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88
진백은 맹주 집무실을 나와 숙소까지 오는 내내 표정이 굳어 있었다.
어쩌면 시기상조라는 느낌.
하지만 비룡검문이 내세울 만한 업적이 없고 명성이 크지 않은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숨어 지냈기 때문이지, 실력이 부족해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모두가 어려운 이때야말로 진정한 능력을 보여줄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기수를 바라보았다.
선조의 검술을 찾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머물며 자기 문파 일처럼 도와주고 있는 고마운 절세고수. 그러나 언젠가는 떠나갈 사람이기에 그가 없는 상황에 대해서도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 더욱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기수가 진백의 표정을 읽고 말했다.
“문주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비룡검문은 잘 해낼 겁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고맙네.”
기수가 그렇게 해준다면 일은 더 수월해질 것이었다.
그러나 진백은 기수의 도움 없이도 해낼 생각이었고, 어느 정도 자신도 있었다.
기수가 그에게 말했다.
“문주님. 저는 좀 들렀다 갈 곳이 있습니다.”
“그리하게.”
진백과 헤어진 기수는 함양 시내로 들어가 대장간을 찾았다.
그는 노점에 걸어둔 병장기들을 손가락으로 튕겨 소리를 들어본 후 가장 마음에 드는 집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말했다.
“유성추와 단검을 만들어주시오.”
“원하는 무게와 길이를 말씀하십시오.”
기수는 원하는 유성추 무게와 단검의 길이를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대장간 주인은 다 듣고 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단검은 던지는 용도로 쓸 생각이시군요?”
“그렇소. 무게는 한 근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이걸 들어 보십시오. 이게 딱 한 근인데…”
기수는 추를 손바닥에 올리고 중량을 가늠해보았다.
“이것보다는 약간 무겁게 만들어주시오.”
“알겠습니다. 몇 개나 원하십니까?”
“한 스무 개 정도….”
대장간 주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면 상당한 무겐데, 어떻게 가지고 다니시려고요?”
“흐음… 그것도 문제네.”
“가죽으로 띠를 만들어 양 어깨에 메도록 해드릴까요?”
“좋소. 그렇게 해주시오.”
기수는 선금으로 넉넉한 돈을 지불했다.
무거운 거 들고 다니기 싫어하는 그가 단검을 스무 개나 메고 다니기로 마음먹은 것은 현현각의 루주라는 꼬맹이 노인들에게 호되게 당했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만나면 파천강기에 단검을 실어 날려서 주둥이를 벌리기도 전에 관통상을 만들어줄 작정이었다.
한편, 사하 역시 보타문 제자들과 재회했다.
죽고 다친 제자가 적지 않았지만, 그나마 신성진에서 퇴각하던 당시의 인원은 온전하니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자들의 상처를 돌보고 확인하면서 사하는 무림맹 본진에서 있었던 일들, 그리고 그 이후에 생긴 변화들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사하가 천천히 돌아서 복귀하는 동안 제자들은 이곳에서 지내며 수많은 얘기들을 전해들은 것이다.
사매 중 한 명이 사하에게 말했다.
“사저. 그래서 우리도 4개 단 중 하나를 골라야 되요. 사저가 돌아오신 다음에 선택하실 거라고 미뤄뒀거든요.”
“그래? 어디가 좋을까?”
“아미파가 단주를 맡은 백호단으로 가요. 아무래도 여인 문파끼리 모여 있어야 서로 편하지 않겠어요?”
“그럴 것 같지?”
“예. 제자들도 모두 그러기를 바라고 있어요.”
“알았어. 그렇게 신청을 할게.”
사하는 보타문을 대표하여 맹주 집무실로 갔고, 현무단에 신청을 했다.
현무단 단주를 비룡검문에서 맡기로 했다는 사실을 거기서 알았기 때문이다.
양호법과 가까이 있을 수 있다면 다른 조건은 다 필요 없었다.
돌아와서 그 얘기를 하자 의외로 별 반발이 없었다.
비룡검문과 보타문은 하남에서 난주까지 머나먼 길을 동행한 사이.
그러다 보니 사하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 중에도 비룡검문 남자들과 야릇한 눈빛을 주고받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사하가 무사히 넘어가는 것에 안도하고 있을 때 한 여인이 보타문의 거처로 찾아와 그녀를 만나자고 했다.
사하는 상대의 큰 키에 먼저 주눅이 들었고, 화려한 옷차림과 고가의 장신구, 비싼 향수냄새에 기가 죽었다.
“누구신지요?”
“저는 사해문의 호운혜라고 해요.”
“아! 그러시군요.”
“당신이 보타문의 사하인가요?”
“그런데요.”
호운혜는 상당히 못마땅한 눈으로 사하를 훑어보았다.
사하는 그녀의 신분이 옷차림보다 더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고 객청을 가리켰다.
“들어가서 차라도 한 잔 하시지요.”
호운혜는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아뇨. 간단하게 한 가지만 확인하면 되니까 공연히 번거롭게 할 필요 없어요.”
“뭘 확인하신다는 건지….”
“비룡검문의 양호법과 어떤 관계죠?”
사하는 당황했다.
사해문의 여식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하기도 했고, 또 그런 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초면에 묻는 게 기분 나쁘기도 했다.
“그건 왜 묻는 거죠?”
“그냥 궁금해서요. 얘기를 듣자니 둘이 함께 탈출을 한 것 같은데…. 혹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다른 문제는 없었죠?”
“문제라면….”
“남녀가 함께 다니다 보면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 말예요.”
사하는 사매와 제자들이 있는 앞에서 차마 사실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설령 호운혜와 자신, 단 둘만 있는 자리였다고 해도 사실대로 말할 이유는 없었다.
호운혜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다면 됐어요.”
그리고는 곧바로 돌아섰다.
사하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잠깐만요!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죠?”
호운혜가 돌아서서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죠. 양호법은 내 남자니까요.”
사하는 어이가 없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양십일과 보낸 뜨거운 밤들, 그의 몸을 자기 몸 내부에 받아들이고 자극해주던 많은 시간들을 생각하면 그의 진짜 주인은 자기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었다.
호운혜는 사하의 표정 변화를 살피더니 갑자기 인상을 썼다.
“당신… 혹시….”
두 여인이 서로를 노려봤다.
급격한 감정변화가 얼굴을 통해 드러나면서, 호운혜와 사하는 서로 상대가 양십일과 어떤 관계인지 확연히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여자의 직감이랄까.
그것은 절대로 틀리는 법이 없었다.
사하는 양십일이 미웠다. 자기 말고 다른 여자와 깊은 관계였다니.
더구나 사해문의 딸이라면 경쟁하기도 만만치 않은 상대 아닌가.
호운혜 역시 질투심에 몸을 떨었다.
정말 오랜만에 오빠가 죽이지 못할 남자를 찾았는데, 그가 자기를 놔두고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렸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특히나 평생 두 번째로 만나는 명품 연장을 절대 다른 여자와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너. 양호법과 헤어져.”
곧장 반말이 나왔다.
사하도 지지 않았다.
“흥! 어린년이 건방지네.”
“기껏해야 한두 살 차이로밖에 안 보이는데 유세하냐? 그리고 나이 먹은 게 자랑도 아니잖아?”
“키만 큰 어린애보다는 낫지.”
양십일이 미운 건 미운 거고, 어쨌거나 다른 여자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런 생각은 호운혜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타문 따위가 우리 사해문의 상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자기 능력에 자신이 없으니까 가문으로 협박해 보려고?”
“흥! 자신 없기는 누가 자신 없어? 너 정도는 한 주먹거리도 안 돼.”
호운혜가 팔을 걷어붙이고 위협하자 보타문 제자들이 다가왔다.
호운혜는 웬만한 남자보다 큰 키의 소유자라 긴 팔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몹시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사하는 손짓으로 그녀들을 물러서게 했다.
“너희들은 전부 안으로 들어가.”
“하, 하지만… 사저.”
“어서!”
그녀의 명령으로 마당은 텅 비었다.
사하가 호운혜를 향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희 사해문이 중원 최고의 문파라고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우리 보타문은 특별한 경우 아니면 중원에 발을 디딜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히 해놓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이번 무림맹에 파견된 우리 보타문의 인원이 스물 다섯 명밖에 안 되는 이유가 뭔지 알아?”
호운혜는 코웃음을 쳤다.
“여비가 없어서?”
“아니. 우리는 개개인이 고수이기 때문에 너희 사해문처럼 밥벌레들을 많이 끌고 다닐 필요가 없거든.”
호운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안 그래도 두들겨 패고 싶은데 자청해서 싸움을 걸어주니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해문을 조롱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줄 알았느냐?”
호운혜가 다짜고짜 주먹을 뻗었다.
오빠만큼은 아니지만 타고난 신력에, 어려서부터 영약을 밥 먹듯이 하면서 키운 내공, 그리고 고명한 사부들을 모시고 배운 정묘한 초식까지 어우러진 주먹이었다.
“흥! 키만 큰 멍청이!”
사하는 상대의 공격 안쪽으로 오히려 파고들어 간격을 급격히 줄였다.
너무 가까워져서 손도 뻗을 수 없는 상태.
사하는 어깨로 호운혜의 가슴을 가격했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호운혜는 대여섯 걸음이나 뒤로 밀려났다.
호운혜는 자기가 당했다는 사실에 놀라 눈을 부릅떴다.
사하가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슴이 그렇게 미련하게 크니까 동작이 굼뜨지.”
“이, 이년이….!”
호운혜는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달려들어 주먹과 발을 날렸다.
사하는 그녀의 모든 공격을 막아내며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그런데 쉽지가 않았다.
상대는 팔다리가 길고 동작이 큰 만큼 허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타격 반경이 넓고 힘이 넘치다 보니 막을 때마다 전신이 뒤로 밀리는 기분이라 좀처럼 제대로 된 반격을 가하기가 쉽지 않았다.
검을 뽑는다면 결판을 낼 수 있겠지만, 질투심이 폭발한 중에도 무림맹 내에서 동료끼리 피를 봐선 안 된다는 사실에 양측이 동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치열하게 밀고 밀리는 공방을 계속하자 물러났던 보타문 제자들이 슬금슬금 마당으로 나와 싸움구경을 하고 응원도 했다.
그것은 밖에서 기다리라는 명령을 들었던 사해문의 여자 무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합과 타격음이 들리자 다른 무림인들도 속속 몰려들었다.
사하와 호운혜는 상대의 면상에 주먹 한 방을 제대로 꽂아 넣고 싶었다.
하지만 승부는 쉽게 가려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호운혜는 그 와중에도 사하의 보타문 무공이 자기보다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가 먼저 꼬리를 내렸다.
“끝까지 갈 거야?”
사하도 주변 시선이 신경 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셋에 끝내자. 하나! 둘! 셋!”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마지막 초식을 가장 화려한 것으로 장식하면서 동시에 거리를 벌리고 날렵한 낙법으로 착지했다.
둘이 작은 목소리로 짰다는 사실을 모르는 구경꾼들은 탄성을 토했다.
일부는 박수를 치는 사람까지 있었다.
호운혜가 포권을 하며 사하에게 말했다.
“과연 보타문의 무공은 명불허전이군요.”
사하도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응대했다.
“사해문의 호소저가 무림의 여인들 중 으뜸이라 하더니 과연 대단하십니다.”
웃으면서 그렇게 서로를 칭찬했지만 속으론 쉬지 않고 욕을 해댔다.
두 사람이 웃으며 헤어지자 구경꾼들도 그들의 싸움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타문 제자들은 사하에게 질문을 퍼부어댔다.
“사저. 무슨 일이에요?”
“왜 사해문과 싸우셨어요?”
눈치 빠른 제자도 있었다.
“혹시 비룡검문 양호법 때문인가요?”
사하는 호통 한 번으로 그녀들의 입을 다물게 한 후 밖으로 나갔다.
“난 다녀올 데가 있으니 그동안 검술 연습이나 하고 있어.”
그녀가 향한 곳은 비룡검문의 거처였다.
양십일에게 따지지 않고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호운혜가 거기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 역시 양십일을 만나려는 생각인 듯 했다.
그러나 양십일은 없었다.
외출중이라고 했다.
비룡검문 문주 진백은 일어나서 사하를 맞았다.
“보타문에서 우리 현무단과 함께 하기로 하셨다지요? 환영합니다.”
“예. 문주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부탁은 저희가 드려야지요. 앉으십시오.”
사하는 호운혜를 슬쩍 본 후 말했다.
“사해문은 청룡단 소속이라고 들었는데…”
여긴 뭐 하러 왔냐는 의미였다.
호운혜가 말했다.
“고수진에서 함께 싸운 일을 얘기하려고 왔지요.”
사하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그건 옛날 일이고, 앞으로는 우리가 비룡검문과 함께 할 겁니다.”
이전엔 너에게 기회가 있었지만, 이젠 상황이 바뀌었으니 알아서 물러나라는 의미였다. 그 속뜻을 알아차린 호운혜는 죽일듯이 사하를 노려봤다.
맞은편에 앉은 진백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