전령은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고 출혈도 많았다. 그가 무릎 꿇고 군례를 올린 후 말했다.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지금 상황이 몹시 안 좋습니다.”
“주둔지가 어디인가?”
“신성진입니다.”
장해량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신성진이라면 청성파, 장백천문, 공손세가가 배정된 데다 이번에 보타문까지 추가되지 않았소? 이곳보다 병력이 두 배는 많을 텐데, 원군이라니…”
“적이 엄청난 공세를 퍼부었습니다. 게다가 음공으로 우리 측 사기를 떨어트리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습니다.”
장해량은 깜짝 놀랐다.
“거기도 징을 울리는 자들이 있었소?”
“그렇습니다. 설마 여기도…. 허, 헌데 어떻게 적을 쫓으셨습니까?”
“징잡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소.”
“아!…. 저희들도 좀 도와주십시오.”
장해량은 진백, 호문평 등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봐서 알겠지만, 우리도 격한 전투를 치른 다음이라 여력이 없소. 본진에 구원을 청해보시오. 미안하오.”
“안 됩니다! 본진은 너무 멉니다.”
“우리가 맡은 거점을 버리고 갈 수도 없는 일 아니오. 그랬다가는 자칫 양쪽을 모두 잃을 수도 있소.”
전령은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장해량뿐만 아니라 비룡문 문주와 사해문 소문주 모두 같은 얼굴이었다.
나부터 살고 봐야 한다는 생각.
사실, 그것을 탓할 수는 없었다.
청성과 장백천문과 공손세가가 힘을 모아도 어쩌지 못한 적을 막 격전을 치른 종남파가 달려가서 무찌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령은 고개를 떨구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미 전투는 끝났을 수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마지막까지 동료들과 싸우다 죽을 작정이었다.
장해량과 진백, 호문평 등은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 신성진까지 달려간다고 해서 그들을 구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간다고 해도 몇 명이나 떼어 보낼지도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전령이 힘없이 돌아설 때 기수가 진백에게 말했다.
“문주님. 저를 보내주십시오.”
“자네가?”
“예. 저 한 명쯤은 빠져도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기수는 신성진에 보타문과 공손세가가 모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감숙성까지 오는 내내 친하게 지낸 사하의 얼굴이 떠올랐고, 또 무림에 처음 출도한 이래 신세도 지고 친하게 지내기도 했던 공손탁, 공손추 형제도 생각났다.
자기가 돕지 않아서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정말 후회될 것 같았다.
진백은 기수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사실, 고수진 병력이 적을 물리친 것은 전적으로 기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기수는 자기보다 고수였다.
입술을 깨물며 음공에 대항하며 자리만 지켰던 자신과 달리 기수는 적진으로 파고들어 소리의 원인을 찾아 제거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떠나면 비룡검문의 전력은 거의 절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큰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수가 묻는 것은 허락을 요구한다기보다는 일종의 통보로 보는 게 옳았다.
진백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게.”
어차피 잡을 수 없는데 구차하게 긴 얘기 할 필요는 없었다.
기수는 진백에게 고개 숙여 말했다.
“감사합니다. 최대한 빨리 복귀하겠습니다.”
그리고 장해량과 호문평 등에게 포권을 했다.
호운혜는 오빠 뒤에 서서 차마 말은 못하고 눈빛에만 아쉬움을 가득 담아 기수를 바라봤다. 기수는 그녀에게 슬쩍 윙크를 해준 후 전령을 따라 나섰다.
기수는 마음이 급했다.
사하, 공손탁, 공손추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령은 어깨가 축 늘어져서 기운이 없었고 쪽배를 젓는 팔에도 힘이 없었다.
답답해진 기수는 갑판에 놓인 삿대를 잡아 속도를 더하며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뭡니까?”
“편보라고 하오.”
“청성파 제자입니까?”
“옷을 보면 모르시오? 장백천문 문인이오.”
기수는 확! 한 대 때려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도와주러 가는 사람을 앞에 놓고 취할 태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원군을 청하러 왔다가 거절당한 좌절감에 어느 정도 공감이 되었기 때문에 참기로 했다.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모르지? 후후….’
고수진 병력 전부가 와도 될까말까라고 생각했을 텐데 달랑 한 사람이 따라가니까 몹시 실망하긴 했을 것 같았다.
기수는 굳이 해명할 필요성은 못 느꼈다.
신성진의 전투상황에 대해서만 질문을 했다.
편보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얘기해주었다.
상황은 고수진과 똑같았다.
밤새 피리소리를 불었고, 다음날 징을 쳐서 활성화시키는 방식이었다.
‘혹시 모든 주둔지가 동시에 당한 건가?’
최대의 피해를 입히려면 그렇게 했을 것 같았다.
시간차를 두면 대비책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궁금증을 안고 30분 넘게 배를 저어 도착한 강변.
그곳엔 이미 수백 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고수진과 달리 수심이 깊어서 강을 건너는데 배가 꼭 필요한 지형이었다.
기수는 각각의 배가 30명에서 많으면 40명 정도 탈 수 있는 크기라는 점에 집중했다. 그렇다면 상륙한 병력 규모가 고수진 쪽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배가 상륙하기 위해 강변으로 다가가자 편보는 귀마개부터 했다.
그리고 기수에게도 내밀었다.
기수는 손짓으로 그것들을 사양한 후 선수에 서서 징소리 나는 곳이 어디 어디인지 확인하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배 바닥이 모래톱에 닿자마자 검을 뽑아들고 몸을 날렸다.
“내가 길을 안내하겠…..”
편보는 자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새처럼 날아 멀어지는 기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본 적 없는 가공할 경공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노를 팽개치고 급히 기수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